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10회차] 문화재가 다 그렇지!
바베큐파티가 열리고 잡것들이 시끌벅적 이야기꽃을 피우며 친분을 다지길 1시간. 이 정도면 참 오랫동안 쉬었다고 판단한 나는 몽땅 해산시켰다.
파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가당찮은 항의가 있었지만, 용사 일행이 실컷 놀면 판타지 세상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지구로 하루 속히 귀환하려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33년.
너무 오래 있었다.
“도적E. 혼돈의 유물이 어디에 있다고?”
“이쪽이다.”
우리는 경비 한 명 없는 왕궁을 산책하듯 횡단했다.
지구의 방범 시스템도 감시카메라를 맹신했다가 크게 낭패를 본 사례가 적지 않다.
요정왕도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다.
경비를 정령에게 의존한 왕궁은 내게 장애가 못 됐다. 하물며 모든 정령의 우두머리 격인 최초의 정령이 나서면 무료로 금고를 활짝 열어둔 거나 다름없는 셈.
어디 그뿐일까.
순진한 척하던 정령들이 본격적으로 약탈을 시작했다.
경비원에서 무장강도로 탈바꿈!
정령은 요정과 인간이 값어치 있다고 결정한 예술품과 금속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최초의 정령이 내린 지시에 따라 ‘재미있을 것 같아서’ 닥치는 대로 훔쳤다.
“엄청나네.”
그 광경을 본 나는 헛웃음만 나왔다.
일반적인 약탈자라면 값비싼 것부터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뭐가 귀한지 모르는 정령들은 눈에 띄는 건 뭐든지 주워갔다.
팔아서 부자가 되겠다는 뚜렷한 목적도 없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단지 그뿐이다.
“어엌?! 짐의 신발을 누가- 아닛?! 바지도 없어?!”
정령들은 혼란에 휩싸인 요정왕을 보면서 깔깔 웃었다.
동족들이 전쟁으로 죽어나는데도 잠이 오는 요정왕은 사라진 물건들을 찾는다고 돌아다녔다.
물론, 직접 찾아다니진 않았다.
정령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헉?! 정령 친화력이 왜 이렇게 떨어졌지?!”
최초의 정령이 풀려난 이상, 모든 정령은 그녀의 영향을 어떤 식으로든 받는다.
최초의 정령 속성이 ‘정령’이기 때문이다.
요정왕의 이전 친화력이 얼마나 대단했든 무관하다. 최초의 정령이 탐탁지 않게 여기면 그걸로 끝.
확고한 우정도 적대적으로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다.
혼돈의 유물이 있는 장소까지 앞장서서 안내하는 도적E를 뒤따라가던 나는 최초의 정령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줌마. 내 몸에 들러붙은 정령들도 떼어낼 수 있어?”
“나는 아줌마가 아니야! 이름으로 불러.”
“이름?”
“바베큐파티 내내 불렸는데 기억을….”
“아줌마.”
“...특별히 봐주마. 흥! 명령해서 떼어낼 순 있지만,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으냐. 돈과 계급의 노예가 된 직장인에게 술과 담배를 끊으라고 강요하는 거랑 같다.”
“과연….”
예전에도 내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했었다.
그건 정령이 된 현재도 유효한 모양. 하지만 정의로운 용사님이 마약으로 분류될 줄은 몰랐다.
우리의 뒤편에서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요정B는 말이 없었다.
왕궁을 놀이터처럼 뛰노는 정령들이 값비싼 도자기나 그림 등을 망가트릴 때마다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긴 했지만, 노예가 되라는 요구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여기에 있다.”
도적E의 안내를 받은 나와 잡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보물창고였다.
이곳만은 물리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라서 정령들도 마음대로 침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걱!
그렇게 단단한 보물창고의 철문도 성검 뉴클리온의 칼날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쿵!
두꺼운 철문이 썰리면서 떨어지고, 보물창고 안이 드러났다.
어두컴컴할 거란 예상이랑 다르게 내부는 에메랄드빛 발광석(發光石)으로 제법 환했다.
나는 가지런히 진열된 보물들을 쭉 훑어봤다.
하지만 어떤 것이 혼돈의 유물인지는 여전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적E에게 질문했다.
“어떤 물건이지?”
오랫동안 땅에 묻혀서 굶주린 탓에 고기도 군말 없이 먹고 때깔이 고와진 도적E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일반인이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보물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혼돈의 유물을 향해.
“이거다.”
그리고 무지갯빛 액체가 든 유리병을 집었다.
“요정왕의 눈물이잖아?”
요정왕국의 3대 비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요정 왕족이 태어나는 순간에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진귀한 영약이다.
모든 병과 상처를 고치고, 젊음과 긴 수명을 약속한다.
하지만 고작 1병뿐.
요정 왕족의 숫자가 많으면 좀 넉넉히 보관해뒀겠지만, 출산율보다 사망률이 높은 게 현실이다.
아직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
요정B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역사적으로 동족이 아닌 인간 용사랑 결혼한 왕자와 공주가 은근히 많았던 탓입니다. 혼혈의 태반(胎盤)은 영약의 재료로 쓸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무슨 수를 써도 순수한 요정이 될 수 없습니다. 오래 사는 인간일 뿐.”
그렇기에 요정 왕족은 늘 인원이 부족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왕족과 일반요정 사이에서 절반의 확률로 왕족이 태어난다는 점이랄까.
아무튼,
“그게 혼돈의 유물이라고?”
“안에 든 영약이 아닌 병이 유물이다.”
“줘봐.”
“마시진 마라. 용사님은 너무 뛰어나서 복용해도 효과가 거의 없을 듯하니.”
“안 마셔.”
내 용무는 혼돈의 유물에 깃든 선배1의 기억이었으니까.
*
이번에도 주연배우는 최초의 용사. 하지만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미녀 조연은 한 명도 없었다.
대신, 왕관 쓴 난쟁이가 등장했다.
화려한 복장만 보더라도 “나는 난쟁이들의 왕이오!”라고 자기소개하는 듯한 난쟁이였다.
“가출해야겠어.”
그런 난쟁이왕에게 선배 용사님은 굉장히 유감스러운 이야기를 아주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에 대답은?
“허허! 용사가 할 말은 아니로구먼!”
난쟁이왕도 내 감상에 동의하는 모양이다.
“최초이기에 불멸인 마왕 페도나르는 완벽하게 봉인됐고, 이 세상은 큰 문제 없이 쭉 평화로웠어.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에 강한 힘을 가진 용사님은 필요가 없어.”
“친구. 지금은 용사가 아닌 남편이자 아비이지 않은가?”
“......”
“친구…? 자네, 괜찮은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는 용사님 때문에 난쟁이왕이 당황했다. 예술과 술을 사랑하는 난쟁이들이 조잡한 예술품을 봤을 때의 표정이랑 비슷했다.
못 볼 꼴을 봤다고 할까.
“나는 지쳤어.”
“딱 봐도 그런 것 같구먼.”
“가족들이 나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 내가 움직이면 어떤 식으로든 나쁜 결과가 나와버려. 아내A를 만나면 아내B와 아내C가 따져. 그래서 골고루 만나면 이젠 순서로 따져. 그 항의를 받아들여서 분신술도 써봤는데,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했어. 아이들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내게 불만이 아주 많은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하렘을 꾸린 남자는 혼자 살고 싶어 했다.
다 가진 자의 배부른 투정인가?
“흠. 쌓인 게 많다는 건 알겠네.”
“혼자 자는 날이 행복해.”
“허허! 함께 모험할 때만 해도 여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친구가 참 많이도 변했구먼.”
“그때는 나도 새파란 애송이였으니깐.”
“가출하고 싶다는 친구도 어른으로 보이진 않는데….”
난쟁이왕은 자기가 앉아있는 의자팔걸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상담할 상대를 잘못 고른 거 아닌가? 친구,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난쟁이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다른 종족의 여성에게 환심을 사고 구애하고자 끊임없이 예술 활동을 하지. 그래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일세. 하렘? 우리는 난쟁이를 낳아주는 아내에게 이혼이나 안 당하면 감사히 여긴다네. 간단히 말해, 복에 겨워서 감당을 못한다고 내게 자랑하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구먼.”
“그런가….”
“이해했으면 술이나 한잔하세. 나는 자네처럼 대단하지 못해서 이미 수명이 간당간당하거든. 젊었을 적에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최초의 미녀 마음을 사로잡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은 좋은 술을 마시며 생을 마감하는 게 목표라네. 아! 물론, 더 오래오래 사는 방법은 찾아보면 꽤 돼. 하지만 예술품은 예술가가 죽어서 희소성이 생겨야 가치가 더욱 오르는 법. 나는 내 자식 같은 예술품들이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았으면 하네.”
“자식을 위해 죽겠다는 거야?”
“껄껄! 그게 부모의 마음이란 걸세.”
최초의 용사는 난쟁이왕의 이야기를 곱씹듯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뒤늦게 입술을 다시 열었다.
“사실, 상담하려고 자네를 만난 건 아니야.”
“가출은 확정인 모양이구먼.”
“그래.”
“그렇다면 무언가 필요해서 찾아왔다는 거군. 아내들에게 줄 작별선물이라도 필요한 건가? 흠. 미안하네만, 현재 아내가 몇 명이지?”
“아내들에게 줄 선물은 아니야.”
“그러면?”
나는 최초의 용사가 무엇을 말할지 대충 예상이 됐다. 그것을 통해서 이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니까.
“약병이 필요해.”
“예쁜 꽃병도 아니고 약병…?”
“내게는 불치병에 걸린 딸이 있어. 내 팔에 봉인해둔 5대 재앙의 저주 일부가 옮겨간 탓이야. 그래서 주기적으로 안정제를 먹거나 내가 정화해줘야 하는데, 내가 사라지면 앞으로 약에만 의존해야 해. 그런데 이 약의 유통기한이 대단히 짧아.”
“무슨 말인지 알겠네.”
“가능할까?”
“허!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난쟁이의 왕이야. 최초의 마왕을 쓰러트릴 무기를 만들어달라는 허무맹랑한 억지도 해결한 몸이라고. 약병쯤은 장난이지! 그리고 말이야. 애초에 만들어둔 게 있네.”
난쟁이왕이 호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것이었다.
“이건가?”
“맞아. 외견이 약병치고는 굉장히 호화롭지? 원래는 꽃병으로 만들었네. 꽃병에 고인 물을 주기적으로 갈아주지 않으면 꽃의 뿌리가 썩잖는가? 하지만 물 갈아주기 귀찮아서 말이야. 그래서 야심 차게 만든 거였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네. 이런 햇빛 안 드는 지하에서 무슨 꽃을 키워? 껄껄!”
“이 안에 담은 액체는 안 썩는다는 거지?”
“맞아. 겉보기랑 다르게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어려워서 병을 크게 만들진 못했지만, 여기에 보관하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썩거나 변질하지 않는다네. 현재는 내 휴대용 술병으로 쓰고 있지. 이거면 되나?”
“충분히.”
*
진실은 잔인하다고 했던가?
어느 난쟁이가 심심풀이로 만든 꽃병이 요정왕국 3대 비보(祕寶)가 됐다.
그렇다고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매연으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고향별 지구에서도, 국보(國寶)로 취급하는 문화재 중에 용도가 정말 시원찮은 게 많았으니까.
그리고 꽃병으로 쓰기엔 기능이 너무 좋았다.
뭘 넣어둬도 변질하지 않는다니?
진공포장보다 우수했다.
“도적E. 현재까지 혼돈의 유물을 얼마나 모았지?”
“이것까지 5개째다.”
“너무 적잖아! 가문에서 원래 3개를 보관하고 있었으니 네가 2개를 찾았다는 이야기인데, 그동안 뭐 했냐?”
“어머니는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딸의 약혼자에게 중대한 가문의 정보까지 발설하셨단 말인가….”
네가 해줬거든?
도적E는 브로치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혼돈의 유물로 ‘황녀의 가터벨트’가 있다. 이것까지 합치면 6개.
차원이동에는 총 9개의 유물이 필요하다.
앞으로 3개를 더 수집해야 하는 셈.
“유물 중에서 위치라도 아는 건?”
“북대륙 어느 왕국의 후작 부인이 가지고 있다. 가문의 이름은 소시리스. 후작이었던 남편이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요절하는 바람에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대귀족이다. 멀리서 확인한 탓에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가 항상 소지하고 있는 건 틀림없다.”
소시리스?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정답: 마왕의 딸이 사용하는 가명과 신분이에요.
고마워! 교생 아가씨!
그 비겁한 악마의 가명이 소시지였군.
“하지만 그래도 7개네. 2개가 부족해. 흠….”
좀 더 찾으러 돌아다녀 볼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용사 루크가 마왕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해서 평판이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녀석이 실패해준 덕분에 나는 악마에게 빼앗긴 인간 영토를 수복한다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걸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했던가?
졸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졸업할 수 있는데 굳이 편법을 알아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진 않았다.
내 머리 위에서 권태롭게 누워있던 최초의 정령이 말했다.
“마왕에게 가려고?”
“그래. 이제 막 풀려난 너에게는 유감이겠지만.”
“괜찮아. 방법이 생겼거든.”
“방법?”
“다음에 만나면 가르쳐주지. 후후!”
최초의 정령이 요정B를 보면서 웃었다.
바베큐파티 때, 둘만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내 관심사 밖이었다. 내 속성이 ‘인간’이란 걸 알았기에 이젠 최초의 정령에게 용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자, 가볼까.”
6년 동안 중앙대륙과 북대륙에서 동료와 성검을 모은다고 수고한 루크에게는 미안하지만, 33년 동안 판타지아 대륙에 갇혀있었던 나는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인간 정령들을 소환했다.
“이젠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조차 안 부르는 거냐?!”
정령들의 대표로 나선 정령A가 너무나 하찮고 사소한 문제로 내게 항의했다.
나는 무시하고 말했다.
“정령들. 마왕의 성까지 진격이다.”
다른 용사가 망쳐놓은 중앙대륙을 구원했다.
이토록 훌륭한 용사님이 졸업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불법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다. 교생 아가씨가 확인한 사항이다. 틀리면 데이트해주기로 약속했다.
▶난감: 그, 그런 건 똑똑히 기억하시네요….
내가 졸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편협하고 옹졸한 판타지 신도 이번만큼은 막지 못하리라.
“때가 됐다.”
지구로 돌아갈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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