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37화 (137/430)

 137화

[10회차] 그것을 내놓으세요! 그것?

위대한 마스터 몰랑의 수제자인 내가 판타지 세계의 성기사 나부랭이에게 쩔쩔맨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판타지 능력치는 쓰지 않는다.

내 몸을 순환하는 호르몬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기니까.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잘 활용하지는 못하는 것.

아드레날린, 인슐린, 글루카곤, 도파민, 엔돌핀….

신(神)이란 작자들은 변태가 틀림없다.

판타지 능력치도 ‘육성’이란 개념을 도입했지만, 우리의 인체(人體)도 그 ‘육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복훈련으로만 두뇌와 근육이 부분적으로 발달하고, 인체에 유익한 호르몬은 특정 상황에서만 분비된다.

비효율의 극치!

그렇기에 나는 마스터 몰랑을 존경한다.

그분의 가르침도.

“성검의 용사여. 오라!”

영웅T가 건방지게 칼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호기롭게 외쳤다.

잇따른 대련으로 지쳐있던 그는 성녀A의 회복술로 체력까지 말끔히 회복한 만전(萬全)의 상태.

지쳐서 졌다는 변명은 하지 못하리라.

나는 사양하지 않고 도약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우정의 힘은 안 쓴다는 주의다만.”

내 몸은 깃털처럼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이 힘찬 바람으로 내 등을 떠밀고, 앞을 가로막는 무형의 장애물을 좌우로 밀어내면서 공기저항이 한없이 낮아진 덕분이다.

여기에 땅의 정령이 가세했다.

제자리높이뛰기, 허들넘기의 발돋움 판처럼 솟아난 대지가 내 발을 스프링처럼 튕기며 띄워줬다.

가속도에 더욱 가속도가 붙은 건 당연지사.

“이, 이 무슨-!?”

방금까지 최고의 상태였던 영웅T는 허둥댔다.

불의 정령과 물의 정령이 합심해서 그의 주변에 당연히 있어야 할 수분을 전부 증발시킨 탓이다.

영웅T는 제대로 눈을 뜨질 못했다.

지구에서는 그걸 고상하게 ‘안구건조증’이라고 부르지만, 무식한 판타지 원주민이 알 리 없었다.

마음의 정령은 영웅T의 본능을 자극했다.

갑자기 아랫도리가 불끈한 영웅T는 전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시선이 계속 내가 아닌 성녀A에게 넘어갔다. 정결한 옷에 가려진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무심코 바라본다.

산만해진 정신은 행동을 무디게 했다.

“어딜 보시나?”

히쭉, 가볍게 웃어 보인 나는 성검 뉴클리온을 내리그었다.

안구건조증과 짝짓기충동으로 반응이 한 박자 늦어진 영웅T는 반격은 엄두도 못 내고 회피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물컹.

훈련장의 대지는 단단하게 잘 다져진 편이었지만, 불운하게도 영웅T가 밟고 있던 땅만 질퍽한 진흙이었다.

심지어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상태로 성급하게 회피를 시도했으니,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크읏-?!”

발이 미끄러진 영웅T의 몸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하지만 나는 공명정대한 용사님이다. 한 수 무르면서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취미는 없다.

영웅T도 내가 봐주는 걸 원치 않으리라.

아니면 말고.

댕강- 촤아악!

성검 뉴클리온은 영웅T의 검을 베고 갑옷까지 수직으로 갈랐다. 하지만 얼마나 깊게 살을 파고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칼날이 너무 날카로워서 손맛이 없었던 탓이다.

사람을 베도 허공을 가른 느낌이니 어련할까.

“성왕국의 국보가 이리 허무하게…?”

칼자루만 남은 자신의 검을 본 영웅T는 말문을 잃었다. 갈라진 갑옷 사이로 철철 흘러나오는 피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만큼 중요한 검이었던 걸까?

하지만 내 앞에서 한눈 파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막 몸을 추스르며 일어서는 영웅T의 잘생긴 안면을 축구공처럼 힘껏 걷어찼다.

뿌득.

이번에는 확실히 감각이 전해져 왔다.

이건 높은 콧대가 부러졌을 때의 느낌이다.

“흐어-?!”

영웅T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알렉스였다면 분명히 견디고 반격까지 했을 텐데, 이 녀석은 레벨만 높고 실속이 없었다.

그렇기에 엑스트라인 거겠지만!

“어이쿠!”

이때, 사고가 터졌다.

내 손에서 미끄러진 성검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가더니, 그대로 영웅T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절단해버린 것이다.

이건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실수였다.

“토마스 기사님?!”

“오! 맙소사! 신이시여!”

“어떻게 이런 일이….”

주위에서 구경하던 잡것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마음에 드는 결과였다.

용사 파티에 성녀A가 합류하는 걸 방해하던 최대 훼방꾼을 깔끔히 처리- 아니, 불우한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에 더는 딴소리 안 나올 것이다.

성기사들이 영웅T의 머리통을 목의 절단면에 부착했다.

비위 약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장면이었지만, 그걸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활에 드는 비용이 올라가니까.

“당신은 이리 허무하게 떠나실 분이 아닙니다. 일어나세요. 토마스 기사님.”

우우웅-!

성녀A가 영웅T의 부활을 시도했다.

부질없는 시도다. 나에게 죽은 자는 영혼까지 전부 빨리기에 부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으으으…. 이, 이게 무슨….”

어째선지 영웅T가 부활했다.

레벨이 더는 ‘성왕국의 영웅’이라고 부르기 힘들 만큼 대폭 하락하긴 했지만, 살아났다는 건 틀림없었다.

▷종족: 휴먼

▷레벨: 317

▷직업: 성기사(신성=축복↑)

▷스킬: 신성C 축복C 검술C 내성C 색적D…

▷상태: 부활

747레벨에서 317레벨로!

그런데 레벨만 떨어진 게 아니다.

영웅T의 스킬들도 전반적으로 한 등급씩 하락했다. 기존에 F등급이었던 스킬들은 완전히 소실되고.

완전한 죽음보다야 낫지만, 스킬도 타격을 받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앞으로 어디 가서 ‘영웅 토마토’라고 명함도 못 내밀 것이다.

그나저나….

어째서 부활할 수 있었던 거지?

▶추측: 실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강한수 생도님이 저 기사분을 살해한 게 아니라, 성검이 멋대로 날아가서 목을 벤 거잖아요.

오호라? 교생 아가씨의 분석이 제법 그럴싸한데?

실수를 몇 번 더 하면서 실험해봐야 더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현재로선 교생 아가씨의 추측이 신빙성 높았다.

자기 능력치를 확인한 영웅T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성녀님을 붙잡으려 한 제게 신께서 벌을 내리신 모양입니다.”

아무도 용사님 탓을 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손이 미끄럽다.”라고 내가 경고한 데다가, 대련 중에 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제법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도 인정했다.

이건 판타지 신께서 내린 벌이라고.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달게 받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따지겠는가?

그 뒤, 아무도 성녀A를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성왕국의 중책을 맡은 성녀A는 막 떠날 수 없었다. 인수인계부터 작별인사까지 이것저것 할 시간이 필요했다.

성녀A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성왕국의 수도에서 자유롭게 개별행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너는 왜 쫓아오냐?”

“내 정령들을 돌려줄 때까지 따라다닐 거야.”

새침한 표정의 실비아가 스토커처럼 따라붙었다.

보모같이 그녀를 제어하던 궁수E는 악마의 저주가 풀린 날에 “용사님. 공주님을 잘 부탁합니다.”라고 무책임한 말을 하고 떠났다.

궁수E는 엘브하임 왕국에 상황을 보고한 후, 실종된 동료들과 왕비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는 것 같다.

내 머릿속에는 ‘땅의 기사’를 제외한 전원의 정확한 위치와 현황이 들어있지만, 궁수E에게 가르쳐주진 않았다.

진실을 모르는 편이 행복할 때도 있으니까.

엘브하임 왕국의 왕비가 요정왕보다 마왕을 더 사랑하는 이 막장드라마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실비아에게도 마찬가지.

내가 미운 정이 있어서 이것만은 봐준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부모 욕은 하지 않는 법이니까.

“마음대로 해.”

“흥!”

삼류용병 같은 몰골이었던 실비아는 성왕국에서 지급해준 깨끗한 옷과 장신구로 치장했다.

...라는 건 대외적인 이야기.

어느 왕국이든 공짜로 용사 파티를 대접해주지 않는다.

내 1회차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실비아가 현재 입은 옷은 성녀A가 미숙한 어린 시절에 입었던 평상복이다.

본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홀가분한 편이다.

원조 스토커인 라누벨을 루크가 데리고 가준 덕분이다.

쉴 새 없이 귀여운 척해서 거슬리는 라누벨보다는 실비아가 그나마 상대하기 편했다.

이번 기회에 물어보기로 했다.

“실비아. 너는 엘브하임 왕궁의 정원 지하에 뭐가 있는지 알아?”

“정원 지하…?”

“모르면 됐어.”

정원 지하에 최초의 정령이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연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요정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다.

실비아가 바로 발끈했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네가 어른이란 증거도 없지. 안 그래?”

“이익…!”

토라진 듯하면서도 실비아는 계속 쫓아왔다.

성왕국 수도의 유명한 술집에 들렀다가 방앗간에서 맛좋은 떡을 살 예정이었던 나로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극약처방을 하기로 했다.

“너는 계속 정령을 돌려달라고 하는데, 나를 따라오면 정령을 계속 잃기만 할걸?”

“...그러면 내가 어떡해야 하는데?”

“뭔 헛소리야?”

“뭐든지 잘했던 오라버니에게 가려진 내가 유일하게 인정받은 게 정령 친화력이었어. 네 몸에 달라붙은 정령들은 내게 특별해. 동족들에게 무시당했던 내가 친구와 동료를 사귈 수 있게 해준 아이들이라고.”

“그래? 열심히 해봐.”

실비아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정령들은 진심으로 그녀가 좋아서 따른 게 아니다.

유감스러운 3대 요정왕의 혈통이라서.

순전히 맹약에 따랐을 뿐이다.

“이런 냉혈한이 뭐가 좋다고….”

계속 툴툴거리는 실비아를 이끌고 술집에 들어갔다.

원형 테이블마다 가득 메운 남성 손님들이 실비아의 반반한 얼굴을 보고 눈을 빛냈다가 금방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동료, 친구들이랑 술을 마셨다.

LCD 모니터에 실망한 모양이다.

빈자리를 찾아서 앉은 나는 바텐더에게 성왕국 최고의 술을 주문했다.

하지만 내가 술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자마자 술값을 뻥튀기하는 게 아닌가?

나는 곧바로 바텐더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응징했다.

이 새끼가 용사님을 호구로 아네!

“켁켁! 손님! 용서해주십시오!”

“선량한 용사에게 사기 치고 무사하길 바라냐? 앙?”

나를 말리려는 덩치를 힘껏 걷어차 줬다. 어디서 감히 용사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협박해?

내가 주인장에게 인성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술집이 정적에 휩싸였다.

뭔 일인가 싶어서 시선을 슬쩍 돌려보니, 술집의 출입문으로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건강미가 돋보이는 미녀가 둘. 그녀들의 골반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술집 안의 남정네들 눈동자도 좌우로 움직였다.

미색(美色)만큼 그녀들의 종족도 범상치 않았다.

▷종족: 올드 휴먼

▷레벨: 999+

▷직업: 추적자(정보→추적↑)

▷스킬: 은신Z 추적Z 침투MAX 선술MAX 잠입SSS…

▷상태: 마검, 골렘, 긴장, 추적

앞장선 미녀는, 피부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암행복(暗行服) 위에 판타지아 대륙 귀족 영애들이 편하게 즐겨 입는 스타일의 가벼운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안에 껴입은 수상한 검은색 옷만 아니면, 판타지아 대륙의 원주민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종족: 올드 엔젤

▷레벨: 999+

▷직업: 성기사(신성=축복↑)

▷스킬: 신성Z 축복Z 검술Z 비행Z 조련MAX…

▷상태: 마검, 마룡, 분노

폭력적인 미모의 소유자였다.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실의에 빠진 어떤 남성이라도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가슴은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종족은 닭대가리의 대명사인 천사.

백치미가 언뜻 보이는 무표정 또한 매력적이었다.

복장은 천사의 날개를 소환해도 무리 없도록 등이 훤히 드러난 순백의 드레스였다.

여신(女神)이라고 해도 믿어질 비주얼.

“찰떡이랑 좋은 승부가 되겠는걸.”

이쪽도 맛을 봐야 객관적으로 비교가 되겠지만.

아무튼, 종족에 공통으로 붙은 수식어 ‘올드’가 그들의 목적을 능히 짐작하게 해줬다.

예상대로 둘은 똑바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건방진 바텐더의 멱살을 놔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모른 척하며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마실 수 없었다.

내 술잔을 낚아챈 천사가 단숨에 술을 들이켠 탓이다.

“뭐냐, 넌.”

내가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감춰진 요추(腰椎) 4번과 5번을 아직 가만히 놔둔 건, 한 방에 죽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성왕국의 수도.

이 암탉이랑 싸움이 벌어져서 성왕국이 초토화되면, 눈물을 머금고 11회차로 넘어가야 한다.

그런 전개만은 피하고 싶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것을 내놓으세요.”

내 오른쪽 빈자리에 앉은 닭대가리 천사가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 빈 잔에 술을 다시 채우며 답했다.

“그것? 아! 원한다면 침대 위로 따라와.”

이 용사님이 얼마든지 꽂아주겠다.

“그, 그거 말고요! 누가 당신의 그것을 달라고 했나요?! 착각도 유분수지…!”

“좋은 말로 한다면서 왜 신경질이야.”

듣는 용사 기분 나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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