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10회차] 우정의 힘...?
오늘부터 암탉 아가씨는 정령D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본인도 좋다고 흔쾌히 수락한 사항이니 문제없을 것이다.
정령이 되긴 했지만, 나와 정령D는 육체적으로 이상이 없다는 게 판명됐다. 5번 확인한 사항이니 확실하다.
그리고 또 하나.
정령D는 나에게 종속된 존재다.
다른 정령들은 내가 부탁하면 성희롱한 게 미안해서 들어주는 식이었지만, 정령D는 명령하면 본인의 의지랑 상관없이 무조건 따랐다.
그 차이는 매우 컸다.
▶종족: 네츄럴 스피릿
▷레벨: 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S 통역A 사랑E 정력F 매력F
▷상태: 성검, 성녀
그리고 내 레벨이 대폭 감소한 원인도 깨달았다.
정령으로 임명할 때, 내 경험치를 준다.
기존의 방식이 대상을 죽여서 영혼과 레벨을 빼앗았다면, 이번에는 역으로 영혼과 레벨을 돌려줘서 살려냈다.
내 개인 소유의 정령으로.
그렇기에 ‘환생’이 아닌 ‘임명’인 것이다.
“굉장히 흥미롭네.”
정령D 외에도 더 있었다.
내가 그녀를 ‘정령A’라고 명명하지 않은 이유다.
내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던 친구들이 ‘주인의 명령’을 받고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강한수…! 약속을 어겼겠다…!”
소환된 늙은 왕자가 고함을 질렀다.
지구에서 내게 패배하고 소멸한 줄 알았지만, 가정용 안드로이드로 빙의해서 영혼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정당한 거래를 통해서 내 소유물이 된 친구다.
줄줄이 나열해보니 사연이 꽤 깊잖아?
그건 아무래도 좋다.
▷종족: 올드 스피릿
▷레벨: 999+
▷직업: 왕자(국력=기력↑)
▷스킬: 기력Z 침투Z 검술MAX 마기MAX 내성SSS…
▷상태: 종속, 격분
전성기의 레벨과 스킬을 복원한 늙은 왕자. 알몸이란 점만 빼면 전력으로 당장 사용해도 무리 없을 듯했다.
앞으로 정령A라고 부르자.
“웃기지 마라. 내 이름은 보리스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정령A야. 알겠어?”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라! 내 이름은 정령A다! 헉?!”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다음은….
나는 유통기한 지난 생선 비린내에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요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왕 페도나르가 판타지아 세계를 탈출했을 때를 대비해서 최초의 용사가 키운 첨병.
성검 뉴클리온의 원래 주인이며, 자폭해서 나를 이 야만적인 세계에 다시 처박은 원흉이기도 하다.
나랑 시선이 마주친 요정 용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정령B. 잘 지내보자구?”
“흥! 강제적인 명령 외에는 절대 협조하지 않겠다!”
“마음대로 해.”
나도 적극적인 협조는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적으로 만났고, 마지막까지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내가 정령B의 입장이었다면 잔인한 현실이랑 타협했겠지만.
그 현실은 차차 가르쳐주기로 하자.
▷종족: 올드 스피릿
▷레벨: 100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검술ZZ 맷집Z 무공SS 검기S 내력S…
▷상태: 종속, 침울
레벨만 높았다면 가장 위협적인 강적이지 않았을까?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는 논외로 치고.
직업이 용사이기에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육체(肉體)를 주신 당신에게 이 몸과 마음을 바치겠습니다. 친애를 담아서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되는지요?”
요정 여성이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요정 용사가 부리던 골렘도 부활했다.
하지만 지구에서 마주쳤을 때랑 스킬 구성이 달랐다. 골렘이란 기계 덩어리에 전부 담기엔 그녀의 영혼이 너무 강대했던 탓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짜 육체가 생긴 그녀는 전성기의 힘을 회복했다.
내가 1레벨까지 떨어진 원인이다.
▷종족: 올드 스피릿
▷레벨: 999+
▷직업: 퇴마사(악마→피해↑)
▷스킬: 항마ZZ 정화ZZ 신성Z 쌍검MAX 민첩MAX…
▷상태: 종속, 감격
악마 사냥에 특화된 스킬 구성. 악마는 그녀랑 마주치기만 해도 먼지로 분쇄되지 않을까.
마왕이 무더기로 덤벼도 못 이길 것 같았다.
정령C라고 부르기로 했다.
“히프리아 성녀님께선 안 보이시네요.”
“히프-? 아! 찰떡이 왜?”
어깨를 움츠린 정령C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성녀H의 근황을 내게 물었다.
혹시…?
“아니요.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어서요. 호호!”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간드러진 웃음과 매력을 자아낸 정령C가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췄다.
어떤 트라우마인지는 알 것 같았다.
정령C의 머리통을 지팡이 장식으로 걸어둔 적이 있었다.
나로선 ‘에고 완드’라는 회심의 역작이었지만, 머리통 당사자와 지팡이 사용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흠. 아무나 정령으로 임명할 순 없는 것 같네.”
판타지아 원주민은 안 됐다.
분할된 세계의 분할된 영혼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구인은 되는가?
이것도 아니었다. 나는 지구에서 특공대 소속의 인물을 다수 죽였지만, 그들의 영혼은 정령으로 환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건은….
▶빼꼼: 온전한 영혼의 영웅 아닐까요?
오! 교생 아가씨. 잘 지냈어?
▶긍정: 지크 생도보다는 루크 생도가 확실히 편했어요. 초등교육과정 졸업생이었던 데다가, 지구에서 잡지처럼 판매되는 공략집도 크게 한몫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전반적인 시험지 조정이 필요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요.
그럴 것이다.
나오는 시험지 문제가 매번 같으니까.
사람 일이란 게 객관식 문제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진 않지만, 정답을 미리 알고 시작하면 0점 받아야 할 불량학생도 70점 이상은 받을 수 있으리라.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예를 들어,
위기에 빠진 원주민을 발견했다고 치자.
보자마자 구하러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저 사람을 구해주면 푸짐한 보상이 있다고 공략집에 나왔어!”라는 마음가짐이라면, 그것은 교직원 일동이 바라는 용사가 아니다.
묻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구해야 한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볼까.”
왕관 쓴 정령 5마리가 내 몸에 또 달라붙었지만, 이젠 정령 스킬이 아예 생성되지도 않았다.
내가 정령 그 자체이기 때문일까?
끼이익-
녹슨 경첩 소리가 나는 술집 출입문을 열었다.
▶설명: 그날부터 7년이 흘렀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미리 설명해줘서 고마워, 교생 아가씨.
“이거 참….”
성왕국 수도는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다.
버려진 건물과 도로는 나무와 풀이 뒤덮고, 인간 대신 정령이 바글바글했다.
펄럭!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생성했다.
그리고 하늘로 수직상승 후에 지상을 쓱 내려다 봤다.
터전을 옮기기 쉽지 않은 왕궁과 신전만 정령과 숲에 둘러싸인 채 유지되고, 인간의 주거지는 외성 밖으로 쫓겨나듯 이주했다.
내 영향인 건 틀림없었다.
“이걸로 평판이 깎이진 않겠지…?”
우선은 자칭 형님인 루크랑 합류하는 게 급선무였다.
무려 7년이나 흘렀다고 하지 않았던가?
전투력은 넘어가더라도, 평판과 업적 등은 루크 혼자서 7년 동안 독식해왔다. 이대로 마왕을 쓰러트리면 녀석만 졸업할 확률이 다분하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
▶웃음: 그것만은 걱정하지 마세요.
교생 아가씨. 그게 무슨 말이야?
▶소곤: 작년에 마왕에게 도전했다가 대패했거든요. 무언가 바뀌었다는 공지는 못 받았는데, 악마의 출생률이 올라갔다는 모양이에요. 그게 공략집이랑 다르다고 루크 생도가 혼란스러워했어요.
9회차 때, 마왕이 세계의 규칙을 또 건드렸다.
그것이 악마의 출생률이었던 듯했다.
인구는 힘!
경영학과 경제학을 제대로 이해한 마왕이다. 먼 미래를 보고 투자한 비공식 패치가 틀림없다.
그래서?
▶해설: 발이 느린 요정공주와 성녀는 생포되고, 루크 생도를 탈출시킨 검왕과 인어공주, 용병왕은 추격대를 막다가 체력고갈로 차례차례 전사했어요. 그들은 악마로 부활해서 적이 된 상태예요. 복수를 다짐한 루크 생도는 새로운 동료를 영입하기 위해 북대륙으로 모험을 떠났어요.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은?
▶경이: 루크 생도가 악착같이 보호한 덕분에 생포되거나 전사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어요.
마왕 페도나르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악마의 출생률이 올라가면 용사가 쓰러트릴 적도 많아진다. 그러면 용사의 레벨도 예전보다 빠르게 상승할 터.
용사의 레벨이 높아지면?
더 자주 비공식 패치를 할 수 있다.
루크의 탈출은 동료들의 희생 덕분이 아니라, 마왕이 고의로 살려준 것이다. 레벨을 더 올려서 오라고.
라누벨까지 풀어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참….”
판타지아 대륙은 용사를 키우는 양식장이다.
그런데 마왕도 용사를 키워서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판타지 신과 마왕의 목적이 묘하게 일치한 셈. 그 사이에서 고생하는 건, 루크처럼 공략집을 맹신해온 용사들일 것이다.
예전에는 공략집만 따라가면 3년 이내에 무난하게 졸업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비공식 패치로 그게 힘들어졌다.
라누벨의 귀여운 척을 받아주며 느긋하게 모험하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악마의 군세를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식량과 주거지, 육아복지시설 등이 충분하다는 가정 하에 인구는 복리(複利)로 계산된다.
많으면 많을수록 빠르게 증가한다.
그래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국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좁혀지긴커녕 더욱 벌어지는 것이다.
즉,
“나에게는 기회로군?”
루크는 마왕 토벌에 실패했다.
그리고 마왕의 군세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3년 동안 키운 동료들을 잃고 기세가 한 번 꺾인 용사 루크가 이걸 따라잡으려면 정말 피똥 쌀 정도로 수련해야 한다.
차라리 자살하고 회귀해서 재시작하는 편이 더 쉬울지도?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움직였다.
동향인 용사 루크의 상황은 교생 아가씨가 알려줘서 알 수 있었지만, 그 외의 정보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산율 증가로 악마의 숫자가 빠르게 불어난다면, 주거지 확보를 위한 영토확장은 필수불가결.
마왕의 영토랑 인접한 만두왕국, 성왕국, 요정왕국은 최우선 공격대상이다.
그 나라들이 안전할까?
“마기에 심취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위대한 마왕님 아래에 대동단결!”
“용사 일행을 찾은 자에게 포상금을 내리겠다!”
“마왕님 아래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성왕국과 만두왕국은 이미 마왕의 수중에 떨어졌다. 내가 잠들어있던 성왕국 수도만 성역(聖域)처럼 버티는 상황.
앞서 언급한 두 나라의 형편이랑 비교하면 요정왕국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소규모 전투만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인명피해가 누적되는 것만으로도 인구가 적은 요정왕국은 존속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래도 아직 국가가 유지 중인 게 어딘가?
엘브하임의 왕비님이 정치질을 잘한 모양이다.
적국에 붙잡힌 가엾은 포로의 몸인데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니? 한 나라와 종족을 대표하는 국모(國母)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요정왕은 아내 복이 넘치는 게 아닐까.
하여간,
“도시의 상황이 참 오묘하네.”
마왕 페도나르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인간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분위기는 아니었다.
낳아준 부모보다 마왕을 더 섬기라는 사상을 강요하긴 했으나, 생활의 질은 예전보다 더욱 윤택해진 것 같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종족: 휴먼
▷레벨: 3
▷직업: 요리사(경력→요리↑)
▷스킬: 요리E 청소F 마기F
▷상태: 통제
모든 주민이 많든 적든 스킬에 ‘마기’가 있었다.
나라가 악마숭배자들로 구성된 셈.
그렇기에 전쟁은커녕 사사로운 시비조차 붙지 않았다.
감시카메라가 도처에 깔린 도시에 사는 시민처럼, 악마의 통제를 받는 인간들은 얌전히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나쁜 점도 있다.
정형화된 틀에 맞춘 것 같은 효율적인 삶. 이상적이긴 하지만, 다양성과 변화가 부족해진다.
이렇게 되면,
▷종류: 종족
▷명칭: 휴먼
▷등급: 일반
▷일반1: 이종교배가 가능하다.
▷종족1: 적응력이 우수하다.
▷종족2: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
종족특성이 떨어진다.
다양한 가능성 때문에 인간 중에 불세출의 영웅이 태어날 수 있었다. 소위 천재나 신동이란 부류들.
요정이나 난쟁이, 천사, 악마는 이런 변수가 없다.
복사기에서 찍어낸 것처럼 외모와 재능이 평준화되어 있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되긴 하겠군.”
얼른 마왕을 쓰러트리고 11회차로 넘어가자. 이건 아무리 봐도 답이 없었다.
다양성은 둘째 치고, 용사가 패배하면서 중앙대륙 절반이 마왕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다른 용사는 그동안 잠이나 퍼질러지게 자고.
평판과 명성이 남아날 리 없었다.
“어? 강한수잖아?! 야! 여기야! 여기!”
하늘을 날던 나는 지상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렸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겠지만, 무식한 원주민들은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절로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루크잖아? 언제 중앙대륙으로 왔대?”
교생 아가씨. 북대륙에 있다면서?
▶변명: 시간과 예산이 부족해서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항상 살펴보는 건 아니거든요. 여전히 지크 생도도 담당하고, 제 사생활도 있기에 빈틈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용사 루크는 마왕에게 패배하고부터 4년 동안 북대륙에서 새로운 동료를 모은 상태였다.
현자, 얼음공주, 검희, 성녀C, 군신.
황금색 골렘을 조종하는 군신까지 동료로 영입해낸 건 의외였다.
“하하! 어떠냐, 나의 새로운 동료들이! 그리고 공략집에도 없던 새로운 성검을 얻었지! 듣고 놀라지 마라! 무려, 에고소드다!”
우정의 힘을 과시한 루크가 성검3를 보여주면서 한껏 자랑했다.
“...오! 멋지군.”
나도 잡것들을 소개해주기로 했다. 개개인의 전투력이 마왕을 이길 정도밖에 안 된다.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