132화
[10회차] I'm from Earth
▷성적표를 꼼꼼히 확인해주세요!
성적표
이름 강한수
전투력 업적 평판 인성
F F F FFF
비고 잡았다! 요놈!
이건 말도 안 된다!
지금까지 받은 그 어떤 성적표도 이것보다 나쁘진 않았다. 전투력까지 F학점에다가 인성은 그것마저 뚫고 FFF학점이 나왔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불합격했습니다.
▷사유: 귀여운 동료를 살해했습니다. 이건 절대로 용납받을 수 없는 반인륜적인 행위입니다. 또한, 불법 스킬로 능력치를 조작해서 얻은 학점은 무효 및 벌점 처리됐습니다. 다음 시험부터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재시험을 시작합니다.
“라누벨이 이걸…?”
나는 1회차 막바지에 동료들을 기습해서 몰살시켰다. 2회차에선 미래의 요정왕 실비아와 인어공주 아쿠아를 살해했다.
그래도 인성이 F학점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쓸모없는 요정들을 구출하는 등의 선행을 베풀었음에도,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을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인성이 FFF학점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불법 스킬.
지금까지 스킬 블랙박스로 아무 말 없던 시스템이 이번엔 ‘불법 스킬’로 지정했다.
이건 즉, 앞으로는 블랙박스를 사용하면 지구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판타지 신의 경고인 셈이다.
▶위로: 힘내세요! 강한수 생도님의 실력이라면 다음에는 꼭 졸업하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교생 아가씨.
하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진 않았다.
당장 지구로 돌아가서 부모님을 지켜드리고 싶은데, 빌어먹을 판타지 신이 노골적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효도(孝道)를 못 하는 건 인성에 문제없냐?
부모님이 잘못되시면, 내 영혼을 걸고서라도 판타지 신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부러트릴 것이다.
▷교직원 일동이 당신을 보면서 난감해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늘 그랬듯 찬란한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10회차가 시작됐다.
*
“환영합니다, 용사님!”
시작은 늘 그랬듯 라누벨의 가증스러운 인사였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소환돼서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이곳은 판타지아. 용사님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랑 다른 차원입니다.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게요. 저기, 용사님? 듣고 계신 거 맞으시죠?”
아니. 전혀 안 듣고 있다.
어차피 했던 말의 반복이니까.
그런데,
“아주 잘 듣고 있습니다, 라누벨 양! 귀여운 당신의 이야기라면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내 바로 옆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용사님은 라누벨을 아시나요?”
“하하! 물론이고말고요! 5년이나 함께 모험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다시 라누벨 양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헤헷. 과찬이세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살인 충동이 몰려왔으나 꾹 참았다.
두 번째 용사.
지크 때랑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전형적인 금발의 미공자 스타일의 청년이었는데, 처음답지 않게 금방 적응해낸 지크랑 달리, 이 용사는 나처럼 처음이 아니었다.
라누벨을 기억할 뿐만이 아니라….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판타지아 주민 여러분. 그리고 귀여운 라누벨 양! 마왕 페도나르는 제가 책임지고 쓰러트리겠습니다. 이미 한 번 쓰러트린 경험이 있으니,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나처럼 마왕을 쓰러트린 경험이 있었다.
그런 청년의 능력치는?
▷종족: 유니크 휴먼
▷레벨: 86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포술S 명중A 통역A 관통A 검술B 궁술B 정력B 마법B 회피C 잠입C 거래C 선동C 협상C 마력C 매력C 생존D 행운D 맷집D 기력D 신성D 내성D 치유D 회복D 수영D 연애D 사교E 색적E 채집E 사육E 창고E 약탈E 연기E 조교E 지배E 요리F 야영F 탐색F 망각F 휴식F 권술F 불사F 노래F 품위F 정령F 농사F 조화F 체력F 민첩F 생명F 근력F 축복F 호흡F 방어F 재련F 만능F 낚시F 지력F
▷상태: 부활, 마검
단순한 회귀 용사가 아니었다.
당장 마왕이랑 싸워도 될 수준의 능력치.
눈여겨볼 스킬에는 포술(砲術)과 창고가 있었다.
판타지아 대륙에도 화약을 이용한 무기가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마법과 정령의 존재가 화약 무기의 흥행을 막았다.
화약을 대처할 수 있는 마법이 존재하고, 물의 정령이나 불의 정령이 조금만 장난쳐도 화약은 불발탄이 돼버린다.
그렇기에 ‘포술’은 숙련도를 올리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무려 A등급?
또 다른 스킬 때문에 수긍됐다.
스킬 창고는 4차원 개인 소지품 공간으로서,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졸업생들만 참가할 수 있는 ‘용사 페스티벌’에서 얻을 수 있는 희귀한 스킬이다.
즉, 이 청년은 졸업생이다.
포술 스킬도 지구에서 올렸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야만적인 세계로 다시 돌아온 걸까?
“저기…. 일단은 옷부터 입어주시면 안 될까요?”
라누벨이 새빨개진 얼굴로 귀여운 척하면서 말했다.
나는 북대륙의 어느 공주님의 자궁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청년은 어째서 알몸인 걸까?
그것도 청년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됐다.
“이, 이런! 죽으면서 장비와 옷이 전부 날아간 건가…. 귀여운 라누벨 양이 나의 멋진 몸을 보는 건 괜찮지만, 시커먼 당신들까지 보는 건 원치 않거든.”
뿅!
청년이 스킬 창고에서 구슬 하나를 소환했다. 그 직후에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철컥철컥.
구슬이 해체되더니 청년의 온몸을 감싸는 게 아닌가?
단 몇 초 만에 그럴싸한 갑옷이 됐다.
“뭐야, 저건…?”
기능성은 둘째 치고 너무 멋지잖아?!
내 중얼거림을 들은 걸까.
“하하! 반가워, 동향 친구. 이 갑옷은 처음이지? 이것은 최근에 ‘빅토리아 팩토리(factory)’에서 개발한 신제품으로, 상위 100명에게만 선별적으로 판매한 갑옷이야. 정식 명칭은 슬라임 아머. 내구력이 약한 대신, 휴대성과 착용감이 탁월하지.”
슬라임 아머(Slime Armour)…!
평상시에는 일반인 행세하다가 악당이 등장하면 순식간에 영웅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의상이었다.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상품이었다.
매우 탐나는걸.
무심코 중얼거린 나도 경쟁심을 불태우면서, 스킬 창고에서 ‘천사의 옷’을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이 청년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불량식품 같은 지크는 참고할 게 없었지만, 명백하게 졸업한 경력이 있는 용사라면 다를 것이다.
“굉장하네.”
“흐흐. 앞으로 이 형님만 믿으라고.”
...이젠 자칭 형님인가?
내 앞에서 우쭐대고도 목이나 허리가 부러지지 않은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본다. 불쾌하기보다는 신기한 천연기념물을 보는 기분이다.
그가 우쭐댈 수 있는 이유가 다 있었다.
종족: 네츄럴 휴먼
▷레벨: 900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S 통역A
▷상태: 양호
S등급의 블랙박스는 당연히 안 보일 테고, 그렇다면 종족과 레벨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스킬 하나 없는 900레벨 용사.
숙련도를 끊임없이 관리해주지 않으면 요정왕처럼 스킬이 전부 사라지고 레벨만 남긴 한다.
이 청년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이야~ 굉장히 좋은 종족을 가졌는걸?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회귀해도 레벨이 보존된다면 굉장히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겠어. 마왕은 못 쓰러트렸지만, 그래도 900레벨에 죽었으면 판타지아 대륙에 대해 잘 알겠네.”
분석능력이 제법 뛰어났다.
그는 나의 종족 효과만 보고 근접하게 유추해냈다.
▷종류: 종족
명칭: 네츄럴 휴먼
등급: 고유
고유1: 경험치를 흡수한다.
고유2: 경험치를 보존한다.
고유3: 경험치를 사용한다.
▷특성1: 정령의 사랑을 받는다.
▷특성2: 자연의 가호를 받는다.
▷특성3: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
▷종족1: 번식력이 우수하다.
▷종족2: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생각난 김에 나는 이 청년의 종족도 살펴봤다. 그도 용사의 보편적인 종족인 ‘아크 휴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류: 종족
▷명칭: 유니크 휴먼
▷등급: 전설
▷전설1: 기연을 종종 마주친다.
▷전설2: 불리할수록 강해진다.
▷전설3: 방심할수록 견고해진다.
▷특성1: 행운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2: 평판이 잘 오른다.
▷종족1: 번식력이 우수하다.
▷종족2: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대단히 편리하고 유용한 종족 효과들에 할 말을 잃었다.
그야말로 ‘전설’이란 등급에 어울리지 않는가!
“내 종족을 본 모양이네. 지구에서도 내 종족을 처음 본 사람들은 다 그런 표정을 지었었지! 뭐, 동생처럼 고유 등급은 아니라서 몇 명 더 있긴 하지만, 널리고 널린 용사 숫자에 비하면 적은 편이지. 내 이름은 루크.”
“가명?”
자기소개에서 성이 빠졌기 때문이다. 이름도 묘하게 대충 지은 느낌이 확 났고.
루크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동생에게 좋은 걸 알려줄게. 판타지아 대륙에서 명성을 빨리 쌓으려면 이름이 기억하기 쉬워야 해. 이건 내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야. 지구에서 통계가 나온 자료지. 길거나 동양식 이름을 쓴 용사들의 명성이 대체로 낮았거든.”
...아주 좋은 정보를 얻었다.
메모해두자.
용사 이름은 서양식으로 짧게.
부모님께서 주신 이름을 바꾸는 불효를 저지를 마음이 없었지만, 빨리 졸업해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도 고려해보자.
“나는 강한수.”
“본명이네. 이름을 보니, 한국인이고.”
“맞아.”
“쉽게 졸업하고 싶다면 가명을 추천하마. 이것도 인연이니 이 형님이 하나 추천하지. 어때? 일단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해도 돼. 손해 볼 건 없잖아?”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내가 입을 옷을 가져온 라누벨이 대화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용사님들. 이동하면서 이야기해주세요.”
루크가 씩 웃으며 답했다.
“귀여운 라누벨 양의 부탁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건 여담입니다만, 지구에 당신의 팬클럽도 있습니다.”
“정말요?!”
“그렇습니다.”
그 지구는 좀 멸망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지구는 절대 그럴 리 없다.
“아! 루크. 지구의 상황은 어때?”
“아주 좋다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 내가 죽는 바람에 전체 전력이 30%쯤 감소했을 테니까! 하지만 조금 놀라운걸. 외계인에게 져서 죽을 때까지만 해도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는데, 귀여운 라누벨 양을 다시 만나게 됐다니! 이건 그동안 지구를 열심히 지킨 보상이 틀림없어.”
“...쟤가 귀여워?”
나는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이며 앞장서서 걸어가는 라누벨의 가증스러운 뒤태를 가리키며 물었다.
루크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객관적으로 귀엽잖아?”
“......”
만두 국왕이랑 면접까지도 대단히 수월하게 흘러갔다.
당당하게 ‘미래에서 온 용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루크는 만두왕국의 왕족과 귀족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무료봉사란 점에서 다를 게 없었지만.
“공짜로 일해주는 게 어때서? 국왕의 환심을 사서 공주를 가질 수 있으면 남는 장사야.”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공주에게는 관심 없기 때문이다.
9회차처럼 신성제국의 음흉한 황녀 엉덩이를 마음껏 후려치는 권리를 준다면, 한두 번쯤 무료봉사할 의향이 있지만.
아무튼,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루크가 졸업하는 방법을 매우 잘 안다는 것.
졸업생들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지구에는 이미 ‘판타지아 대륙’의 정보가 많이 넘어간 상태였다.
패키지 게임처럼 매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기에, 다양한 용사의 경험담이 담긴 ‘공략집’마저 판매되고 있었다.
동료의 신상정보와 획득방법은 기본!
루크의 행보는 모범 답안지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물어봤다.
“검왕 알렉스는 어떻게 처리하지?”
내 질문에 루크가 씩 웃더니, 답안지를 가진 교사처럼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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