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회차] 기숙사 No.1
최초의 용사.
아들인 늙은 왕자를 포함한 정령들에게 대충 들어서 파악한 선배1의 전투력은, 손가락만 튕겨도 엔간한 행성은 순식간에 먼지처럼 파괴되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였을 때의 이야기.
상식적으로 따져봤을 때,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시절의 선배1이 이곳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클론’이란 의미.
복제 인간이란 얼토당토않은 설정이 기가 막혔지만, 판타지 신에게 대적 중인 은하계의 지배자가 코흘리개 후배들의 교육용 교보재로 출장 중이란 건 더욱 말이 안 됐다.
“진짜보다 얼마나 약해?”
“똑같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최초의 용사를 그대로 재현해냈다면 이곳은 진즉에 파괴됐을 거야. 그리고 전성기란 표현도 틀렸어. 은하계를 지배 중인 그 선배는 지금도 계속 강해지고 있으니까. 엘리자. 사실대로 말해.”
“엘리스입니다.”
“이름으로 말 돌리지 마.”
“실례했습니다. S급으로 열람 가능한 정보가 아니기에 정확한 수치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중등교육과정 학생회장이랑 비등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애매하네.”
그 학생회장이란 놈의 전투력을 내가 어떻게 알아?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다음은?”
“이 이름표를 왼쪽 가슴에 항상 달아주세요. 옷의 재질에 상관없이 자석처럼 잘 달라붙습니다.”
하녀 엘리스가 자동차 번호판 같은 걸 내밀었다.
[2300001호-S]
손가락 크기의 연한 무지개색 직사각형 판에 숫자와 알파벳이 양각되어 있었다. 맨 뒤에 표시된 ‘S’는 내 급수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앞에 숫자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엘리스가 말했다.
“23차 교육과정 1번째 수험생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용사로 교육받기 시작한 순서에 지나지 않기에 성적과 평가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안 달면?”
“이것도 선택입니다. 하지만 달지 않은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면 부활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생활하시는 동안 신용카드 겸 신분증 역할을 해주고, 감시카메라 기능도 있기에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흐음~”
이래저래 꼭 달아야 하는 모양이다.
“좋게 생각하세요. 이번 페스티벌 참가자 중에서 S급은 강한수 졸업생님이 유일하시니까요. 장구류는 자유입니다. 판타지아든 지구든 마음에 드는 장비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스티벌 대륙에서 돈 주고 구하시는 편이 훨씬 품질이 좋다고 장담합니다.”
“그건 알아서 하지. 다음은?”
“초등교육원 내부시설을 안내해드릴게요.”
“이 나이에 초등학생인가….”
*
내가 있는 곳은 초등교육원 남성기숙사였다. 하지만 남자만 바글바글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남성기숙사 곳곳에 배치된 하녀들이 칙칙한 수컷의 악취를 중화해주기 때문이다.
그 예로, 1층에는 아리따운 여인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이발소, 공중목욕탕, 편의점, 양호실, 도서관, 카페가 있다.
하지만 마냥 좋은 곳은 아니었다.
지하 2층에는 8명이 함께 생활하는 비좁은 공동숙소가 있고, 지하 1층은 4명이 생활한다.
지하이기에 당연히 창문은 기대할 수 없고, 화장실과 세면실도 공용으로 사용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청소는 하녀가 해준다.
할머니들이긴 하지만.
거기에 비교하면 지상은 낙원이다.
2명이 함께 쓰는 2층 숙소에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방마다 배치되어 있다.
3층은 혼자서 사용하는 개인실로 바뀌며 책상과 책꽂이가 추가되고, 그 방만 전담하는 하녀가 배정된다.
그리고 내가 있는 4층.
숙소에 부엌과 거실, 하녀의 방이 추가되면서 면적도 넓다.
하녀의 수준도 1층과 2층은 B급, 3층은 A급. 그리고 4층은 페스티벌 대륙을 통틀어서 몇 명 없는 S급이라고 한다.
즉, 자기 자랑이었다.
“꼭대기 5층은?”
“인어가 헤엄치는 개인수영장과 요정이 관리하는 공중정원이 추가됩니다. 현재는 전부 빈방입니다.”
“멋진데?”
“S급 하녀인 저도 원래는 5층만 담당합니다. 하지만 일거리가 없어서 4층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4층 이용자도 현재까진 강한수 졸업생님이 유일하고요.”
여성기숙사는 정반대라고 보면 된다.
아리따운 하녀 대신 잘생긴 꽃미남 하인들이 일한다.
“저 밖의 텐트들은?”
남성기숙사와 여성기숙사 사이의 공터에 조잡한 텐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F급 이하의 졸업생들이 남녀 구분 없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야영장입니다. 무료배식 외에는 어떤 지원도 하지 않으며, 특별한 용무가 아니면 기숙사 건물로 들어오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과연….”
노골적인 차별대우였다.
“현재는 졸업생들이 각자 점수를 따기 위해 기숙사 밖으로 나간 상태라서 한산한 편입니다. 졸업생의 급수는 월말마다 갱신되며, 순위보상은 페스티벌이 끝나는 시점의 순위로 결정됩니다. 강한수 졸업생님. 달리 질문 있으신지요?”
“아니.”
나도 기숙사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
점수를 얻는 방법은 다채롭다.
사냥, 수련, 봉사, 채집, 업적, 대련….
졸업생의 행동 하나하나가 점수로 반영된다.
그래도 가장 점수가 후한 행동이 사냥이란 건 불변의 진리였다. 용사의 존재의의는 악(惡)을 처단하는 거니까.
“머리 둘 달린 돌연변이 오우거를 사냥하러 가실 치유사님을 모십니다! 당신만 오면 바로 출발!”
“처녀만 납치한다는 엽기적인 악마를 토벌할 B급 이상의 동료를 모집합니다! 선착순 2명!”
“하수구에 서식하는 타락한 슬라임을 함께 처치할 F급 동료를 구합니다. 성공하면 E급으로 오를 수 있어요! 차갑고 딱딱한 바닥이랑 이젠 안녕!”
기숙사 앞에선 동료모집으로 열을 내는 남녀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혀를 찼다.
“저럴 시간에 레벨이나 올리지.”
컴퓨터게임은 캐릭터에 성장 한계란 게 존재한다.
레벨은 최대치가 정해져 있고, 장비는 업데이트할 때마다 약간 성능이 더 좋은 것들이 찔끔찔끔 풀린다.
상업성을 위해.
압도적인 강함을 자랑하는 개인이 사냥터를 독점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서버가 통째로 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성장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은 “그래. 너희들끼리 다 해 먹어라. 퉤!” 하면서 이용자가 접으면 그만이기에, 돈의 노예인 운영자와 개발자는 레벨 등에 제한을 둬서 캐릭터를 평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접으려면 자살밖에 없다. 마음에 안 든다고 손쉽게 그만둘 수 없다.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헉?! S급 용사다?!”
“그게 무슨….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S급은 미구현이 아니었단 말인가!”
내 무지개색 이름표를 본 용사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급기야,
“형님! 한가하시면 실력 좀 구경시켜주십시오! 겸사겸사 파티를 맺어주시면 영광이고요. 하하!”
“멋진 오빠. 저를 파티에 끼워주세요. 절대로 방해 안 할게요. 얌전히 있다가 밤에만 살짝? 어때요?”
은근슬쩍 내게 편승하려는 자들도 등장했다.
나로선 실소가 절로 나왔다.
“미안하지만, 내 파티는 이미 꽉 찼어. 찰떡.”
펄럭!
내 부름에 응답하듯 허공에 소환된 성녀H가 3쌍의 날개를 펼친 채 천천히 활공하며 지상에 내려왔다.
여신(女神)처럼 우아하게.
언제 봐도 화려한 퍼포먼스다.
그리고 그녀를 처음 본 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압도됐다. 따져보면 처음도 아닌가?
“히, 히프리아…?”
“진짜로 히프리아 님이잖아!”
“나의 여신님이 저 남자의 동료라고…?”
“이건 악몽이야! 히프리아 님~!”
판타지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라누벨처럼, 용사 페스티벌의 얼굴마담이었던 성녀H를 모르는 용사는 없었다.
엄청난 인기인걸?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요.”
호들갑 떠는 좌중을 쓱 둘러본 성녀H가 살포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켜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딘지 알겠어?”
“네. 관리자 권한으로 현재 위치를 특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리모델링으로 너무나 많은 게 변했네요. 제 권한으로 열람할 수 없는 사항도 많이 보이고.”
“그건 아쉽네.”
“도움이 안 돼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경악하는 용사들을 무시한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생성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뒤를 성녀H가 따라왔다.
“주인님. 어디로 가실 생각이세요? 교직원의 간섭으로 강산이 많이 변했어도 이곳은 소녀의 고향. 어느 정도는 안내할 수 있습니다.”
“장소는 없고 만나려는 인물은 있지.”
“혹시, 3대 요정왕 엘브하임과 그의 여식을 말씀하시는지요?”
“맞아.”
특히, 그 가슴을 사랑하는 요정왕은 좀 때려줘야 한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닭대가리들로부터 구해준 은인에게 자기가 아는 모든 정보를 실토할 것처럼 굴더니, 실제로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유감스러운 행동들도 연기일지 모른다.
“음…. 관리자 권한으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인간에게 우호적인 요정들의 도시를 운영하는 것 같습니다.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은 최초의 용사를 따랐던 동료이긴 하지만, 신을 향한 적대행위는 하지 않기에 잠정적 보류 상태입니다. 그가 운영하는 도시는 요정의 문화와 전통을 알 수 있는 관광명소로 알려졌대요.”
“정보가 술술 나와서 편하네.”
“주인님의 소유물이 되면서 권한이 대폭 축소되긴 했지만, 저도 일단은 페스티벌 관계자니까요.”
나란히 날아가는 성녀H의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와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당장 만나러 가자고.”
“네. 소녀가 안내하겠습니다.”
나침반과 지도보다 정확한 안내자 덕분에 목적지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도와달라는 원주민이랑 마주치지 않은 쾌적한 이동이었다.
그곳은 일개 도시라고 부르기엔 굉장히 웅장했다.
순백의 아름다운 성이랄까.
정령들의 도움으로 모든 게 도자기로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보도블록부터 건물, 구조물, 성벽에 이르기까지.
요정들의 도시는 거대한 종합예술이었다. 판타지아 차원의 요정왕국을 축소해놓은 것 같았다.
“동일인물이 왕이고 시장이니 당연하려나?”
날아서 성벽을 넘으면 도시 입구의 검문을 무시할 수 있지만,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이름표를 달고 몰래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점수에도 영향을 주고.
▷점수: 101
▷순위: 2850
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50점을 받았고, 검문을 정상적으로 통과했더니 50점을 추가로 획득했다.
나란히 걷는 성녀H가 설명했다.
“기숙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탐험할수록 획득하는 점수도 높아집니다. 조금 전에 주인님께서 도시에 무단침입했다면 역으로 50점을 잃고 다시 0점으로 되돌아갔을 거예요. 제가 관리자 권한으로 규칙을 대충 살펴본 바에 따르면 준법정신을 상당히 중시합니다.”
“별거 없네~”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름다운 녹색별 지구에서 태어난 합리적인 문화시민인 나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점수: 91
▷순위: 3016
“...음? 갑자기 점수가 왜 떨어졌지?”
“당황하는 경비원의 표정으로 추측해보자면, 주인님이 자연스럽게 시청에 무단침입해서 그런 거로 사료됩니다.”
“무단이라니?”
시장과 내가 남남인가!
그의 딸 가슴이 조금만 덜 유감스러웠으면 사위가 됐을 몸이다.
“시스템은 과거의 인연까지 배려하지 않으니까요.”
“융통성이 없네!”
어쩔 수 없이 시청 입구로 돌아가서 방문목적을 밝혔다.
▷점수: 96
▷순위: 2991
그랬더니 내가 시청에 무단침입하며 잃었던 10점 중에 5점을 바로 돌려받았다.
자진신고하면 벌점이 줄어든다는 건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짜 웃기는 시스템일세.”
내가 시스템의 맹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요정 여성이 쏜살처럼 시청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로 나를 보며 외쳤다.
“용사님~!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보스K의 딸인 요정K였다.
“요정K. 너도 여전히 건강해 보이네. 40년 전에 보았을 때랑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너무해요! 잘 보세요!”
개미처럼 잘록한 허리 아래의 골반에 양손을 떡하니 걸친 요정K가 우쭐하는 표정을 지었다.
...뭘 보라는 거지?
예쁜 배꼽이 훤히 드러난 노란색 티셔츠, 요정치고 굉장히 튼실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강조한 분홍색 핫팬츠, 뾰족한 귓바퀴에 위아래로 달린 2쌍의 귀걸이….
지구의 평범한 아가씨 수준의 스타일이다.
“촌스럽진 않네.”
“옷 말고요. 여기요!”
내게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은 요정K가 어깨를 움츠리면서 가슴을 바짝 모았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는 잘 알겠는데, 먼지 같은 변화를 눈치챌 만큼 내 기억력은 좋지 않아.”
“먼지라니….”
울상을 짓는 요정K 옆으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그것 봐라. 이 아빠 말이 맞지? 용사님이 절대 구분하시지 못할 거- 쿠엑?!”
털썩.
무투파인 딸의 팔꿈치에 맞은 보스K가 배를 부여잡으며 고꾸라졌다.
“여전히 시끌시끌한 부녀네요.”
성녀H가 우월한 몸매를 과시하며 말했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끙끙거리며 고개를 치켜든 보스K의 고통으로 찡그려진 얼굴이 갑자기 활짝 펴졌다.
“오오! 성녀님! 여전히 탐스럽고 탄력이 넘치시는군요! 저 뒤편에 매달린 과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이. 보스K.”
“아차! 용사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이렇게 탐스- 아름다운 성녀님이랑 쭉 함께하셨으니 당연히 평온하셨겠지요.”
이런 남편을 그리워하는 요정B에게 연민을 느끼며.
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최초의 용사랑 단순한 동료 관계가 아니었더라? 네가 아는 혼돈의 유물을 전부 불어. 그리고 이 선배가 가출한 방법과 고유능력까지 상세하게.”
“하, 하하….”
3대 요정왕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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