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회차] 마왕님 납시오!
내 윽박에 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게 뜬 팩토리아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물었다.
“흐음~ 저랑 같이 지구에 가고 싶으셨군요?”
“...뭐?”
말하는 뉘앙스가 묘하게 불쾌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 나란히 걸어가는 학생이랑 함께 간다고 하진 않는다.
길이 하나라서 선택지가 없을 뿐.
고향 내려가는 고속버스가 하루에 한 대뿐이라서 탄 것뿐인데, 동석한 사람이 함께 가고 싶었냐고 우쭐댄다고 생각해보라.
참으로 난감하다.
“후후!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
팩토리아의 경추와 요추가 내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그녀에게서 발찌를 빼앗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달리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
이건 쉽게 만들 수 있는 양산품이 아닌 수제품이다. 찔끔찔끔 모이는 블랙박스랑 내 고유능력을 섬세하게 가공한 것이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주기엔 굉장히 아까웠다.
“좋아요. 저는 중등교육과정을 밟아서 외계인들에게 안 질 만큼 강해지고 싶었지만, 생명의 은인이신 강한수 씨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함께 지구로 돌아가요. 후후♪”
“...그래.”
사람은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일단은 지구로 무사히 돌아간 뒤에 생각하자.
그때까지는 팩토리아가 무슨 착각을 하든 놔두기로 했다. 내 목적은 그녀랑 실랑이를 벌이는 게 아니니까.
첫째도 지구, 둘째도 지구다.
용사 페스티벌은 4년에 한 번씩 열린다.
나처럼 판타지아 대륙에만 머물렀다면 40년마다 열리는 셈.
예전에는 축제가 꽤 자유로웠다. 도중에 죽거나 “포기!”라고 외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건 축제를 가장한 재시험이에요. 자동차면허랑 같아요. 한 번 따고 끝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자격이 되는지 확인하는 거죠.”
“나도 알아.”
이번 페스티벌은 20년 동안 진행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축제는 2년.
이때까지 누적된 점수의 1위와 2위는 중등교육장으로 떠나고, 3위부터 5위는 지구로 일찍 귀환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5위 안에 들지 못한 그들은 20년 동안 이 페스티벌 대륙에서 생활하게 된다.
급수로 나뉜 노골적인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굉장히 끔찍한 축제인 셈이다.
“강한수 씨. 편견은 좋지 않아요. 일찌감치 순위를 포기하고 즐기는 친구들도 있어요.”
“아직 몰라서 그래.”
이 축제는 짧고 굵게 즐기는 여행이 아니다.
놀이동산이 아무리 좋아도 며칠이다. 계속 있으면 무감각해지고 질리기 마련이다.
20년이라고?
내 1회차 경험에 반추하자면, 10년만 있어도 미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위와 2위도 할 짓이 못되지만.
“그건 강한수 씨가 몰라서 그래요. 체질적으로 판타지 세계가 맞는 사람도 있어요.”
“...그들이야말로 아직 몰라서 그래.”
여기는 판타지 소설과 만화처럼 절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팔다리가 잘리고, 위장이 튀어나온다.
강자에게는 살기 좋다고?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는 강자 위에 더한 강자가 있다. 부자 위에 부자가 있는 거랑 다르다.
나라(법)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까.
“지구도 똑같아요….”
“뭐?”
“세상 어디든 다 비슷하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보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웬만하면 밖에서 사 먹겠는데, 이 기숙사의 배식 수준은 5성 호텔과 레스토랑보다 낫거든요.”
“나는 남자인데?”
그리고 여긴 여자 기숙사다.
팩토리아가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도망치듯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미 30%가 남자인데요, 뭘.”
연예인, 배우, 가수처럼 생긴 검은색 정장 차림의 꽃미남 하인들이 3층 복도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인간만 있진 않았다. 하인은 요정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다. 판타지아 대륙의 폐쇄적인 요정왕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나로선 이해가 안 됐다.
“조금 전에 여자들. 남자가 싫다는 거 아니었어?”
내 방을 불결한 수컷이 청소하다니! 당장 하녀로 바꿔줘!
이렇게 따져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일하는 하인들은 예외래요.”
“흠….”
내가 없는 5년 사이에 지구의 문화가 달라진 걸까. 아니면 사회부적응자들만 모아둔 이 기숙사가 이상한 걸까.
팩토리아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머리만 아플 뿐이니깐.”
나는 어딜 가든 주목받았다.
내가 남자라서?
아니다.
“저길 봐. S급이야!”
“어머! 소문이 사실이었어?”
“S급. 부럽다….”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이름표 탓이다.
팩토리아의 황금색 이름표도 흔한 건 아니지만, 무지개색 이름표는 대륙을 다 뒤져도 오직 이것 하나뿐.
순위와 급수는 비례하지 않는다.
순위가 페스티벌 점수를 기반으로 한다면, 급수는 순수한 능력으로 측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능력 좋은 사람이 순위도 높아지는 법.
결국에는 비례한다는 게, 페스티벌 학계의 정설이다.
“잠깐! 능력치는 낮은데…?”
“그러게. Z등급 스킬이 하나도 없어.”
“A급도 있는 초월영역이 없네?”
“거품 아니야?”
여자 기숙사 공용식당에 모여서 식사에 열을 올리던 용사들이 내 능력치를 보면서 수군거렸다.
내 능력을 의심하는 시기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지 않던가?
“조금 전에 기숙사 3층에서 10명을 일격에 죽였대.”
“맙소사…. 용사들을 일격에? 그게 가능한 일이야?”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아? 그중에 여왕님도 섞여 있었어! 지금 막 부활하신 여왕님은 B급으로 떨어졌다고 난리라더라.”
그리고 순위와 급수의 또 다른 점.
불법만 안 저지르면 임무에 실패하거나 죽더라도 점수와 순위에는 변동이 없지만, 급수는 떨어진다는 것이다.
무조건 한 단계씩.
예외는 없다.
“난리 날 법도 하지. B급 숙소는 두 명이 같이 쓰는걸. 방을 담당하는 하인의 질도 약간 떨어지고.”
“여왕님이랑 같은 방을 쓰는 애가 불쌍하다….”
“쉿! 말조심해.”
“끌려가면 너도 같이 가자. 우리는 친구잖아?”
“함께 죽으려고 친구 한 거 아니거든?!”
...이미 정의로운 용사님이 다 엿들었는데.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닐까? 녹음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험담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면 될 문제다.
“팩토리아. 여왕님이 누구야?”
내가 기억하는 영국 여왕님은 할머니였다. 판타지 세계로 넘어오시면서 회춘이라도 하신 걸까?
정말이면 노인을 공격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캐서린이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아냐.”
“무리의 맨 앞에서 저를 여우라고 부르던 여자요. 남자를 수컷이라고 부르기도….”
“아! 추녀B.”
나는 또 누구라고.
“...당신이 저를 얼마나 고평가하는지 알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저…. 이건 매우 사적인 질문인데, 추녀A는 누군가요?”
“판타지아 동대륙에 있어. 선량한 용사님을 수컷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던 요정 혼혈의 명사수가.”
“설마…? 그녀는 저랑 친구였어요. 짙은 마기를 뚫고 마왕의 어깨에 결정타를 날리기도 했죠. 하지만 그런 면모가 있는 줄 몰랐네요….”
우리는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았다.
고기, 채소, 생선, 과일….
대단히 균형 잡힌 식단이었다.
줄을 선 사람 중에서 남자는 당연히 나 혼자. 이러니 여학교에 혼자 들어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기분도 배식을 받을 때까지였다.
나 혼자 남자인 건 아니었다.
느끼하게 생긴 하인들이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물을 따르고, 남은 식판과 뒷자리를 정리한 덕이다.
그중 일부는 용사들에게 붙잡혀서 이야기 상대가 되어줬다.
“내가 약초꾼 대신 약초를 캐러 산에 들어갔다가 트롤 2마리에게 포위당했는데, 놈들의 조잡한 몽둥이를 피하면서 요렇게! 못생긴 머리에 불덩이를 날리고….”
“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직 감탄하기에는 일러. 2마리라고 했잖아.”
“아차! 이 멍청한 하인이 깜빡했습니다. 에리카 누님.”
...이런 대화가 식당 곳곳에서 벌어졌다.
1회차 때 우연히 가본 귀부인들의 사교모임만큼이나 무척 신기한 광경이로군.
“남자 기숙사도 비슷하지 않나요?”
2인용 원형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은 채 마주 보고 앉은 팩토리아가 넌지시 질문했다.
“거긴 조용해.”
남자 기숙사 내부를 안내받으면서 한 번 가본 게 전부라서 단정은 금물이지만, 그곳 용사들은 하녀들의 얼굴과 몸매를 힐끔힐끔 훔쳐보기만 했다.
얼굴에 “저 아름다운 하녀랑 대화해보고 싶어!”라고 쓰인 친구들이 몇몇 보이긴 했으나, 주위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서로 견제하다가 함께 파멸한 느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다.
“신기하네요.”
“이상한 거겠지. 하녀에게 말도 못 거는 숙맥들. 쯧쯧.”
“남을 흉볼 처지는 아니신 듯한데요.”
“...음?”
팩토리아가 아니었다.
“하녀A.”
“엘리스입니다. 당신의 하녀.”
“그래, 엘리스. 여자 기숙사에는 무슨 일이야?”
늘 그랬듯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다. 대단히 기분이 언짢은 상태란 걸 알 수 있었다.
“아침부터 식사도 거르시고 여자 기숙사에 가셨길래, 뭘 하시는지 궁금해서 따라왔습니다. 제가 정성 들여 요리한 만찬보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대충 먹는 편이 더 좋다는 거군요?”
“그럴 리가.”
공명정대한 S급 용사님께서 A급 이하의 서민들 식사가 궁금해서 한 번 방문해본 것뿐이다.
그게 열 낼 일인가?
“아아, 이해했습니다. 시찰(視察)! 과연…. 옳으신 말씀입니다. 자고로 위에 선 자라면 아래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요.”
엘리스의 표정이 진심을 담은 미소로 환하게 바뀌었다.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뀌는구먼.
“저기, 강한수 씨. S급은 개인실에서 따로 먹나요?”
엘리스의 기세에 눌려서 얌전히 듣고 있던 팩토리아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 메뉴도 내가 정해.”
“...차별이 정말 심하네요. 개인실을 쓰는 A급이면 기숙사 생활에선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멀쩡한 식당 놔두고 숙소에 부엌이랑 요리사가 따로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밖에서 4층이 보이잖아?”
“커튼에 막혀서 내부는 안 보여요. S급인 강한수 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모르시겠지만, 성별 상관없이 4층은 함부로 올라갈 수 없어요.”
“그랬군!”
팩토리아 말마따나, 내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규칙이었다.
*
“수컷! 감히 나를 건드린 각오는 됐겠지…!?”
내가 A급 이하만 먹는 누추한 식사를 마치고 여자 기숙사를 빠져나올 때였다.
추녀B가 동료들이랑 기숙사 정문(正門)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대충 500명쯤 하는 것 같았다.
S급 숙소 내부가 궁금하다면서 쫓아온 팩토리아가 말했다.
“캐서린이 여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정말로 여성의 왕이라서가 아니라, 여자 기숙사의 실세이기 때문이에요. 가진 능력보다 선동을 매우 잘하거든요. 그녀에게 대항하면 누구든 고립되고 말아요.”
“너처럼?”
“지금처럼요. 진심으로 캐서린을 따르는 용사는 극소수지만, 그녀의 선동으로 대세를 따르는 거죠.”
“선동이라….”
나는 추녀B의 능력치를 보았다.
▷종족: 그랜드 휴먼
▷레벨: 999+
▷직업: 투사(위기→투기↑)
▷스킬: 투기Z 매력SS 선동SS 돌격S 내성S…
▷상태: 격분, 득의, 신수
일반영역 상위등급 스킬이 공백인 것으로 보아선, 초월영역 스킬을 획득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닥치고 돌격하는 전장의 여신 흉내인가?
추녀B가 보유한 신수에는 살짝 흥미가 있었지만, 처녀만 태운다는 유니콘이 소환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세상에 좋은 신수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최약체 유니콘이라니….
“수컷. 마지막 경고야.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이 여왕님의 구두를 핥는다면 용서해줄게. 아까는 기습으로 나를 이겼을지 모르지만, 그런 꼼수는 이제 안 통해.”
“거참….”
내 능력치를 보고 만만하게 본 건가?
교직원 일동의 교육방침에 최대 실수가 있다면, 그건 상대를 능력치로 평가하는 습관을 심어준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편리하니까.
“용사님. 이 경우에는 정당방위에 해당합니다. 점수에는 악영향이 없으며, 승리하면 급수에 긍정적인 평가를…. 글쎄요. 상대가 너무 오합지졸이라 평가가 될지 미지수네요~”
눈치 빠른 S급 하녀 엘리스가 당장 필요한 정보를 알려줬다.
즉, 거리낄 게 없단 말이지?
나는 손바닥 뒤집듯 블랙박스를 해방했다.
비열하고 치사한 우정의 힘은 실수로 이길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진정한 선동을 가르쳐주겠다.
“네가 여왕이면 나는 마신(魔神)이다.”
▶종족: 네츄럴 스피릿
▷레벨: 5085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영재ZZ 신성Z 마기Z 악령MAX 패기MAX 축복MAX 몰살MAX 사랑MAX 우정MAX 희망MAX 날조MAX 혼돈MAX 파괴MAX 내성MAX 근력MAX 맷집MAX 민첩MAX 투기MAX 오감MAX 검술MAX 광기MAX 비행MAX 불굴MAX 희롱MAX 권투SSS 검기SSS 학살SSS 심판SSS 불사SSS 격투SSS 체술SSS 불로SSS 영생SSS 근성SSS 탐색SSS 조화SSS 체력SSS 협상SSS 색적SSS 망각SSS 회복SSS 거래SSS 인내SSS 활력SSS 선동SSS 저항SSS 기력SSS 재생SSS 면역SSS 냉정SSS 철벽SSS 금강SSS 지력SSS 도발SSS 정력SSS 투시SSS 거래SSS 지진SSS 겁화SSS 태풍SSS 홍수SSS 평정SSS 채광SS 농사SS 요리SS 제련SS 채집SS 행운SS 낚시SS 수영SS 사육SS 교감SS···
▷상태: 성검, 성녀
하지만 이 마왕은 선량한 용사를 해치지 않는다.
비주얼도 사악함이랑 거리가 멀었다.
좌우에서 아름다운 천사들이 축복해주고, 진짜 왕자였던 친구와 용사가 호위를 맡았다. 그리고 악마의 천적인 퇴마사까지.
누가 나를 마왕이라고 생각할까!
▷서론: 늠름하고 씩씩한 용사님들. 축제는 즐거우신가요? 저희는 용사님들이 앞으로도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답니다.
▷본론: 최초의 용사에게 패배하고 봉인된 적 있었던 마왕 페도나르는 용사님들의 힘을 두려워해요. 그래서 마왕은 용사님들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기숙사를 습격하기로 했어요! 세상에! 어쩜 그렇게 끔찍한 계획을 세울 수가!
기숙사에 마왕이 나타났다고?
그 신사적인 마왕님은 여기까지 아르바이트를 뛰는 건가….
▷결론: 마왕의 침공을 저지한 용사님들 중에서 공헌도가 가장 높은 다섯 분에게는 푸짐한 상품이 기다리고 있으니 놓치지 마세요! 아차! 마왕이 어디에 있냐고요?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화살표로 마왕 페도나르의 위치를 표시해놨습니다.
하늘…?
화살표가 내게 삿대질하고 있었다.
“...엘리스, 빨리 해명해봐.”
“그, 글쎄요? 시간과 예산이 부족해서 착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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