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회차] 님이 왜 여기서 나와?
“강한수 졸업생님이 받으신, 물리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멀쩡한 졸업생을 시스템 오류로 왕따 시킨 것에 대해서 윗분들이 깊이 반성하고 있대요. 강한수 졸업생님의 능력이면 10만 점은 금방이지만, 축제에 간섭할 수 없는 윗분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성의….”
“1위라니…!”
“그렇다고 방심하시면 안 돼요. 졸업생들의 성장추세를 기반으로 짠 통계에 따르면, 1년 안에 2위에게 따라잡히실 거예요. 강한수 졸업생님이 아무것도 안 하신다는 가정하에.”
이대로 가다간 중등교육과정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으로 정신공황이 올 뻔했던 나는, 깊이 심호흡하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다.
당장 오늘 점수를 결산하는 건 아니잖은가?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후후! 면죄부를 받은 느낌인걸.”
점수가 넘쳐난다.
무기징역과 벌금형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초법적인 존재가 되면 딱 이렇지 않을까.
당장 숙소를 나가서 점수가 다 내려갈 때까지 깽판을 치는 것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나는 행운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는 마음에 드시나요?”
“아직 안 써봐서 모르겠네.”
점수를 잃더라도 사람마저 잃으면 안 된다.
보건 선생님은 내게 호의적이다.
교단이 썩었다면 나만의 보건 선생님이 돼주겠다는 백지 수표를 던졌다. 게다가 이렇게 훌륭한 선물까지 보내줬는데, 뒤집어엎는 건 예의가 아니다.
차려진 밥상에는 숟가락을 얹는 게 인지상정.
나는 엘리스에게 다가갔다.
“행운을 저에게 시험해보실 생각이신가요?”
“일단 저지른 후에 대충 10만 점쯤 반납하면 되나?”
“후후! 그럴 리가요.”
내게 바짝 밀착한 엘리스가 가슴을 맞대며 덧붙였다.
“강한수 졸업생님은 이 방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윗분들은 5일 동안 무조건 방에만 있으라고 했죠. 저는 그때까지 당신이 지루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맨입으로?”
나는 세계에서 1위를 달성한 용사님이다.
굉장히 비싼 몸이다.
“그러면 우선 입부터 시작할까요?”
“좋지.”
우리는 입술과 혀를 맞대고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굉장해.”
행운의 반지는 정말 굉장했다.
변화무쌍한 내 손가락 굵기에 맞춰서 사이즈가 바뀌는 건 기본이고, 착용감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이것저것 실험해봤지만, 도중에 반지를 착용했다는 사실마저 망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런데 이 좋은 반지가 일회용도 아니었다.
밤새 만지작거렸는데도 망가지지 않았으며, 세상을 살다 보면 손때처럼 묻어날 수밖에 없는 것들도 닦였다.
침대만 과학인 게 아니군.
나는 행운의 반지를 내 보물 목록에 넣었다.
“제 사견으로는, 반지보다 강한수 졸업생님이 더 굉장하신데요. 이렇게 지쳐서 뻗어버린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엉덩이에서 불이 날 것만 같아요.”
침대 위에 알몸으로 드러누운 엘리스가 배시시 웃으며 내 중얼거림을 받았다.
나는 답하지 않고 창문의 커튼을 젖혔다.
아름다운 햇살이 나를 맞이했다.
현재, 나는 그대로 끼고 잠든 행운의 반지 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여기가 4층이었다면 기숙사 밖에서 내 알몸이 적나라하게 보였겠지만, 이곳은 5층이었다.
어젯밤,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직전에 “5층이 대화하기에 더 좋아요.”라는 엘리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다.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덩굴을 엮어서 만든 녹색 전통의상을 입은 십여 명의 요정 여성이 꽃과 나무로 가득한 넓은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그 정원 중앙의 수영장에는 먹음직스럽게 생긴 전라의 인어들이 물가에서 일광욕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들은 오일을 바른 것처럼 번들거리는 알몸을 가리긴커녕 양팔을 활짝 벌리고 손짓했다.
“...그래도 저건 좀 많은걸.”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서 53년을 보낸 S급 용사님은 지상전, 수상전 가리지 않지만, 일대일을 선호한다.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댄 나는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Unirrrr~!”
“Siiiil….”
정원 구석에 자리한 마구간에는 순백의 유니콘과 은색 비룡(飛龍)이 매여져 있었다.
저 둘은 MAX급 숙소를 이용하는 용사님에게 기본적으로 배정되는 탈것이고, 본인이 길들인 애완동물을 추가로 맡길 수 있다.
관리는 당연히 이곳에 상주하는 요정들이 한다.
“흠…. 쑥떡이 들어가기엔 너무 작나?”
땅! 땅! 땅! 땅!
모루 두드리는 소리가 리듬을 타듯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방음벽에 막혀서 보통은 안 들리지만, 내 청력과 촉각은 범인의 기준치를 넘어서서 박쥐와 돌고래의 초음파 수준이다.
난쟁이가 숙소의 공방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모양이다.
나를 뺀 유일한 남성일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난쟁이는 남성밖에 없는 종족이기에 성별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려나.
망가진 장비 수리는 기본. 재료를 주면 원하는 걸 무상으로 만들어준다고 한다.
“강한수 졸업생님. 먼저 씻고 아침을 준비해도 될까요? 물론, 오늘부터는 제가 요리하지 않습니다. 저는 5층 숙소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의 역할과 업무를 대처할 순 있지만,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편한 대로.”
“감사합니다. 아침은 무엇으로 드시겠어요? 딱히 생각나시는 게 없으면 요리사 추천메뉴로 준비하겠습니다.”
“추천으로.”
“네. 강한수 졸업생님의 옷은 침대 위에 올려놓겠습니다. 취향을 몰라서 제 임의로 고른 점, 양해 부탁합니다.”
“그 정도쯤이야.”
판타지 세계의 파격적인 귀족 복장도 소화해낸 나다. 어떤 옷이든 당당히 입을 자신 있다.
옷걸이에도 자신 있고.
침대 밑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운 엘리스는, 알몸을 가릴 생각도 안 하고 훤히 드러낸 채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이며 옷장처럼 바로 옆에 붙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 요염한 뒤태를 보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반점 하나 없는 뽀얀 피부의 절세미녀가 몽고점처럼 엉덩이만 퍼렇게 물든 나체로 걸어가는 모습이란….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넓긴 더럽게 넓네.”
나는 용사 페스티벌에 강제로 참가한 수천 명의 졸업생이 생활하는 기숙사의 한 층을 통째로 차지한 상태다.
아니, 세세하게 따지면 두 층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인어가 여유롭게 헤엄칠 수 있을 만큼 수영장의 수심이 깊어지려면 1~2m로는 어림도 없으니까.
하물며 수영장 물이 건물을 누르는 하중을 견디려면 벽과 바닥도 두꺼워야 한다.
즉, 내가 있는 곳은 5층이 아닌 6층 옥탑방이다.
이 아래가 5층이며, 내 옆에서 시중드는 엘리스를 제외한 사용인들의 숙소도 5층에 있다.
5층은 굉장히 단순하다.
개인 수련장과 수영장이 거의 모든 면적을 차지한다. 그리고 혼자 이용하기엔 아까운 그럴싸한 식당이 있다.
나는 정원 감상을 마치고 침대로 걸어갔다.
엘리스가 추천한 옷은 무난했다.
소매가 넓고 금색 수실로 등판에 용이 양각된 곤룡포. 황제가 입기에 딱 좋은 실내복이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로군!”
이 숙소만큼 호화찬란하다.
엘리스가 추천해준 옷은 고급 호텔에서 지급하는 목욕 가운이랑 입는 방법은 비슷했다. 몸에 걸친 후에 혁대 대신 간편하게 달린 끈을 매듭지으면 끝.
속옷은 놀랍게도 없었다.
행운의 반지를 낀 손가락을 가려줄 황포(黃袍)를 입은 후, 나는 성녀H와 쑥떡을 소환했다.
정령들은 자연스럽게 딸려오는 덤이다.
“주인님이 전투도 아닌데 불러주신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인간형으로 변신한 쑥떡의 손을 잡은 채 소환된 성녀H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새침한 어조로 말했다.
“어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혼자 자게 될 것 같은 날에는 그녀를 항상 불렀다.
“애초에 수면이 워낙 없으시잖아요.”
“그건 할 말이 없네.”
나는 수면이 필요 없다.
포유동물임에도 물속에서 태어나고 죽는 고래랑 비슷하다.
고래는 호흡을 위해 수시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없다.
잠든 사이에 익사하면 큰일이잖은가?
그래서 고래는 좌뇌와 우뇌가 번갈아 가면서 휴식을 취하는 탓에 거의 평생을 몽롱한 상태로 수면 없이 산다.
나도 고래랑 비슷했다.
다만, 나 같은 경우에는 뇌에 피로가 쌓이는 속도보다 회복이 더 빠른 덕분에 좌뇌와 우뇌를 나눌 필요가 없다.
그런 것치고는 꽤 여러 차례 필름이 끊겼지만!
그래도 내가 가끔 자는 이유는?
찰진 리듬을 타고 기분 좋게 잠든 날에는, 내가 아름다운 녹색별 지구에서 문화시민으로 영위하는 행복한 꿈을 꾸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도 좋은 꿈을 꿨다.
귀여운 젖먹이 손녀를 안겨드렸더니, 야차(夜叉) 같던 어머니의 표정이 성모(聖母)처럼 사르르 풀리면서 테니스라켓을 내려놓으셨다.
“아버지. 정원에 가봐도 될까요?”
꼬박꼬박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쑥떡이 묻는다.
덩칫값 못 하는 새끼용에게 대답해주기도 귀찮았던 나는 망아지를 내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어머! 귀여운 아이가 있네!”
“이름이 뭐야?”
“주인님이랑 관계가 어떻게 돼?”
“아직 어려서 아쉬운걸….”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공중정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요정과 인어들이 쑥떡을 발견하고는 야단스럽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꼬락서니를 보았다.
“커서 뇌비우스 2세가 될 아이가 멍청한 물고기랑 평평한 모니터에 둘러싸여서 허둥대는 꼴이라니….”
대단히 못마땅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아이에게 공부를 억지로 시키면 반발하잖는가? 판타지 세계에 흩어져 사는 마룡과 악룡들의 멋진 모습을 꾸준히 본다면 자연스럽게 닮을 것이다.
어제 만난 마룡은 그 칭호가 아까웠다.
아직 10살도 안 되는 달걀 비린내 나는 꼬맹이에게 패배하고 빛처럼 도망치다니!
마룡의 수치다.
“주인님. 슬슬 식사하러 가심이 어떤가요?”
“아아, 그랬지.”
요정과 인어들이 뺨을 문대며 성희롱하는 줄도 모르고 해맑게 웃는 쑥떡을 보고 있던 나는 성녀H의 제안에 고개를 끄떡였다.
수면처럼 식사도 내게는 필요 없다.
하지만 혀가 즐겁잖은가?
나는 아래층으로 혼자 내려가기로 했다.
성녀H와 쑥떡, 정령들은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유시간을 줬다.
나 혼자 쓰기엔 너무 넓었으니까.
5일 동안 본전 뽑으려면 인원수를 늘릴 필요가 있다.
*
5층의 식당은 공중정원보다 멋졌다.
유리로 된 한쪽 면이 수영장 물속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아쿠아리움의 카페에 온 기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영락없는 비린내 나는 물고기지만, 발랑 까진 입 다물고 얌전히 물속을 헤엄치는 인어들의 모습은 관상용 열대어처럼 순수하게 아름답고 우아했다.
평소에도 저럴 것이지.
인간 수컷만 보면 비린내 풍기며 발정해서….
찰싹!
찰싹!
잘 헤엄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투명한 유리 벽에 몸을 바짝 밀착하는 인어들.
예쁜 얼굴과 풍만한 가슴이 벽에 가로막히면서 빈대떡처럼 눌렸다.
역시, 인어가 그러면 그렇지.
“용사여. 식당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가?”
“방금까진 좋았는데……. 음?”
우아한 열대어에서 횟감용 넙치로 이미지가 빠르게 망가지는 인어들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나는, 뒤편에서 들려온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잽싸게 돌아선 나는 한순간 숨이 멈췄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볼 수 있는 순백의 턱시도. 그 남자의 검은색 머리카락과 불그스름한 피부랑 묘하게 어울렸다.
인어들이 나 때문에 먹이 앞의 금붕어처럼 흥분한 게 아니다.
바로 이 사내 탓이다.
“마왕님이 왜 여기에…?”
마왕 페도나르.
으리으리한 성의 옥좌에 앉아서 용사가 오길 기다리던 악마의 왕이 역으로 먼저 찾아왔다.
내 53년 경력을 통틀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여긴 판타지아 대륙도 아니거늘.
자연스럽게 식탁 의자에 앉으며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살짝 헐렁하게 푼 마왕님이 말씀하셨다.
“그대가 마왕 행세를 하는 바람에 실업해서 갈 곳을 잃었다.”
아, 네. 왠지 애잔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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