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회차] 너는 안 돼!
“선물…? 와아! 예쁜 팔찌네요? 하지만 여성용이라고 부르기에는 폭이 너무 넓은 것 같은데요. 아! 조절 기능이 있군요?”
“없어.”
내가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강한수 씨. 선물은 고맙지만, 제 손목을 한 번 보세요. 연약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편인데, 당신 앞에서만은 말해야겠네요. 이 가녀린 손목에 이처럼 큰 팔찌가 가당키나 한가요!”
“이건 발찌야.”
나는 그녀의 오해를 바로 정정해줬다.
예전에 닭대가리들의 보물창고를 털었을 때 구한 장신구 중에서 휴대하기 편한 걸 골랐다.
그것이 이 발찌.
지구에서는 양말과 스타킹이 더 익숙하지만, 노출증 환자가 대다수인 천사들은 이런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알겠으니 좀 돌아서 봐요.”
“왜?”
“정말 몰라서 물어요?”
“알기에 묻는 건데. 돌아서면 기습하려는 거잖아?”
“완전히 틀렸거든요?! 옷 좀 입게 돌아서 있으란 얘기였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원한이 있나요? 이 상황에서 기습을 상상하다니….”
“야, 팩토리아. 내 상식이 어때서?”
나는 지극히 정상이다.
여자 기숙사에 몰래 들어와서 알몸의 여자랑 마주친 상황이다.
여기가 지구였다면, 그 여자는 남자인 나를 발견하자마자 비명을 지르면서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판타지 침실은 방음처리가 완벽하다. 휴대전화 또한 없기에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이럴 때 여자의 대처는?
침입자의 방심을 유도한 후에 공격하는 것이다.
알몸을 본 남자가 죽으면, 아무도 안 본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옷으로 잘 감춘 똥배가 드러날 일도 없다.
“똥배 없어요!”
“그냥 예시잖아. 왜 발끈하고 난리야.”
“으으….”
“옷 입는다고 애쓸 필요 없어. 지금처럼 이불 덮은 채로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돼.”
“지구의 정보요?”
“그래.”
이제 좀 잠에서 깬 모양이다.
옷 입길 포기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얼굴만 빼꼼 내민 팩토리아가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강한수 씨의 부모님은 잘 계세요.”
“......”
그 말을 듣고 안도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질문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예상한 팩토리아의 정보력에는 웃을 수 없었다.
“수작 부린 건 아니지?”
“안 했어요! 당신에게 원한 없다니까요! 저는 그저, 강한수 씨의 부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서 살짝 조사해본 것뿐이에요. 아! 비밀은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을 부리지 않고 제가 직접 조사했거든요.”
“그래….”
“저에게 감사히 여기세요.”
“...부모님이 무사하시다는 정보는 고마워.”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9회차 때, 외계인의 침공으로 도시가 파괴됐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제야 안심이 됐다.
“고맙다니….”
“뭐냐? 그 기적을 목격한 어린 양처럼 한심한 얼굴은.”
“기적이라면 기적이죠. 당신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나는 용사야.”
도움을 받은 후에 모른 척하는 양아치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용사였거든요? 부모님 소식만 전해주고 감사를 받을 만큼 뻔뻔하지 않아요. 당신이 약 5년 전에 실종된 날부터 쭉 제 회사에서 일한다고 해뒀어요.”
“...망했네.”
일하기 바빠서 5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다고?
어머니의 테니스라켓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돕는 게 아니라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설득해뒀으니까요.”
“네가?”
“네. 이런 말이 있죠. 거짓말을 하려면 진실을 살짝 섞으라고. 정보가 어두운 강한수 씨는 모르시겠지만, 판타지아 대륙을 다녀온 사람이 은근히 많아지면서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었어요.”
초능력자를 사기꾼 취급하던 사람들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부모님이 그 말을 믿는다고?”
“말씀처럼 처음에는 안 믿으셨지만, 제가 눈앞에서 몇 가지 간단한 마법을 보여드리니 수긍하시더군요.”
“흐음….”
“또 궁금하신 점이 있으세요?”
“아니.”
지구의 상황은 대충 알고 있다.
가장 최근에 포획한 ‘늙은 천사’에게 전부 들었기 때문이다.
가출해서 나라를 세운 최초의 용사는 자기 같은 피해자가 더는 나오지 않도록 하면서, 판타지 신의 세력이 강해지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지구 침공이지만, 적극적이진 않다.
지구를 강하게 자극하면, 원주민(지구인)의 적개심이 커지면서 판타지 초등교육과정 희망자가 대폭 늘어나기 때문이다.
지금도 꽤 늘어난 상태.
다른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한다.
“저도 보리스 왕자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 인어 아가씨에게 꽤 다양한 정보를 입수했어요. 후후! 살짝 자랑하자면, 외계인 포로를 유일하게 확보한 제 입지가 굉장히 높아요.”
“그러시겠지.”
나로선 시큰둥하기만 했다.
유일한 포로?
그 당시에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은 보리스의 하렘 구성원들을 생포할 수 있었다. 귀찮아서 하지 않았을 뿐.
팩토리아는 다른 소소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내게 넘겨받은 골렘D를 연구해서 양산형 안드로이드를 만들었고, 이걸 통해서 막대한 부와 명성을 획득했다는….
“복잡한 이야기는 말해줘도 몰라. 내가 아는 사회와 경제는 중학교에서 멈췄거든.”
“이공계이셨던 모양이네요.”
“너는?”
“구분하지 않고 골고루 배웠어요. 하지만 어느 쪽이 도움이 더 됐냐고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인문계 쪽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판타지아 대륙의 원주민들은 순수해서, 그럴싸하게 말만 조금 잘해도 설득할 수 있었거든요.”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거, 평범한 발찌가 아니네요. 천사의 축복이 걸린 대단한 보물 같은데요. 제가 모르는 숨겨진 기능도 있나요?”
“있지.”
“정말로?!”
“하지만 현재는 비활성화 상태야. 네가 초월영역 스킬을 보유한 인간을 쓰러트리면, 그를 정령으로 부릴 수 있어. 바로 이렇게.”
나는 정령들을 소환했다.
예전에는 경험치를 아끼기 위해 깻잎 모양의 속옷만 입혀뒀지만, 낮에 그 변태를 본 뒤에 괜찮은 옷으로 바꿔놨다.
요정의 시신들에 이상한 옷을 입혀둔 걸 보고서 “이 녀석은 굉장한 변태로군!”이라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보이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전원이 외계인 간부네요…?”
내 정령들의 능력치를 본 팩토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놀란 그녀는 이불을 젖히며 상체를 일으키기까지.
본인이 현재 알몸이란 사실마저 깜빡한 듯했다.
“그 발찌의 가치를 알았지?”
“정말 감사합니다!”
“용무가 끝났으니 나는 이만 간다.”
“아! 잠시만요! 이왕 저를 도와주신 김에 한 번만 더 도와주실 수 없으세요? 대가는 지구에서 확실하게 챙겨드릴게요.”
“싫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그리고 강한수 씨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니에요. 5년 만에 집에 돌아온 아들이 노른자 땅 위에 100평짜리 집이랑 고급외제차를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면 좋잖아요?”
“흥! 그건 내가 벌어서 할 수 있어.”
나는 콧방귀를 꼈다.
당장 내 창고에 있는 천사의 장비 중 하나만 팔아도 돈은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그러려면 귀찮잖아요?”
“너를 돕는 건 안 귀찮고?”
“예쁜 여자랑 손을 잡고 늑대 같은 눈으로 가슴과 엉덩이를 빤히 보는 것도 귀찮나요?”
“그건 본능이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팩토리아가 말했다.
“제 남자친구가 되어주세요.”
*
다이어트 중인 마룡에게서 구해낸 B급 별친구에게 들었던 대로, 여자 기숙사는 현재 세 파벌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성애자, 동성애자, 부적응자.
나는 그 이상한 파벌 싸움의 현장에 나온 상태였다.
취향에 왜 파벌이 필요한 걸까?
누가 좀 과학적으로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어머! 빅토리아. 꼬리 말고 굴에 숨은 암여우가 무슨 일로 밖에 나왔나 했더니, 더러운 수컷을 기숙사에 데려왔네.”
“캐서린, 잘 들어. 내 친구의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 사냥터에서 얼마나 든든한 동료이냐가 중요한 거지.”
“소문의 유일한 S급….”
“후후! 네가 싫어하는 수컷보다 약한 기분이 어때?”
팩토리아에게 해괴한 부탁을 받고 헤어진 후, 나는 아침에 초대장을 받고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다시 왔다.
여기는 여자 기숙사 3층.
앙숙처럼 으르렁대는 두 여자의 신경전을 구경하는 중이다.
물론, 그 둘만 있는 건 아니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두 파벌을 대표하는 미녀들의 뒤편에 다수의 여성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
이때는 나도 살짝 놀랐다. 지구에 저렇게 많은 동성애자가 있는 줄 몰랐으니까.
“흥! 잘난 수컷에게 아양 떨면서 엉덩이라도 대줬어?”
“역시 삐뚤어졌어. 남자가 아니라 친구라고.”
“그거야말로 궤변이네! 수컷은 수컷이야.”
“말이 안 통하는구나. 너희도 캐서린이랑 같은 생각이야?”
...내가 이곳에 왜 왔을까?
그 의문에 답해줄 사람은 팩토리아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다.
위대한 마스터 몰랑이 옆에 계셨다면 내게 몰랑거리시면서 간단명료한 답을 주셨을 텐데.
안 계시니 어쩔 수 없다.
이건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할 문제.
“이봐, 아가씨들. 그런 탁상공론(卓上空論)은 의미가 없어. 솜방망이보다 부드러운 혓바닥으로 온종일 싸워서 어떻게 결판이 나겠냐?”
그렇게 운을 띄우며 대화에 난입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그냥 위협용으로 소환한 성검 뉴클리온이 내 손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어젯밤에 S급 하녀 엘리스가 내 몸을 마사지하면서 오일을 너무 많이 바른 게 틀림없다.
그러니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부우웅- 촤아아악!
부메랑처럼 횡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간 성검이 전방의 장애물들을 몽땅 쓸어버렸다.
“꺄아악?!”
“이, 이게 대체-”
“히익?!”
예술품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여자 기숙사의 3층 복도 절반이 순식간에 빨간색 토마토로 물들었다.
청소하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대신에 소음공해가 사라졌다.
평온-
“팩토리아. 아직 듣지 못했는데, 내가 뭘 도와주면 돼?”
“...안 도와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래? 하지만 잊지 마. 아무것도 안 했어도 내 출장비용은 비싸.”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을 불렀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출장비를 줘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네! 절대로 안 잊을게요!”
팩토리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A급 중에서 사람 좀 추천해봐. 나는 페스티벌에서 딱 5위만 하고 싶거든. 원래는 남자 기숙사에서 4명을 뽑을 예정이었는데, 조금 전에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공명정대한 용사님이니까.”
“4명이요…? 아!”
남자 2명, 여자 2명.
공평하게 나눠주기로 했다.
사실, 이것도 참 멍청한 짓이다. 순위를 실력순으로 끊지 않고 성별로 구분한다는 것이.
예를 들어,
여학생 4명이 100점, 99점, 98점, 97점을 받았다. 그리고 남학생 4명이 70점, 69점, 68점, 67점을 받았다고 치자.
그런데 공평하게 한답시고….
1위 :100점
2위: 70점
3위: 99점
4위: 69점
이렇게 하면 되겠는가?
지금도 이 우스꽝스러운 예랑 비슷한 상황이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성검 하나 막지 못하는 아가씨들이 A급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이건 공정성에서 문제가 심각한 게 아닐까.
“너 빼고 괜찮은 아가씨들을 2명만 추천해줘.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
“저는 왜 안 되는데요?”
“공정성을 위해서.”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내 고유능력이 깃든 매개체를 자연스럽게 지구로 보낼 의도로 팩토리아에게 발찌를 선물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중등교육장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순위랑 상관없이 중등교육과정을 밟게 된다.
“이걸 말하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아서 안 했는데요. 제가 현재 여자 1위. 전체 2위에요.”
“그러면 발찌 내놔!”
“절대 싫어요! 차라리 절 죽- 아니, 하여간 싫어요! 남자가 쩨쩨하게 줬던 물건을 뺏는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발찌가 갖고 싶으면 너는 절대로 안 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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