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10회차] 용사의 신무기
판타지 신이 블랙박스를 ‘불법 스킬’로 지정했다.
그래서 나는 성검 뉴클리온과 성녀H를 소환할 수 없는 상태.
하지만 여기고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성녀H는 피자처럼 분할된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용사 페스티벌 세계에서 용사들을 안내하는 단 하나뿐인 성녀였다.
성검 뉴클리온도 마찬가지. 판타지아 대륙에서 구할 수 있는 성검은 수수깡이나 다름없지만, 이 성검은 마왕 페도나르를 썰어버리기 위해 준비된 진짜베기였다.
즉, 이건 불법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성검’이 당장 필요했다.
블랙박스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무 유치해서 봉인해뒀던 방식을 사용했다.
“혼돈으로 파괴된 망각의 별에서 탄생한 마지막 검이여. 공허한 사랑과 우정을 베어버릴 꿈과 희망이여. 그 거룩하고도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는 계승자가 이렇게 찬미하노니, 태초부터 내려온 맹약에 따라 그 전설을 입증하라! 성검 뉴클리온!”
...이러고 아무런 일도 안 벌어지면 자살하고 싶을 것이다.
다행히도 내 주문은 무사히 접수됐다.
뾰옹-!
요정 용사를 죽이고 손에 넣은 성검 뉴클리온이 내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소환됐다.
“이 무슨···?”
내가 주문을 읊을 때까지만 해도 “이 동생이 약 먹었나?” 같은 시선으로 보던 루크의 입이 쫙 벌어졌다.
그도 용사답게 이것이 성검임을 단번에 알아봤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성녀A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대의 직업이 용사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그녀는, 이것이 ‘용사의 전용무기’라고 일컬어지는 성검임을 눈치챘다.
그 둘만이 아니다.
“우와···.”
“굉장하군···.”
“전설의 성검···.”
“도둑놈이 정말로 용사였다니···.”
잡것들의 감탄사가 뒤따랐다.
직업이 용사나 성녀가 아니더라도, 예장용 검처럼 정교한 세공이 빼곡하게 박혀있는 뉴클리온의 디자인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것을 성검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주문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성검 뉴클리온을 손에 넣으면서 저절로 내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성녀H도 비슷한 방식으로 소환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이론 단계라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성녀H도 나중에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성녀야. 무거운 엉덩이 뗄 준비는 됐니?”
현재는 루크의 모험에 편승하는 중이기에 성녀A로 만족하자.
움찔, 한 차례 몸을 떨며 정신을 차린 성녀A는 바로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진중한 어조로 선언했다.
“앞으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용사님.”
이것으로 성왕국에서 볼일은 끝났다.
성검1과 성검3는 북대륙에 있다. 내가 애용했던 성검2가 중앙대륙 동쪽 바다에 잠들어있긴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도 일이다.
이 정도면 최고의 결과 아닐까?
“안 됩니다! 성녀님!”
그때, 성녀A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엑스트라 미청년이 참견했다.
위대한 용사님을 방해하는 넌 누구니?
“성왕국 최강의 영웅 토마스야. 별명은 토마토.”
내 의문에 답하듯, 루크가 바로 가르쳐줬다.
그는 내 성검에 대해 하고 싶은 질문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일단은 눈앞에 엑스트라부터 해결하기로 한 것 같았다.
“아! 영웅T였군!”
나는 20년도 더 된 기억의 구석 끝자락에서 간신히 이 엑스트라 토마토의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이름은 영웅T. 성별은 수컷. 나이 불명.
이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종족: 휴먼
▷레벨: 747
▷직업: 성기사(신성=축복↑)
▷스킬: 신성B 축복B 검술B 내성B 색적C···
▷상태: 초조
영웅T는 성왕국에서 영웅으로 통하지만, 태생이 천한 탓에 직업은 수도사 다음으로 흔한 ‘성기사’였다.
그래도 천사와 고위성직자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스킬 신성을 B등급까지 올린 근성 하나만은 대단하다고 칭찬해줄 만했다.
레벨도 중급악마쯤은 혼자 막을 수 있는 수준.
“토마스 기사님. 그동안 저를 호위하느라 수고하셨어요.”
“안 됩니다, 성녀님! 저들이 용사라는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호위기사로서,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자들에게 고귀하신 성녀님의 안위를 맡길 순 없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분이로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저만의 뜻이 아닙니다.”
영웅T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주위의 성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성왕국에는 성녀님이 꼭 필요합니다.”
“성녀님.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내일 저랑 옷가게 가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저는 앞으로도 성녀님을 지키고 싶습니다.”
선량한 용사님의 모험을 방해하는 이기적인 야만인들은 판타지아 대륙 어디에나 존재한다.
용사를 돈으로 보는 여관주인, 무기의 재료를 구해오라는 대장장이, 자기 일을 떠넘기는 약초꾼, 할인 따위 없는 상인···.
동료 영입을 방해하는 마을주민들도 만만치 않다.
내가 이것들을 합법적으로 베어버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판타지 신께서 내 소망을 들어주셨다.
영웅T가 말했다.
“용사와 그 일행들이여. 성녀님을 지킬 실력이 되는지, 성왕국의 기사 토마스가 시험해주겠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전개였다.
*
“성검을 먼저 구해오라는 성녀의 발언이 예상 밖이었지만, 성기사 토마스의 시험은 예정대로야. 용사로서 명성을 조금이라도 쌓은 후에 성녀를 영입하러 오면 회피할 수 있는 이벤트지만, 크게 걱정할 거 없어. 공략집 작성자는 30레벨로 통과했으니까. 시험을 핑계로 약간의 가르침을 주는 거야.”
신전의 훈련장에서 루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대련은 일대일로 진행됐다.
콩!
“아얏?!”
꿀밤을 맞은 라누벨이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귀여운 척했다. 멀리서 대충 보는데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망측한 광경이었다.
영웅T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여운 라누벨 양. 주문이 짧은 실용적인 공격마법을 조화롭게 구사하는 전투방식은 좋지만, 저처럼 마법 내성이 높은 강적에게는 약한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위험부담을 안더라도 주문이 긴 강한 마법을 구사할 시간을 버는 연습을 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귀여운 아가씨랑 대련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성스러운 기사란 자가 가증스러운 라누벨의 귀여운 척을 단번에 구분하지 못하다니!
성왕국의 미래가 걱정됐다.
다음은 알렉스였다.
“크윽···!”
“참으로 무시무시한 재능입니다, 이웃 왕국의 기사단장이여.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이만한 실력이라니! 그대의 레벨이 높았다면 좋은 승부가 됐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승자로서 충고 하나만 하자면,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레벨을 올리십시오. 사랑하는 사람과 조국을 수호하려면 자신부터 강해져야 합니다.”
“명심하겠소.”
“그대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알렉스는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패배했다.
방어를 무시한 공격적인 전투법을 구사했지만, 신성과 축복으로 보호받는 영웅T의 견고한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래서 한 방씩 주고받으면 자기만 손해를 봤다.
영웅T의 지적처럼 낮은 레벨의 문제였다.
다음은?
“꺅?!”
성기사의 강철 장갑에 손찌검당한 실비아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나뒹굴었다.
당연히 그녀가 회피할 줄 알았던 영웅T가 당황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엘브하임의 주민이여! 정령을 소환하고 멀뚱멀뚱 서서 어쩌자는 겁니까? 정령들의 자율의사에 맡기는 전투법은 고위주술사나 할 수 있는 오만이오. 압도적인 정령의 숫자로 밀어붙이는 끔찍한 전략이지. 하지만 보통은 정령과 주술사가 함께 싸운다오. 전투경험을 더 쌓으십시오. 무척 잔인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지금의 당신은 성녀님을 지키긴커녕 발목을 잡을 겁니다.”
“으으···. 정령만 돌아왔어도···!”
“정령에게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십시오. 다음!”
궁수E가 활을 들고 나섰다.
그녀에게 걸려있던 악마의 저주는 성녀A가 말끔히 치유해줬다.
알렉스는 레벨이 낮다고 핀잔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영웅T의 레벨이 더 낮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아···.”
성기사의 날카로운 검에 활대가 잘린 궁수E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궁수가 활을 잃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는 셈.
영웅T가 멋쩍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살면서 당신처럼 활을 잘 다루시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진심으로 개안한 느낌입니다. 이것이 엘브하임 왕국이 자랑하는 바람의 기사. 하지만 상대가 좋지 못했습니다. 저는 성녀님의 호위기사이기에 궁수의 저격을 항상 경계해왔습니다. 또한, 지금 사용하시는 활과 화살이 당신의 실력과 명성에 한참 못 미치는 것도 패배의 요인 같습니다.”
“좋은 대결이었어요.”
“별말씀을요. 저도 그 유명한 바람의 기사랑 대결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당신에게 엘브하임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대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당장 결혼해도 될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
다음 차례는 나인가?
“동생 차례는 없을 거야. 내가 토마스를 쓰러트릴 예정이거든.”
루크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앞으로 나섰다.
파티 리더를 맡은 루크가 순서상 마지막이어야 했지만, 내가 영웅T를 쓰러트릴 걸 예상하고 먼저 나서는 것 같았다.
용사의 마음은 다 비슷하다는 걸까?
지크 빼고.
“용사께서 당돌한 말씀을 하시는군. 소환되고 아직 한 달도 안 지났을 텐데.”
“루크다.”
“좋소. 용사 루크. 앞선 대련으로 내 실력을 전부 파악했다고 착각하는 당신의 오만함을 꺾어주지.”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성녀를 빼앗아간 존재라고 여긴 걸까?
방금까지 신사적이었던 영웅T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그게 아니면 자신을 쓰러트린다는 루크의 공언에 자존심이 상했든가.
뭐가 됐든 진심으로 싸우리란 건 틀림없었다.
본격적으로 대련이 시작되기 직전, 루크가 내게 말했다.
“강한수. 내 싸움을 잘 보고 있어. 네가 어떻게 그 수상한 성검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훨씬 굉장한 무기가 있지! 너무 강해서 봉인해둔 진정한 나의 힘. 벗이여! 그대가 상대하기 적합한 강적이 눈앞에 있다. 지금, 그 봉인을 풀고 다시 나와 함께 싸워다오! 보리스!”
잠깐! 보리스라고···?
보리스는 늙은 왕자의 본명이다.
그는 영혼까지 분쇄되어 나와 함께할 터.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그 이름이 나오는 걸까?
하지만 정말이라면 경계해야 했다.
지금의 나는 블랙박스를 쓸 수 없으니까.
그리고 보리스가 소환됐다.
나는 살짝 멍한 얼굴로 그것을 보고는 루크에게 물었다.
“골렘?”
“아니. 보리스는 안드로이드야. 이것도 빅토리아 팩토리에서 개발한 신무기 중 하나지. 빅토리아 총장이 보유한 최강의 안드로이드, 프로토타입의 양산형이라고 할 수 있지! 유일한 흠이라면, 아직 계약기술이 완성되지 않아서 평상시에는 창고에 봉인해둬야 해.”
프로토타입이라면, 내가 가정용 안드로이드에 빙의한 보리스랑 물물교환한 골렘D를 말하는 듯했다.
아주 유익한 거래였던 거로 기억한다.
루크가 자신만만하게 소환한 보리스(?)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섬세하게 잘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였다.
하지만 무기질처럼 표정 없는 얼굴이 섬뜩했다.
능력치는?
▷종족: 아크 골렘
▷레벨: 900
▷직업: 마녀(미녀→마력↑)
▷스킬: 마력A 사격B 매력B 마술B 재생C···
▷상태: 가동
골렘의 직업은 “미녀를 건드릴 때는 조심!”이란 격언을 판타지아 대륙 전역에 뿌리내리게 한 ‘마녀’였지만, 양손에 들린 무기는 마법사의 지팡이가 아닌 두 자루의 권총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킬을 보면 알겠지만, 내 특기는 검이 아닌 총이야. 그러니 잘 보고 있어. 이 형님의 진짜 실력을 보여줄 테니.”
4차원 창고에서 권총을 꺼낸 루크가 우쭐댔다.
왼손에 마검, 오른손에는 권총.
근미래의 정예병사 같은 비주얼이다.
내가 해줄 말은?
“어, 그래. 잘 보고 있을게.”
그리고 시작된 전투.
명백한 2대1의 상황이었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선 전통적으로 골렘을 인원수에 포함하지 않는다.
암흑상회에서 개발한 ‘붉은색 골렘’이 북대륙을 휩쓸기 전까지는.
그렇기에 영웅T도 대수롭지 않게 수락했다.
빵야! 빵야!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총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탄창을 교체하는 낌새는 없었다.
총알과 화약 대신, 보리스의 A등급 마력을 압축했다가 터트려서 사출하는 방식인 듯했다.
마력 등급이 낮은 루크의 화력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마검을 이용한 근접전투 견제로 그 부족함을 메꿨다.
주인과 안드로이드의 콤비 연계가 제법 훌륭했다.
하지만 마지막 승자는 영웅T였다. 성왕국 최강의 호위기사가 펼친 견고한 방어를 뚫지 못한 탓이다.
“주인님. 마력이 고갈됐습니다.”
“헉헉! 망할···!”
영웅T의 찬사가 이어졌지만,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루크의 구겨진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차례가 왔다.
“토마토. 힘들면 내일 대련해도 돼.”
나는 넌지시 운을 뗐다.
“내 이름은 토마토가 아니라 토마스다. 그리고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다. 성녀님의 치유력이면 체력은 순식간에 회복되니!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덤벼라. 성검의 용사여.”
“그리고 하나 더.”
“뭐지?”
“긴장으로 내 손바닥이 땀에 좀 젖었거든. 그러니 성검이 미끄러져도 양해해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참고하지.”
“토마토. 간다?”
실수는 따지지 않기다?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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