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10회차] 나를 풀어다오! 어서!
“노력해보겠습니다, 아버지.”
“흠….”
열심히 하겠다는 어린애에게 심한 말은 삼가기로 했다.
길고도 긴 용생(龍生)에서 7년은 찰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노력해서 망룡왕 뇌비우스처럼 훌륭한 마룡이나 악룡으로 성장할 기회는 아직 얼마든지 있다.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그래, 쑥떡아. 열심히 노력하렴.”
“네!”
내 한마디에 해맑게 미소 지은 쑥떡은 옆에 손을 잡은 성녀H를 올려다보며 칭찬을 바라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성녀H는 생긋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참 잘했어요. 용기는 가장 소중한 덕목 중 하나랍니다.”
“헤헤♪ 명심할게요, 어머니.”
...7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웃집 아주머니도 키우는 고양이에게 “귀여운 내 새끼!”라면서 친자식처럼 아끼셨는데, 비슷한 마음인 걸까?
“이봐, 강한수.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이 꼴로 놔둘 셈이지?”
정령A가 덜렁거리는 아랫도리를 손으로 가리지 않은 당당한 자세로 내게 질문했다.
“계속 수치를 줄 생각인데?”
“쭉 느끼던 의문이지만, 네놈은 정말 용사가 맞는 거냐?! 내 여자들을 눈앞에서 끔찍하게 몰살시키고 영혼을 속박하더니, 이젠 대놓고 수치를 주겠다니!”
“실험재료로 파는 것보다는 낫잖아?”
외계인을 고문하거나 해부해서 정보를 얻어내고 싶은 지구의 국가와 단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꽤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데?
잠시 말이 없던 정령A가 침착해진 어조로 말했다.
“...너는 용사가 맞는 것 같다. 그런 최악의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면서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에 감사하지.”
“이제야 좀 대화가 통하는군.”
“.....”
“하지만 정령A의 말도 옳아. 이대로는 남들에게 미안하지.”
시간이 흐르면서 이 육체에도 조금씩 적응됐다.
또한, 내가 이 정령들을 지배한다는 자각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깨달았다.
05레벨→1레벨
굳이 사냥을 안 해도 야금야금 오르던 경험치를 사용했다.
어디에?
뿅! 뿅! 뿅! 뿅!
나는 정령들에게 속옷을 만들어줬다.
경험치를 좀 더 투자했다면 훨씬 면적이 넓은 속옷을 만들어줄 수 있었겠지만, 현재는 이게 한계다.
그래도 속옷의 역할은 충실히 해냈다.
중요한 부위는 가렸다.
“이, 이 주인님 놈아! 이걸 속옷이라고 지급해준 거냐?!”
속옷을 입은 정령D가 새빨개진 얼굴로 항의했다.
“재료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어. 스타킹과 가터벨트는 나중에 지급해줄 테니 지금은 그걸로 참아.”
“그딴 건 필요 없다! 이게 어딜 봐서 속옷인지나 해명해라! 끈 달린 나뭇잎이지 않은가!”
“너무하네.”
경험치 효율을 극대화한 내 야심작인데.
앞으로 경험치를 쌓으면 무기도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력한 장비일수록 경험치가 많이 필요한 건 당연지사.
정령들은 현재로도 쓸모 있지만, 먼 미래까지 고려하면 부지런히 사냥해서 무장을 강화해야 한다.
내 적은 너무나 강하기에.
정령의 복장 문제를 해결한 나는 다음 행선지를 결정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최초의 정령을 만나봐야겠는걸.”
정령으로 환생하면서 여러 변화가 있었다.
그중에 눈여겨볼 점은 속성.
모든 정령은 한 가지 속성에 특화되는데, 정령으로 환생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빛, 어둠.
이것들이 아니면 대체 무슨 속성이란 말인가?
교생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해?
▶고민: 새로운 속성의 정령이라고 생각해요. 강한수 생도님 휘하의 정령들도 전생의 능력과 육체를 가지고 있잖아요? 이건 일반적인 정령이랑 성질이 전혀 달라요.
맞아! 총배설강이 아니지!
일반적인 정령이랑 육체가 똑같았다면 ‘강한수의 희망찬 모험’은 그날부로 종료. 그것을 되찾는 절박한 여정이 시작됐을 것이다.
“그럼, 바로 가볼까.”
예전 같으면 공간이동 마법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두왕국과 성왕국이 악마들에게 점령당하면서 요정왕국이랑 이어진 공간이동 마법진이 끊어졌다.
어쩔 수 없이 땅이나 하늘을 이용해야 했다.
나로선 나쁠 게 없었다.
정령들의 레벨을 올려야 했으니까.
“쑥떡아. 좋은 걸 가르쳐줄게.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잘 보고 있어.”
펄럭!
정령C의 잘록한 허리를 왼팔로 끌어안은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비상했다.
그리고 정령C에게 명령했다.
“지상을 전부 정화해버려.”
“네. 주인님.”
그녀의 노래가 중앙대륙 전역으로 확장됐다.
우리가 폭격기처럼 지나간 경로의 지상에는 악마와 악마추종자가 깡그리 몰살됐다.
잘 찾아보면 착한 악마와 악마추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어느 세월에 일일이 구분하면서 잡고 있겠는가? 구분하는 사이에도 마왕의 군세는 늘어나는데.
그러니 깔끔히 정리하는 편이 낫다.
“실용성만 추구하는 이상한 용사로군….”
“그분이 흥미를 느끼실만합니다.”
지상으로 뛰어서 뒤따라오는 정령A와 정령B는 정화를 버텨낸 고위악마들을 사냥하면서 레벨을 올렸다.
내게 허가를 받고 전생처럼 천사의 날개를 소환해낸 정령D는 이 둘을 위해 고위악마를 찾는 레이더 역할을 했다.
경험치는 주로 정령B에게 몰아줬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탈출한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기 위해 100레벨을 고집해왔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성녀H는 용으로 다시 변한 쑥떡의 등을 타고 쫓아왔다.
성왕국에서 만두왕국까지.
“국왕께선 안녕하지 못하신 모양이네.”
용사를 공짜로 부려먹으려던 왕은 천벌을 받았다.
악마숭배자였던 왕비의 배신으로 내부에서부터 무너진 만두왕국은 손쉽게 함락됐다는 모양이다.
왕과 왕자들은 교수형.
악마의 왕자랑 재혼한 왕비는 여왕으로 즉위하고, 공주는 첩으로 들어가서 약 3년 전에 악마를 낳았다고 한다.
이 나라도 꽤 파란만장하다는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건 왕족과 귀족들의 이야기일 뿐.
그 아래 백성들은 평화롭게 지냈다.
누구의 지배를 받든 대우는 비슷했으니까. 인간이든 악마든 세금만 적게 걷으면 좋다는 식이다.
악마의 침공을 막는답시고 징집된 사내들이 몰살당하면서 도시와 마을에 여성의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긴 했지만, 남성의 빈자리를 악마들이 채우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여기는 현대 지구가 아니다.
지구에선 여자가 혼자 살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선 다르다.
나무로 된 현관문은 쉽게 부서지고, 젊은 여성이 밤에 돌아다니면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달라는 유혹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남자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악마든 인간이든.
“주인님. 정리할까요?”
“당연하지.”
악마들이 인간의 남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 아버지를 죽인 악마들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라도 괜찮다면 나는 놔두고 싶다.
여생을 힘들게 사는 것보다야 낫잖은가?
하지만 그건 판타지 신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인간과 악마의 혼혈로 득실거리는 세계를 바랄 리 없다.
파앗!
정령C가 노래를 부르면서 정화가 시작됐다.
만두왕국과 성왕국이 일시적으로 여인국처럼 바뀌겠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가 합법이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이러면 평판과 인성은 문제없겠지!”
정의로운 용사님이 악마의 지배로부터 나라를 해방해줬다.
이 어디에도 편파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다음은?
나와 잡것들은 요정왕국 엘브하임으로 향했다.
*
중앙대륙 서쪽에 자리한 요정왕국 엘브하임은 높은 천연산맥과 밀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외부의 침략을 받기 대단히 어렵다.
그 반대도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현재, 비실비실한 요정으로만 구성된 엘브하임 왕국은 인구가 적은 소국(小國)의 비애를 절절히 경험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요정 전사 혼자서 악마를 50명 쓰러트리고 전사(戰死)했다.
계산상으로는 이득이 틀림없지만, 요정은 하루에 1명 태어나고 악마는 500명 태어난다고 생각해보라.
손익계산이 무의미해진다.
“이래서 인간이 최강이지.”
성욕만큼이나 번식력이 우수하다.
음양의 조화와 결합을 멸시하는 멍청이들이 있는데, 압도적인 인구의 폭력에 국가가 유린당해봐야 정신 차릴 것이다.
바로 저 요정들처럼.
고상한 척한 결과가 포로와 노예다.
인간은 다양한 가능성 탓에 머저리와 사회부적응자가 자주 태어나지만, 매우 낮은 확률로 불사신 같은 영웅이 출현한다.
얼굴, 능력.
이 둘이 평균적으로 우수한 요정이랑 달리, 인간은 극소수에게 편애처럼 몰리는 경향이 강한 결과다.
판타지 세상은 이 영웅들이 지배한다.
영웅이 없는 요정은?
“크윽….”
“엘브하임 왕국도 끝인가….”
“내 동정이…. 흑흑!”
멸망의 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여태까지 버틴 게 용한 거다.
요정왕 마누라가 정치질을 잘하지 않았다면 진즉 멸망해서 모든 요정은 가축과 노예로 전락했을 테니까.
벌거벗겨진 요정들이 굴비처럼 엮여서 끌려가고 있었다.
비싼 요정 남성들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곱게 포장해서 동대륙에 팔고, 여성들은 온갖 잡역에 동원됐다.
청소, 빨래, 농사, 채집, 깃발, 의자….
“빠르게 정리하자고.”
“네.”
지상의 악마들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나는 요정에게 유감이 없다.
모든 요정이 실비아처럼 난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 찾아보면 요정A처럼 순진한 요정도 있을 것이다.
아! 요정A는 인간 혼혈이었나?
저열한 요정 유전자에 섞인 우수한 인간 혈통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음…?”
“어머…?”
“헛…!”
이젠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만두왕국과 성왕국의 악마를 몰살한 정령C의 레벨이 급격히 오르면서 스킬이 강화된 덕분이다.
악마들이 비명 지를 틈도 없이 정화해버렸다.
벌거벗긴 요정 남성들을 잔뜩 실은 마차가 전복되고, 바닥에 엎드린 요정 여성들의 등에 앉은 채 술판을 벌이던 악마들이 먼지로 변했다.
지휘관 계급의 악마들은 게거품을 물며 실신.
뒤따라온 정령B가 마무리했다.
“너무 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네.”
불공정한 편파판정의 대가인 판타지 신도 이것만은 불법으로 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 정령들은 내가 정당한 방식으로 획득한 소유물이니까.
최초의 용사에게서 비롯된 블랙박스랑 다르다.
교생 아가씨. 어떻게 생각해?
▶긍정: 저번 일도 있어서 제가 교칙을 꼼꼼히 확인해봤는데요. 강한수 생도님이 소유하신 정령들은 합법이랍니다. 장담해요! 틀리면 제가 데이트해드릴게요. 약속!
그러면 불법이란 얘기잖아!
▶황당: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죠?!
나랑 데이트하고 싶은 교생 아가씨의 마음이 느껴졌거든. 아니면 영원히 보기 싫다는 의미였나?
▶당혹: 너무 바보 같아서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완벽한 줄 알았던 강한수 생도님도 엉뚱한 면이 있네요. 아! 그래서 싫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인간미가 느껴진다는 뜻이었어요.
나도 농담으로 해본 말이야.
하여간 합법이란 거지?
▶울컥: 농담…. 네. 데이트는 꿈도 꾸지 마세요!
마법의 날처럼 신경질적으로 변한 교생 아가씨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와 잡것들은 계속 전진했다.
요정왕국 전역이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였다.
원래부터 인구가 적고 오래 사는 요정들은 나라의 구성원 대부분이 이웃이고 동료이며 친척이다.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낸 마을주민 같은 사이랄까?
그런데 날이면 날마다 알던 누군가 악마에게 살해되거나 생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웃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조용해서 좋네.”
왕궁의 정원에 착지한 나는 히쭉 웃었다.
덩치가 커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쑥떡과 화려한 성녀H, 국경에 포진한 악마들을 싹 처리한 정령들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리고 현재는 나 혼자.
여기까지 단 한 차례의 방해도 안 받았다.
싸울 줄 아는 대다수 요정은 국경으로 진즉 이동했고, 왕궁의 경비는 요정왕이 부리는 정령들이 맡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 정령들은 모두 내 편이지!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었다.
“...음?”
만족스럽게 웃으며 정원의 하수구 맨홀로 향하던 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요정이 땅에서 자란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나를 풀어다오! 인간!”
머리만 남기고 목 아래는 땅에 매장된 요정 여성.
꽤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던 걸까? 머리에 흙먼지와 이끼가 한가득 덮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요정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안녕. 잘 지냈냐? 도적E.”
가슴 뽕으로 순진한 용사님에게 사기 친 요정 도적을.
“그 괴상한 이름은 대체 뭐…. 아니, 그것보다 어서! 나올 것 같단 말이다!”
“나온다고? 뭐가?”
“그거!”
오랜만에 만난 도적E의 얼굴은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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