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회차] 사회적 약자
원흉은 볼 것도 없다.
보건 선생은 무려 10,000점이나 주고 떠났다.
그게 얼마나 많은 양인지는 모르지만, 순위가 1854위에서 87위로 단숨에 껑충 뛰어올랐다는 게 중요하다.
피자 좀 먹었다고?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꼭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1위도 아니고 87위니까.
어차피 점수를 올려서 5위 안에 들어가야 했다. 그 번거로운 시간을 단축했다는 관점에선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조절할 수도 있고.”
점수가 무작정 오르기만 하는 건 아니다.
불법을 저지르면 점수가 내려간다. 혹시라도 내가 불가피한 실수로 점수가 급등해서 2위까지 치고 올라가더라도 문제없다.
조절하면 그만이니까.
여기까지 생각했더니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가자.
나는 53년 경력 용사.
이 정도 난관은 아무렇지 않다!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입니다, 용사님. 하지만 조금 전에 보건교사가 경고했듯, 앞으로 저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곧 태어날 손녀를 돌보려면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안 태어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사는 요정 왕족의 임신율은 기적적인 수준이다.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천적이 많고 단명하는 포유동물일수록 번식력이 높고 암컷의 유방(乳房)이 발달한다.
젖의 숫자가 많고 크기도 커진다.
요정 여성의 가슴이 발달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
물론, 크다고 임신이 잘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의 외모는 전부 다르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이건 인간끼리 비교하는 게 아니라, 엄연히 다른 종족을 논하는 것이다.
요정은 균등하게 작으니까.
이 자연법칙은 요정 남성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것을 어떤 방패와 성문도 단숨에 꿰뚫을 수 있는 성창(聖槍)이라고 한다면, 요정의 것은 한두 번만 쓰면 날이 무뎌지는 조잡한 과일칼에 비유할 수 있다.
“하하! 용사님. 제가 미래에서 보고 왔습니다.”
“헛소리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어젯밤에 길몽(吉夢)을 꾸었습니다. 넓은 마음과 몸으로 하등생물인 요정 종족을 구원하고 인도할 위대한 왕이 태어나는 꿈. 그 꿈에서 깨어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연어가 어찌나 당기던지….”
“입덧을 왜 네가 하냐?”
“좋은 할아버지가 될 거란 징조 아니겠습니까?”
보스K가 빈 피자 박스를 정리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요정 종족의 고귀한 왕으로 칭송받는 그가 자연스럽게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틀린 주장도 아닌 것 같았다.
털털하고 서민적인 왕이랄까.
“좋은 할아버지라….”
될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손녀를 제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손녀야. 네가 태어나는 날, 온 판타지아 요정들이 너의 이름을 속삭였단다.”
“과장이 심한걸.”
“진심입니다. 부지런히 자랑하고 다닐 겁니다. 요정의 공무원 면접시험에도 꼭 넣어서 모두가 기억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그건 진짜 심하잖아…!”
“하하! 농담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 문제라고, 이 유감스러운 요정아!”
나는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태어나지도 않을 손녀를 기대하는 보스K에게 핀잔을 줘봤자 나만 피곤해질 뿐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실망하고 떨어질 터.
...아니지.
딸이 임신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를 또 귀찮게 하리라.
어쩌면 될 때까지 매달릴지도 모른다.
그건 좀 소름 돋는군.
“맞아. 우리가 계속 함께 있으면 교직원들이 굉장히 불편해할 거야. 그…. 손녀를 위해서라도 되도록 안 만나는 게 좋겠지. 건강하게 잘 지내라. 우주의 기운이 함께하길 비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임신했을 때는 마음의 안정이 특히 중요하니. 딸아이에게는 제가 잘 설명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됐다.”
따지길 포기한 나는 보스K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긴 또 석연치 않았다.
저렇게 ‘새 생명’을 바라는 요정 부녀(父女) 앞에서, 내가 안 태어나길 바란다고 말하는 듯하잖은가?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진짜 생기면 할 말이 궁색해진다.
나는 네가 태어날 줄 몰랐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래서,
뿅!
정신을 집중한 나는 마검을 소환했다.
늙은 왕자, 보리스의 검.
성검이랑 달리 가벼운 덕분에, 내가 연약한 갓난아기의 몸으로 판타지아 북대륙을 정벌하는데 혁혁한 도움이 됐었다.
소환하는 과정에서, 불법으로 지정된 블랙박스를 0.1초쯤 사용하긴 했지만, 이걸 시시콜콜하게 따지면 나중에 페스티벌 1위, 2위를 하더라도 중등교육과정 입학은 무리 판정이 나오기에 거리낄 게 없었다.
그렇다고 남용은 금물.
3위, 4위, 5위를 했는데, 불법 스킬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무효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로서도 이건 꽤 모험하는 셈.
“오! 손녀에게 주실 선물입니까? 손녀가 예쁘게 성장하면 꼭 그것을 쥐어주고 용사님을 찾아가도록 말하겠습니다.”
“할 말이 없게 만드네.”
귀찮은 설명을 생략한 나는 손에 쥔 마검에 정신을 집중했다.
마스터 몰랑의 세 번째 가르침으로 블랙박스가 S등급에 올랐지만, 정작 그 효과는 사용한 적이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다.
쓸 줄 몰라서?
아니다.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S
▷SS: □□□□.
▷S: 기록한다.
▷A: 대상을 혼동시킨다.
▷B: 대상을 파멸시킨다.
▷C: 대상을 망각시킨다.
▷D: 혼동하지 않는다.
▷E: 파괴되지 않는다.
▷F: 망각하지 않는다.
S등급의 ‘기록한다.’가 소모성 능력인 탓이다.
내가 품고 있는 블랙박스의 힘을 사물에 깃들게 하는 것. 이러면 평범한 물건도 보물로 탈바꿈한다.
단, 소모된 힘은 회복되지 않는다.
■■S→■■A
그래도 나는 등급이 하락할 만큼 거침없이 힘을 퍼부었다.
찔끔찔끔 쓰고 생색낼 생각은 없었다.
이 감각이나 익히자.
사물에 힘을 깃들게 하는 능력을 익히고 싶다. 내가 경험치를 소모해서 정령들에게 옷을 만들어주는 원리도 이거랑 비슷했으니까.
우우웅-
마검이 보라색 빛에 휩싸였다.
“그건…! 오! 맙소사! 그 친구의 고유능력을 용사님께서…!”
내가 뭘 하는지 단번에 눈치챈 보스K가 방금까지 장난스러운 태도를 고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스킬 분석에 들어갔다.
마스터 몰랑의 위대한 가르침이랑 비교하면 너무나 쉬웠기에 문제없었다.
“...그렇군.”
이건 마음의 문제였다.
남을 위해 자신의 보물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위선적인 용사랑 다르다. 그들의 선행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회복되는 자원에 한정된다.
마력, 마기, 신성, 체력, 기력, 내공….
자신의 한정된 수명이 눈에 띄게 깎인다고 한다면, 그래도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까?
선배1도 그렇게 하진 못했다.
단, 그는 사랑하는 아내들에게 자신의 힘을 선물했다.
완전한 남은 아니었지만, 줬다고 아내들에게 생색내지 않고 몰래 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
태어날 리 없는 딸을 위해 소모성 힘을 퍼부었다.
내 수명은 아니지만, 판타지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확실한 무기를 스스로 포기한 셈.
미련한 결정이긴 했으나-
■■A→■■SS
그 결정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됐다.
시간이 흘러도 자원이 회복되지 않는 소모성이라서 봉인해둔 스킬을, 거침없이 사용해서 이해도와 숙련도를 올린 덕분이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SS
▷SSS: □□□□.
▷SS: 생산한다.
▷S: 기록한다.
하지만 그 결과, 소모성이 지속성으로 바뀌었다.
자원을 무한정 사용할 순 없지만, SS등급 효과는 블랙박스의 힘을 조금씩 생산하는 것이었다.
알면 간단해도 모를 때는 한없이 어려운 S등급 관문.
그 경지를 나는 우연히, 정의로운 용사의 마음씨로 뚫어버렸다.
“거참…. 일단은 마무리부터 할까.”
늙은 왕자의 마검은 첨단과학과 판타지가 혼재된 광선검이다.
그 기본원리는, 마검의 사용자가 자신의 힘으로 빛의 칼날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 힘이 셀수록 절삭력도 강해진다.
역으로 약하면 식칼만도 못한 건 당연지사.
나는 갓난아기도 쓸 수 있도록 마검을 조정했다.
모든 아기가 나처럼 태어날 때부터 강한 힘을 보유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속성을 심어야지.”
이 마검에 블랙박스의 힘만을 넣는다면 혼돈의 유물이랑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고유능력을 심었다.
블랙박스 S등급 스킬을 사용하면서 습득한 새로운 응용법. 원래 목적은 이것이었다.
최초의 정령이 가르쳐준 나의 정령 속성은 인간.
그렇기에 마검에 담는 것도 ‘인간’이다.
보건 선생이 보증한, 나보다 못생긴 학생회 임원도 경험치가 되어 내 가슴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를 정령으로 임명했다.
▷종족: 유니크 스피릿
▷레벨: 500
▷직업: 검신(검술=신성↑)
▷스킬: 검술Z 관통Z 검기Z 봉인Z 내성MAX···
▷상태: 환생
갓난아기 전용이기에 너무 강하면 안 된다. 그래서 레벨은 내 임의로 고정했지만, 나머지 능력치는 고스란히 계승했다.
나는 그 상태의 정령을 마검에 쑤셔 넣었다.
당사자의 의향 따위는 무시했다.
에고소드 완성!
마검(魔劍)→신검(神劍)
내 상태에 표시된 명칭이 ‘마검’에서 ‘신검’으로 바뀌었다.
검에 깃든 정령의 직업이 ‘검신’인 까닭일까. 그렇다면 성검3처럼 ‘용사’를 넣으면 성검이 되는 걸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실험해보자.
“나중에 딸이 태어나면 줘.”
나는 방금 만들어져서 따끈따끈한 신검을 보스K에게 건넸다.
그가 양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답했다.
“네. 절대로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아들이 태어나면 그냥 보관해두겠습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뭐, 알아서 해.”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하는 요정에게 핀잔 주기를 포기한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시장 관사(官舍)에서 잘 자고, 피자로 배도 든든했다.
이제, 적극적으로 축제를 즐길 시간이다.
*
보건교사가 10,000점을 주고 떠나기 전, 요정 도시의 시장이자 페스티벌 관계자인 보스K는, 내(사위)가 점수를 단시간에 올릴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한 임무를 몰아서 줬다.
그래서 전부 현상금이랑 관련된 것들이었다.
▷요정 남성들을 납치하는 색녀: 250점
▷요정만 먹는 다이어트 악룡: 3600점
▷요정 숫총각만 노리는 사냥꾼: 400점
▷죽은 요정을 부리는 요술사: 2700점
요정들이 모여 사는 도시답게 요정이랑 관련된 사건들.
안 그래도 출산율이 저조해서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요정 종족이기에 동족의 납치와 살인에 특히 민감했다.
나는 가까운 도시의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흠. 매우 심각한 모양이네.”
길거리에는 요정 남성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도시를 방문한 인간 여성이 많은 것도 절대 우연이 아니다.
성적인 매력이 떨어지는 요정 여성은 인간보다 각종 범죄로부터 안전한 편이지만, 중성적인 외모의 꽃미남 비율이 높은 요정 남성은 늘 표적이 됐다.
인간 남성은?
강력한 몬스터가 득실득실한 판타지 세계의 인간 남성은 능력치 보정에 힘입어 고릴라처럼 덩치가 좋다.
타고난 성욕도 왕성해서, 다수의 여성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경향 또한 매우 강하다.
하지만 요정 남성은 그 정반대.
나이를 먹어도 소년 같은 분위기는 변치 않고, 부족한 성욕 대신 자리한 의무감으로 몸을 섞은 한 여성만을 짝으로 생각한다.
외모도 전설의 용사, 백마 탄 왕자랑 흡사하다.
겉보기에는 약하나 무지막지하게 강한….
물론, 요정 남성들은 반전 없이 실제로도 약하다. 밭일로 근육을 단련한 인간 여성이랑 몸싸움을 벌이면 질 정도로!
그래서 인기 좋은 사냥감이다.
“실종된 제 아들을 찾아주세요. 흑흑!”
“제 남편이 어젯밤부터 안 돌아왔어요.”
“친구가 술집에서 사라졌습니다.”
“미래를 약속한 오빠가 연락이 안 돼요.”
지구에서 이런 사연들을 들었다면, 슬픔과 걱정으로 가득한 눈물 대신 매의 눈으로 방앗간부터 의심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판타지 세계.
요정 남성이 살기엔 너무나 힘든 세상이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이 용사님에게 맡겨달라구!”
판타지 경력 53년의 노련한 용사님이다.
1회차의 동료들이 “뭐? 수컷이잖아. 알아서 해결해.” 라면서 도움을 외면할 때, 나는 무관심이란 칼에 난도질당한 이 사회적 약자들을 야금야금 도와왔다.
남자라고 다 강한 건 아니다.
인간의 잣대를 요정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
아무튼,
“딱 5위만 하자.”
탐정이 된 나는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협력하는 정령이 100만 마리밖에 안 돼서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모자란 부분은 우주의 기운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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