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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143화 (143/430)

 143화

[10회차] 용사님의 속성은요......

요정왕의 명령으로 엘브하임 왕궁을 수호하는 정령들은 내게 친화적이지만, 다른 불청객들까지 환영하는 건 아니었다.

정령들은 무단침입한 요정을 땅에 묻어버렸다. 머리까지 안 묻고 숨통을 남겨둔 건 순전히 ‘이러는 편이 더 재미있어서’일 것이다.

정령은 상당한 기분파니까.

“나오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어째서 도둑고양이처럼 왕궁에 침입했는지부터 말해. 설마, 또 혼돈의 유물인가?”

“그걸 어떻게…! 어흨?!”

“어디에 있어?”

“마, 말 시키지 마라…. 정말 한계다….”

도적E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지금까지 잘 참고 있었지만, 나를 만나면서 “이젠 살았어!”라는 헛된 희망으로 긴장이 풀려버린 모양이다.

한번 풀린 고삐는 다시 조여지지 않았다.

“묻는 말에 대답해. 그러면 꺼내줄게.”

“머, 먼저….”

“싫으면 말고.”

“이 악마…! 어흐으읔-?! 어서! 어서 질문해라!”

나는 필요한 정보를 전부 얻어낼 수 있었다.

남대륙에 있는 그녀의 본가(本家) 위치는 여전히 알아내지 못했지만, 어째서 왕궁에 침투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혼돈의 유물.

최초의 용사가 자신의 힘을 담은 추억의 물건이니 범상치 않은 건 당연하다. 그중에 보물로 분류된 것도 있을 터.

이렇게 운에 맡기면서 찾아다닐 게 아니라, 각국의 보물창고를 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아무튼,

정의로운 용사인 나는 약속대로 도적E를 땅속에서 꺼내줬다.

그녀는 허벅지를 바짝 오므린 채로 말했다.

“훔쳐보면 평생 저주할 거다…!”

“보라고 부탁해도 안 봐.”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 구석으로 후다닥 달려간 도적E는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세상을 다 가진 자 같은 얼굴로.

“죽는 줄 알았다.”

“안 도망갔네?”

도적E가 그대로 도망치듯 떠날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게 무척 의외였다.

“나 혼자서는 왕궁은커녕 정원조차 돌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은신술로는 사방에 깔린 정령들을 전부 피해갈 수 없다.”

“그래서 내게 편승하시겠다?”

“부탁한다!”

도적E가 정중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이어서 설명했다.

“악마들에게 왕궁이 함락되면 영영 유물을 수집할 수 없게 된다. 어렵기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유물이 동족이 아닌 악마들의 손에 떨어지게 놔둘 순 없다.”

“그렇구먼.”

나는 지구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뭐든 좋다.

악마랑 거래할 의사도 있다.

그렇기에 혼돈의 유물을 이용한 차원이동에도 흥미가 있다. 정상적인 졸업이 어렵다면 강제로라도 탈출할 생각이기에.

혼돈의 유물.

그 안에 깃든 선배1의 추억에는 관심 없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정보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곧바로 찾으러 가진 않았다.

내 목적은 최초의 정령을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일의 우선순위를 잊어선 안 된다.

또한,

“도적E. 따라와.”

“여기는 하수구가 아니냐?”

“묻지 말고 따라와.”

“그런데 어째서 이리 자연스럽게 나를 부르는 것이냐?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을 텐데.”

고운 이마를 찌푸린 도적E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질문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나는 답해줬다.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너의 비밀부터 이름까지 전부 알고 있지.”

“내 이름을 안단 말이냐?! 그럴 리가…. 나는 가족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내 진짜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너의 이름은…. 음? 잠시만.”

교생 아가씨. 도적E의 본명이 뭐였지?

▶황당: 이름을 정말로 모르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요. 저 요정 아가씨의 이름은 일리나. 이것도 가명이 아니라면 말이죠.

고마워!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일리나.”

“헉?!”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남편으로 약조된 몸이지. 이미 가족이란 말씀! 가슴이 변변찮은 너를 받아준 내게 감사히 여기도록.”

“나는 변변찮지 않다!”

“가짜잖아?”

“그,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스킬 날조 없이 시도해서 불안했는데, 도적E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 같았다.

그녀는 절망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나를 이렇게 배려심 없는 인간 수컷에게 시집 보내려 하셨단 말인가….”

“내가 너를 도적E라고 부르는 이유는, 나 외의 남자가 네 본명을 알면 사기를 칠 수 있기 때문이야.”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은 배려심이 넘치는 사내 같다. 거기까지 고려한 이름인 줄은 미처 몰랐다. 미안하다.”

그럭저럭 잘 넘어간 것 같았다.

도적E는 나를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휙 돌렸다.

내 예상보다 그녀는 본명에 의미를 크게 둔 것 같았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9회차의 도적E도 자기 이름을 알려주면서 생색냈었다.

이렇게 간단히 신뢰할 줄은 몰랐는데?

절대로 그럴 리 없겠지만, 11회차를 혹시라도 하게 되면 그녀의 이름을 또 이용해줘야겠다.

우리는 하수구를 쭉 이동했다.

저번에 왔었기에 미로와 함정은 쉽게 건너뛰었다.

“그….”

언제부턴가 말수가 확 줄어든 도적E가 갑자기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우물쭈물했다.

“뭔데?”

“호칭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결혼이 갑자기 눈앞에 닥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고.”

“용사님이라고 불러.”

“용사?”

“아직 말하지 않았나? 나는 용사야.”

“과연…. 수긍했다.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는 어머니께서 인간을 사위로 삼으신 이유가 있으셨구나. 그렇다면 성검도 갖고 있느냐?”

나는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했다.

“쯧쯧. 꼭 보여줘야 믿는다니깐.”

“오해했다면 미안하다. 그대가 용사라는 것을 안 믿는 게 아니다. 나는 순전히 성검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건 정말 놀랍군. 본가에 보관된 성검보다 성스러운 기운이 강한 것 같다. 그 성질도 묘하게 다르고….”

도적E가 감탄했다.

나는 넌지시 운을 띄웠다.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나?”

“그렇다. 그곳만큼 안전한 은신처는 세상에 드무니까. 하지만 어머니도 너무하시지. 딸에게 비밀로 한 채 혼사를 결정하시다니. 아차! 불만 있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그 끔찍한 인고의 시간에서 해방해준 것에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감사하면 본가의 위치나 알려주던가!

쉽게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33년 경력 용사님이 아니다.

복지가 형편없는 원시인 같은 삶을, 자연이랑 조화를 이룬다고 미화(美化)하는 요정들의 생활환경쯤은 잘 알고 있다.

“그곳은 경치가 참 좋지. 커다란 나무에 둘러싸여서 포근한 느낌도 들고.”

“음? 야자수가 크다는 건 공감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야자수(椰子樹).

남대륙은 북부와 남부의 생태계가 다르다.

북부는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매우 덥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선선해진다.

집 주위에 야자수가 있다면 북부일 확률이 높다.

불지옥 같은 환경 탓에 사람이 살지 않지 않는 땅이 많지만, 강가와 오아시스에선 그래도 농사 짓고 살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범위가 넓다.

남대륙 북부의 강가와 오아시스를 내가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닐뿐더러, 요정들이 숨어 산다면 매우 비밀스러운 위치일 확률이 높다.

“그래? 아쉽네. 벌목해서 집이라도 지었나?”

“거기까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주위에 산 하나 없는 허허벌판인데, 그나마 몇 그루 없는 나무마저 베어버리다니.”

“꼭 그렇진 않다. 모래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화룡(火龍)의 안식처가 어렴풋이 보인다.”

구체적인 고유명사가 나왔다.

화룡의 안식처.

굉장히 유감스러운 용이 사는 휴화산이다.

나이는 많은데, 정신연령은 역으로 퇴화해서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빨간색 날도마뱀이다.

인간들에게 성룡(聖龍), 신룡(神龍), 현룡(賢龍), 선룡(善龍) 같은 긍정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용들이 대체로 그렇다.

어린아이에게 핵미사일 스위치를 맡겨둔 것처럼 불안하다.

내가 괜히 악룡과 마룡을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니다.

“변기처럼 생긴 별자리가 참 아름다웠는데.”

“변기?”

“의자를 말하는 거야.”

“아! 나도 그 별자리를 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계속 범위를 좁혀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을 때,

“다 왔군.”

드르륵-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정도 아닌 인간이 여기는 어떻게…?”

엘브하임 왕국이 시작될 때부터 살아온 요정B가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며 내게 질문했다.

능력치는 8회차 때랑 같았다.

▷종족: 그랜드 엘프

▷레벨: 999+

▷직업: 수호자(수호→피해↓)

▷스킬: 정령Z 축복MAX 최면MAX 휴식MAX 민첩SS…

▷상태: 수호, 해동

그리고 최면술을 걸려는 것도 그대로였다.

나는 정신방어 스킬을 현재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종족특성이 MAX등급의 최면술을 저지했다.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돕는다고 할까?

8회차 때는 내 키스가 너무 강렬해서 요정B가 버티질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적당히 하기로 했다.

“우읍-?!”

“씁!”

나는 그녀의 타액과 경험치를 쭉 빨아들였다.

허리에 감긴 용사님의 강인한 팔뚝에서 빠져나가려고 앙탈을 부리던 요정B였지만, 왕족의 상징인 긴 귀를 부드럽게 만져주자마자 자지러지듯 등을 활처럼 폈다.

그 뒤로는 어려울 게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음양의 이치를 외면해온 요정B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것처럼 격렬하게 타올랐다.

장작에 휘발유는 충분히 묻어있었다.

태워줄 불씨가 없었을 뿐!

위대한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의 아내란 이름값 때문에 욕망을 꾹 참아왔던 그녀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매달렸다.

그 결과,

나: 1레벨→1545레벨

요정B: 999레벨→1레벨

온몸을 불사른 요정B가 내 품에서 축 늘어졌다.

하지만 물먹은 솜처럼 흠뻑 젖은 그녀의 눈빛만은 여전히 지치지 않았다. 더욱 깊은 것을 갈망하는 분위기.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도적E. 데리고 있어.”

나는 완벽하게 무력화된 요정B를 도적E에게 넘겨줬다.

알몸을 피어싱과 장신구로 치장한 파격적인 패션을 한 요정B를 잡아든 도적E가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사님은 숨겨둔 아내가 도대체 몇 명인가?”

“어허! 숨겨둔 아내라니! 어머니가 아시면 테니스라켓으로 내 머리를 후려칠 소리를 하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어. 나는 경험치만 먹으려고 했는데, 이 음탕한 요정이 먼저 달려든 거라구?”

“예민한 귀를 만진 건?”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 대신에 붙잡을 걸 찾다가 우연히 만져졌을 뿐이야.”

“경추?”

“무식하긴. 목뼈를 말하는 거야.”

8회차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흠…. 알겠다.”

남편의 외박을 의심하는 아내처럼 예리한 눈초리가 된 도적E는 일단은 수긍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11회차를 하게 된다면, 그녀의 남편 대신 삼촌으로 포지션을 바꿔야 할 것 같다.

11회차는 절대로 안 갈 거지만!

살려둔 요정B에게 정보를 얻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나는 제단에 묶여있는 존재에게 걸어갔다.

최초의 정령.

팔다리에 악마의 사슬이 박힌 여성형 정령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며 한마디 했다.

“참 빨리도 오는구나.”

“내가 누군지 기억해?”

“당연하지. 강한수. 하지만 이전에는 그래도 자연의 은총을 받은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정령이 됐네?”

“호오?”

회귀를 거듭해도 최초의 정령은 기억하는 듯했다.

“세계가 분할되더라도 최초는 하나뿐이니까. 최초가 둘이면 더는 최초가 아니게 되지. 그렇기에 나는 하나다.”

“마왕은 기억을 못 하던데?”

“그쪽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별것도 아닌 용사에게 패배한 기억을 간직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구나!

그다지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최초의 정령. 내가 정령이 됐다는 걸 안다면, 어떤 속성인지도 알겠지?”

“먼저 풀어줘.”

“먼저 말해.”

“안 풀어주면 말하지 않겠어.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그런 짓을 해도 말하지 않을 거야. 늦게 온 벌칙이다.”

“...쩝. 좋아.”

나는 최초의 정령을 속박하고 있던 악마의 사슬을 끊었다.

자유를 얻은 그녀가 약속대로 알려줬다.

“정령으로 환생한 용사. 너의 속성은 인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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