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10회차] 자기소개만 한 세월
속성이 인간이라고?
나는 원래 인간이었던 정령이다. 그런데 내 속성이 인간이면, 정령으로 환생해서 바뀐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힘들게 올린 초월영역 스킬로 사기를 당하다니!
“망할 판타지.”
순진무구한 용사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이 원한은 100배로 갚아주리라!
내 불만을 들은 최초의 정령이 지정석처럼 자연스럽게 내 머리 위에 엉덩이 깔고 앉으며 말했다.
“제대로 이해해야지. 한 가지 속성에 특화된다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불의 정령은 불의 속성에 특화되어 불에 관해선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그 성질까지도. 감정에 충실하고 쉽게 뜨거워지지. 이걸 인간들은 열혈(熱血)이라고 하던가?”
“...음?”
“너는 정령이면서도 인간의 종족특성이 평범한 인간보다 특출나고 지배력 혹은 영향력도 강할 거야. 단순히 인간처럼 생긴 정령이 아니라고. 나참! 최초의 정령 앞에서 정령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인간의 종족특성이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이었지.
“다양성은 인간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야. 너무 다양해서 바보부터 천재까지 골고루 태어나니까. 그리고 너의 속성은 인간에게 강한 지배력을 발휘할 거야. 하지만 정말 특이해. 속성이 인간이라니. 차라리 시공간이라면 이해할 텐데.”
“그러게 말이다.”
시간과 공간을 지배한다!
대충 과학적으로 예측해보면 사기성이 매우 짙다.
무엇보다도, 수세식 변기가 없는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
“속성은 존재의 정체성을 반영해. 네가 그만큼 인간적이란 뜻이야.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유별나다고 할까.”
“나는 지극히 평균적인 인간인데.”
“...그건 네 생각이고.”
무력화한 요정B에게 얻어낼 정보는 없었다.
홀몸이라서 외로운 여자였다.
“동족을 싫어하고 큰 가슴만 밝히는 그딴 바보는 없어져도 문제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재혼하려고 보니, 엘브하임 이상 가는 남자가 동족 중에 없었습니다. 그는 취향이 글러 먹긴 했어도 능력만은 나무랄 게 없었으니까요.”
아는 정보를 뱉어내라고 했더니 넋두리를 했다.
요정B가 남편을 내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기나긴 시간을 살아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듣고 있던 도적E가 전율하며 말했다.
“당신이 조상님의 둘째 부인이란 거냐? 우리를 추방한 배신자 무리의 우두머리.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좀 더 악랄한 여자의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요정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언니의 후손이여. 당신의 날카로운 분위기는 장남을 쏙 빼닮았군요.”
“으으···.”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도적E는 모질게 말하질 못했다.
남의 가정사에는 관심 없는 나는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하고는 하수구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용사님. 이쪽에 지름길이 있습니다.”
요정B가 나가는 비밀통로가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장소는 최초의 정령을 가두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동족들이 계속 정령의 가호를 받을 수 있도록. 정령의 도움이 없으면, 저희는 그저 오래 살 뿐인 인간의 가축으로 다시 전락할 테니까요.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쓸모없게 됐으니···.”
최초의 정령이 내 머리 위에 권태롭게 누운 채 답했다.
“동정을 구걸하는 거라면 사양이야. 실레시아. 앞으로 내 충실한 노예가 되겠다면 약간의 자비는 베풀 의향이 있지만.”
“주인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요정B의 결단은 매우 빨랐다.
노예가 되라는 요구를 망설임 없이 수락한다. 그것만 보면 동족을 사랑한다는 건 틀림없었다.
그 방식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요정B는 우리를 그녀의 침실로 안내했다.
영원히 사는 요정 왕족이더라도 이슬만 먹진 않는다. 먹고 싸고 자는 행위는 꼭 필요하다.
그녀의 침실은 꽤 호화로웠다.
오래돼서 낡긴 했어도 기품이 넘치는 가구와 장식이 많았다.
“오! 슬라임식 변기네.”
“여기는 밀폐된 장소라서 배설물 처리가 힘드니까요. 오래된 구식 모델이긴 하지만, 변기 안의 슬라임은 제 주치의나 다름없습니다. 고질적인 스트레스성 변비를 쉽게 해결해주거든요.”
나는 다 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임이 쾌변을 유도하기 위해 괄약근을 자극한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슬라임식 변기에 아무 슬라임이나 잡아다가 쓰지 않는다.
스킬 ‘안마’를 보유한 전문 슬라임만 채용한다.
그렇기에 굉장히 비싸다.
“저건?”
“...혼자 사는 여자의 필수품입니다. 유니콘의 뿔로 만들었기에 위생적으로도 안전합니다. 아! 그쪽 아가씨에게는 너무 이르려나요? 좋은 남자를 빨리 만나세요. 아니면 저처럼 스스로 위로하며 자괴감에 빠지게 될 테니까요.”
요정B는 밖의 사정을 꽤 잘 알았다.
왕국이 악마들의 침공으로 멸망의 길로 향하는 중이며, 요정왕이 아내를 악마에게 빼앗기고, 용사가 마왕에게 패배해서 파티가 전멸한 일까지 전부.
큼직한 사건들은 전부 아는 듯했다.
“하긴. 이슬만 먹으며 살 순 없지.”
“그렇습니다, 용사님.”
요정B의 침실을 대충 구경한 우리는, 지상이랑 이어진 침실의 비밀계단을 통해서 밖으로 나왔다.
돌에 붙은 이끼만 먹으며 살 순 없었던 그녀는 식량만은 주기적으로 밖에서 구해왔다.
아무도 모르게.
이 비밀통로가 여태까지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요정들이 출입을 꺼리는 도축장이랑 이어진 탓이었다.
요정은 육식(肉食)을 거의 하지 않으니까.
실비아처럼 난폭한 요정 빼고.
그리고 도축장 냉동고쯤 되면, 정말로 아무도 찾질 않는다.
정령조차도.
“그래서 아이들이 나를 찾지 못했던 거구나.”
최초의 정령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어느 속성의 정령도 동물을 해부한 고기와 뼈를 꽁꽁 얼려서 쌓아둔 이런 장소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정이 육식을 안 하는 편이지만, 못 하는 건 아니다.
마음의 정령이 싫어해서 육식을 절제하던 문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정착되면서 거의 안 하게 된 것뿐.
고기 맛을 알게 되면 또 잘 먹는다.
실비아처럼.
“고대의 동족들은 고기와 생선을 잘 먹었습니다. 유목 생활하던 시절에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곤충이든 벌레든 닥치는 대로 먹었죠. 이렇게 고기를 쌓아두고 안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요정들이 여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도 엘브하임의 업적이죠···.”
요정B는 틈만 나면 남편 자랑을 했다.
▶슬픔: 남편분이 잘못했네요. 이런 아내를 취향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사랑을 덜 주더니. 저는 그녀의 방에서 유제품을 많이 봤어요! 남편이 원하는 몸매가 되려고 노력한 게 틀림없어요.
교생 아가씨. 세상에는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게 있는 법이야.
그리고 취향은 존중해줘야 한다.
“도축장 주인은 네 정체를 알아?”
“제가 여기 주인입니다.”
“고귀한 분께서?”
요정B가 쓴웃음을 지었다.
“후대들은 저희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지만, 저는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살아있는 바퀴벌레도 곧잘 먹었습니다.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뼈와 내장을 발라내는 건 일도 아니죠. 대신 맡길 사람은 없고, 일을 놔버리면, 왕국의 가죽 공급이 끊기고 생계에도 차질이 생겨서 지금까지 제가 해왔습니다.”
그녀의 능력치를 꼼꼼히 살펴보니 스킬에 ‘도축S’가 있었다.
오랫동안 이 작업에 종사해왔다는 방증.
“요정치고 부지런하고 생활력도 있네.”
“부정하고 싶지만, 요즘 아이들이 게으르고 낙천적이란 점에는 공감합니다. 마왕에게 아내를 빼앗겼다면서 내게 푸념하러 온 요정왕을 보았을 때는···.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습니다.”
도축장은 왕궁 옆에 있었다.
고상한 척하는 요정들이 꺼려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지만, 마음의 정령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도축 작업은 정령이 드문 도시에서 해야 해서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생산된 고급 가죽과 뼈는 시장에 팔리고, 고기는 요정B의 뱃속이나 고기 맛을 아는 극소수 단골손님들에게 판매된다.
그러다가 상할 것 같으면 사육사에게 넘긴다.
“흠···. 쑥떡도 좀 먹여야 하는데.”
우량아인 건 틀림없지만,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했다. 고기를 먹고 더욱 커져서 나쁠 건 없다.
요정B가 말하길,
고급 사냥감만 취급하는데도 왕국 전역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공급은 많고 수요가 늘 부족하다.
그래서 양질의 고기를 매번 사료로 쓴다고 한다.
이건 너무 아깝잖은가?
“말 나온 김에 아예 바베큐파티나 할까?”
내가 부양 중인 잡것들이 좀 많았다.
어느 시점부터 돌을 먹어도 생활에 지장 없는 몸이 된 나는 상관없지만, 나머지도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먹는다는 행위는 꼭 배를 채우기 위함만이 아니다.
혀를 즐겁게 하기도 한다.
나는 정령A부터 차례대로 소환했다.
최초의 정령과 요정B는 오래 산 존재답게 그를 단번에 알아봤다.
“오! 오줌싸개.”
“암흑의 왕자 보리스···!”
부르는 호칭은 상반됐지만, 둘은 정령A에게 아는 척했다.
정령A도 눈살을 찌푸리며 인사했다.
“프로네시스 님. 도대체 언제까지 옛날 일로 저를 놀리실 겁니까? 저도 이제 어른입니다. 그리고 실레시아 아주머니. 엘브하임 아저씨를 배신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다음은 정령B였다.
성검 뉴클리온의 전 주인이자 요정 용사였던 그도 꽤 오래 산 존재였다. 그러니 종족에 ‘올드’가 붙은 거겠지만.
“오! 코흘리개.”
“검성(劍星) 실레리온···. 오라버니···.”
검술이 초월영역 ZZ등급에 도달한 친구답게 별호가 거창했다. 최초의 정령이 부르는 호칭은 여전히 유감스러웠지만.
정령B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로네시스 님. 그분께서 언젠가 또 함께하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언젠가? 안 본 사이에 최초 녀석의 농담이 늘었네. 구할 생각도 없으면서.”
최초의 정령이 냉랭한 어조로 반응했다.
하지만 정령B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그 옆을 돌아봤다.
“실레시아. 동족의 수치. 어리석은 동생이여.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의 네 꼴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구나. 이 이상 비참해질 수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오라버니···!”
“엘브하임에게 용서받기 전에는 나를 오라비라고 부르지 마라.”
“하지만 그는 이미···.”
“분명히 살아있다. 그렇게 쉽사리 죽을 남자가 아니다. 바퀴벌레의 신(神)이 도와주는 것 같은 친구니까.”
정령B는 지레짐작할 뿐이지만, 그의 말대로 잘 살아있다.
용사 페스티벌이 열리는 세계에서.
다음은 정령C다.
“코흘리개 짝꿍. 너도 정령으로 환생했구나?”
“언니.”
정령C는 생전에 정령B의 아름다운 아내이자 든든한 동료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프로네시스 님. 현재는 실레리온이랑 남남이랍니다. 저희의 관계는 제가 육체를 잃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골렘이 되면서 끝났어요. 지금은 새 육체로 새 인생을 즐길 예정이랍니다.”
“오! 줄을 잘 섰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후후!”
한 차례 간드러지게 웃은 정령C는 요정B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힘내. 실레시아. 저런 꽉 막힌 남자의 잔소리는 한 귀로 흘려들어. 오랜만에 만난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케케묵은 옛날 일로 날을 세워서 어쩌자는 거야? 진짜 나잇값을 못 한다니깐!”
“언니···.”
“너는 언니란 말밖에 못 하니?”
“아, 아니요. 고맙습니다.”
마지막은 정령D였다.
하지만 능력이 우수하다고 나이도 많은 건 아니다.
“최초의 정령이자 그분의 조언자이셨던 프로네시스 님, 그분의 동료이셨던 3대 요정왕의 후실이신 실레시아 님을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소녀의 이름은 시리엘. 천사장 비루엘의 딸입니다.”
“아! 그 근육의 딸이었구나?”
“반가워요. 시리엘 양.”
이쪽은 딱히 친분이나 인연이 없어서 싱겁게 끝났다.
자기소개를 대충 정리하자면...
정령A: 보리스, 늙은 왕자
정령B: 실레리온, 요정 용사
정령C: 실레리온 마누라, 퇴마사
정령D: 시리엘, 천사 성기사
딱히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인적사항은 필요할 때마다 교생 아가씨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끝으로 성녀H와 쑥떡을 소환했다.
“히프리아입니다.”
“어, 그래.”
“반가워요. 히프리아 양.”
서로가 굉장히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금방 또 소환되어 기분 좋은 녹색 머리카락의 소년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해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쑥떡이라고 해요!”
누가 인사하든 전반적으로 시큰둥했던 최초의 정령이 등의 날개를 팔랑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어머! 아주 귀여운 꼬마용이네. 누구의 혈통이니?”
요정B의 눈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참으로 답답했다.
커서 세상을 공포로 떨게 할 위대한 용이 되어야 할 녀석이 귀엽다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장래가 심히 걱정됐다.
“제 아버지세요!”
쑥떡이 자랑스럽게 나를 가리켰다.
아직 아들로 인정하지 않-
“맙소사! 내가 갇힌 사이에 유전법칙이 바뀌었나···!”
최초의 정령이 실례되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어때서? 나도 어릴 적에는 귀여웠다구?”
판타지아 북대륙의 만백성이 동의한 사항이다. 아니라고 박박 우기던 인간들도 내 미소에 홀딱 넘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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