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회차] 당신은 초등학생입니다
득달해서 쥐어짠 보스K는 내 요구대로 세세하게 밝혔다.
하지만 처음부터 협조적인 건 아니었다. 진심으로 협조할 마음이 있었으면 이전에 만났을 때 밝혔을 터.
보스K는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볼모로 잡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초의 용사는 제 친구였습니다. 마지막에 가출하면서 민폐를 잔뜩 끼치긴 했지만, 남자는 의리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긴 한데…. 친구보다 딸의 미래가 중요하지요. 제 딸의 나이가 어느새…. 컥?! 하여간 좀 됩니다.”
딸에게 맞은 배를 움켜쥐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보스K의 눈빛은 진지했다.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눈.
의리와 사랑을 저울에 올린 결과, 사랑으로 기우는 것이다.
“주위에 요정 사내가 많잖아?”
이곳은 요정들이 사는 도시다.
판타지아 대륙의 요정왕국만큼 규모가 크진 않지만, 사방이 요정으로 넘쳐난다.
그중에 잘난 요정 사내 하나 없을까?
요정K가 뾰로통한 얼굴로 답했다.
“용사님이랑 비교하면 구더기죠.”
“...요정K. 너도 네 아비에게 동종혐오가 옮았니?”
“객관적으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이 대륙에서 저보다 강한 요정은 없을 거예요. 유감스러운 전직 요정왕을 포함해서.”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요정K.
나는 무심코 넘어간 그녀의 능력치를 살펴보기로 했다.
▷종족: 카오스 엘프
▷레벨: 999+
▷직업: 무녀(미녀→근력↑)
▷스킬: 민첩Z 혼돈Z 파괴MAX 매력MAX 오감SS···
▷상태: 수줍, 마검, 마탄
전투력이 몰라보게 올라갔다.
초월영역이 둘!
이전의 요정K 능력치를 기억하는 나로선, 40년 동안 그녀가 열심히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과거에는 이랬으니깐.
▷종족: 카오스 엘프
▷레벨: 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민첩SSS 오감SS 매력SS 불굴SS 검술SS···
▷상태: 양호
나는 그녀의 변화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세월이 흘러도 성장하지 않는 요정이 많기 때문이다. 요정만큼 영원한 젊음과 긴 수명을 허투루 낭비하는 종족도 드물다.
보스K가 그 대표적인 예.
▷종족: 그랜드 엘프
▷레벨: 999+
▷직업: 주술사(축복=정령↑)
▷스킬: 정령SSS 궁술SS 망각SS 축복SS 인내SS···
▷상태: 흐뭇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능력치!
딸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성녀H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만 봐도, 보스K가 평소에 얼마나 나태한 삶을 사는지 알 수 있다.
여태까지 스킬을 유지한 게 신기할 지경이다.
아무튼,
“좋아. 이 세상에 공짜는 없지. 하지만 나는 바쁜 몸이라서 시간을 오래 할애해줄 순 없어.”
“그 정도의 성의면 충분합니다. 저열한 유전자를 타고난 요정의 출산율이 얼마나 낮은지는 저도 알기에.”
이런 놈을 시장으로 둔 요정들에게 명복을.
보스K가 이어서 말했다.
“제가 혼돈의 유물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전부 몇 개가 있는지는 압니다. 아내들을 공평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최초의 용사는 모든 아내에게 1개씩 선물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면에선 참 답답한 친구였습니다. 한 나무에 매달린 과일이 전부 탐스럽진 않거늘.”
“그래서 몇 개인데?”
“총 32개입니다.”
“많네.”
유물도 아내도.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최초의 용사에게 구애한 미모의 여성만 수천 명에 달했으니까요. 하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냐고 묻는다면, 그 친구는 지나친 로맨티시스트였습니다.”
사랑이면 전부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자질구레한 내용은 생략해.”
선배1의 복잡한 가정사는 혼돈의 유물에 깃든 추억으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하하! 알겠습니다. 가출한 방법은 당연히 본인의 고유능력으로 한 겁니다. 저희가 혼돈의 힘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자원이죠. 그것은 신이 정한 규칙에 간섭해서 비트는 겁니다. 신이 쳐둔 차원의 벽을 넘은 것도 그 능력 덕분입니다.”
“호오….”
혼돈의 유물을 9개 수집하면 차원이동을 할 수 있다는, 도적E의 주장은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용사님께서 제 딸의 미래를 책임져주신다고 했으니, 저도 목숨 걸고 밑천을 밝히겠습니다.”
“마음대로 책임을 떠넘기지 마.”
“하하! 부끄러워하시긴. 용사님께서 판타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정확한 정체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초의 마왕보다 전투력 측면에선 굉장히 약한 존재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용사를 육성한 거니까요.”
“그게 끝?”
나도 그쯤은 예상했다.
이게 전부라면 대단히 실망스러운데….
“오랫동안 갇혀 지낸 탓에 정보가 낡은 건 이해해주십시오. 이번에는 최신정보로 넘어가겠습니다. 교직원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정체를 아십니까?”
“아니.”
정체를 알았다면 도덕 선생을 포함해서 전부 모가지를 비틀어놨을 것이다.
“용사님께서는 용사 페스티벌이라고 해서, 40년마다 이 땅에 소환되십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 원주민입니다. 그래서 교직원이란 존재들이 축제를 준비하는 걸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호오……?”
그래서 정체가 뭔데?
“최초의 용사가 사랑했던 아내들입니다.”
*
나는 푹신한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침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분노를 넘어선 해탈의 경지라고 할까.
내가 53년 동안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 갇혀서 굴렀던 이유가 선배1의 가정이 파탄 난 탓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대의 적인 최초의 마왕 ‘페도나르’를 봉인한 판타지 신은 더는 용사를 육성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가 가출해서 반기를 들면서 새로운 장기 말이 필요하게 됐다.
그 피해자가 바로 나.
지구의 선량한 문화시민은 53년째 고통받고 있었다.
“새근새근.”
그런 내 옆에는 요정K가 바짝 붙은 채 잠들어 있었다.
밤새 열심히 달렸다는 증거.
그녀는 아기를 정말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미안하게도 내 종족은 현재 인간이 아닌 정령이었다.
정령과 요정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리 없다.
요정K는 헛된 꿈에 부푼 셈이지만, 잉태율이 원래부터 극악인 요정 왕족이니 의심하진 못할 것이다.
▷점수: 831
▷순위: 1854
유감스러운 요정 시장의 딸이랑 진하게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데, 어째선지 점수가 쭉쭉 올랐다.
초월영역 스킬을 2개나 보유한 요정을 합법적으로 떡실신 시킨 내 행동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여기는 요정K의 방이었다.
혼자서 쓰기엔 지나치게 넓었는데,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아기를 위해 갖춰둔 아기침대와 유아용품, 장난감 등으로 절반을 꾸며놓아서 넓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쪽 벽.
“너는 대체 누구냐….”
부담스러운 크기의 내 초상화가 붙어있었다.
이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는 요정K는, 아침마다 나의 느끼한 미소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모양이다.
이러니 다른 요정 사내가 눈에 들어올 리 없지.
나는 침대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래도 요정K는 깨지 않았다. 전투적으로 달려들면서 나를 이기려 드는 그녀를 밤새 혼쭐내준 보람이 있었다.
“하하! 밤은 편안하셨습니까?”
앞치마를 두른 보스K가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너, 요리도 할 줄 알았냐?”
“기본은 합니다. 독이 들어있지 않은 식재료라면 무엇이든 요리해낼 수 있습니다. 입맛이 까다로운 딸아이는 풍뎅이 볶음에 식겁한 뒤부터 제가 부엌에 못 들어오게 감시했지만, 오늘은 특별하니까요. 후후!”
“부모가 맞는지 의심스러워.”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하하! 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요정의 속담에, 1000년 전에는 자식, 후에는 친구. 2000년부터는 이웃이라고.”
“아주 자랑이다.”
“하하!”
“그래서 풍뎅이를 볶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요정이 지독한 채식주의자란 편견을 깨기 위해 제가 고안해낸 생선요리입니다. 민물로 올라와서 산란(産卵)을 마치고 체력이 다하여 죽은 연어를 회수해서 먹는 건, 마음의 정령들도 눈감아주거든요. 아! 연어는 기름기가 많은 생선이라서, 몸매로 고민이 많은 요정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서 연어요리를 먹었다.
...꽤 맛있잖아?
“제법이네.”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아! 그리고 제 관리자 권한으로 용사님에게 여러 의뢰를 해뒀습니다. 딸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귀찮은 딸이랑 놀아주기, 까다로운 딸을 달래기, 사랑하는 딸이랑 친해지기, 무서운 딸을 가르치기. 지금쯤 꽤 점수가 오르셨을 겁니다.”
“권력 남용이잖아.”
“남용이라니요. 가정이 평화로워야 시장 일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엄연한 공무입니다. 지금은 용사님 앞이라서 얌전한 숙녀인 척하지만, 히스테릭이 얼마나 심한데요.”
“그런 딸을 내게 떠넘기려는 그 양심은 무엇?”
“하하! 용사님을 믿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진지한 어조로 보스K에게 질문했다.
“교직원 중에 페스티벌에 남은 자가 있나?”
내 손은 언제나 미끄러질 준비가 되어있다.
“있긴 하지만, 용사님이 찾으시는 교직원은 없습니다. 그들은 엉덩이 무거운 원로교사니까요. 한심한 졸업생들을 상대하는 잡일은 말단의 교생과 신임 선생들이 신분을 감춘 채 맡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보다도 아는 게 없습니다.”
“흐음….”
그러면 교생 아가씨도 이곳에 있다는 걸까?
“용사님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점수를 잘 받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시면 그만 아닙니까? 떠나시기 전에 귀여운 손녀 하나만 저에게 남겨주시면 됩니다.”
“욕망이 너무 노골적인데!”
“하하! 솔직하게 사는 건 흉이 아닙니다. 물론, 용사님의 걱정도 이해는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면, 행성이 멸망할 것까지 본능적으로 신경 쓰게 되니까요. 영원한 생명을 가졌더라도 터전을 잃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이론상으론 요정 왕족은 영원히 산다.
살아갈 곳을 잃기 전까지.
“흥미로운 이론이네.”
“이론이 아닌 사실입니다. 판타지 신이랑 최초의 용사가 지구의 패권을 놓고 대립 중이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졸업생은 용사님이 유일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길어봐야 500년쯤 살 그들은 냉전이 끝나는 먼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의 본능에 이끌려서 벌써 고민하지는 마시란 뜻입니다. 어차피 뾰족한 수도 없잖습니까? 그 친구처럼 판타지 신에게 대적할 고유의 힘이 없는 한.”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이름표가 있는 앞에서 너무 대놓고 말하네.”
이름표에 감시카메라 기능도 있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이런 놈이란 사실은 교직원들도 아는 사항이니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전부는 아니지만, 원로교사 중에 친구의 마누라가 있다고요.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드리면 기분 상하실지 모르지만, 용사님은 초등교육과정을 밟는 일개 학생일 뿐입니다. 아무리 대단해봐야 초등학생입니다.”
“정말로 기분 나쁘네.”
판타지 경력 53년 용사님을 너무 얕잡아본다.
하지만 보스K도 물러서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한 법입니다. 용사님이 무엇을 하더라도 교직원 일동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겁니다. 초등학생은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니까요. 못해도 중학생쯤 돼야 눈길이라도 줄 겁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최초의 용사가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한다길래 나름 대단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기분 탓이었던 모양이다.
보스K의 말이 지극히 옳다.
나는 초등교육과정에 묶여있는 일개 학생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의 패권 같은 유치한 정치는 제쳐놓고,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테니스라켓에 덜 맞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편이 100배 유익하다.
“보스K. 네 말이 맞아.”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점수를 왕창 딸 수 있도록 임무 좀 줘봐. 딸이랑 놀아주는 거 말고 몬스터 토벌 위주로.”
“좋습니다. 아! 그리고 제 딸도 데려가십시오. 용사님 혼자서 처치하시기엔 벅찬 몬스터가 많습니다.”
“혼자? 누가 혼자래?”
나는 정령들을 전부 소환했다.
보스K가 넋을 놓으면 중얼거렸다.
“보리스 왕자, 검성 실레리온, 악마사냥꾼 에르테미스, 환상적인 왕가슴 천사까지…?”
“보스K. 여기에 맞는 사냥감에 현상금을 걸어줘. 야! 조용히 해. 유감스러운 요정왕 처음 보냐?”
내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놀라워하던 정령들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때, 보스K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제가 용사님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초등학생은 난생처음 봅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저희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감시한 교직원측에서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거란 의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조치가-!”
딩동!
현관문의 초인종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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