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회차] 만류귀종(萬流歸宗)
마왕에게는 마왕의 역할이 있다.
무대 뒤편에서 자기가 나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마왕 페도나르는, 짝퉁의 등장으로 역할이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나로선 이해가 안 됐다.
“짝퉁이 좀 설쳤다고 마왕이 갈 곳을 잃는다는 건 이상합니다만…?”
누군가 왕을 사칭한다고 해서, 진짜 왕이 궁궐에서 쫓겨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마왕님은 뭘까?
“짐이 평범한 마왕이었다면 그렇겠지.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든 말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주위에서 지탱해줄 테니. 하지만 짐은 왕이 아닌 무대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감독 겸 PD인 판타지 신이 짠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악역 배우.
건방진 용사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뒤에서 흉계를 꾸미고 군단을 키우긴커녕 멀뚱멀뚱 서서 쓰러질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제가 생겼다.
시스템 오류로 대기석에서 쫓겨난 것!
대본을 암기하고 있던 배우는 영문도 모른 채 길거리로 내몰렸다.
“조금 미안하게 됐네요.”
용사가 마왕에게 왜 사과해야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살짝 들었지만,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남의 직장을 빼앗은 건 틀림없었다.
“상관없다. 짐도 대기하고 있던 누추한 단칸방보다 이곳이 훨씬 마음에 드니. 참고로, 짐은 무단침입한 무뢰배가 아니다. 이번 페스티벌이 끝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안 들키고 숨을 장소가 이곳밖에 없어서 오게 된 것이다.”
“확실히….”
마왕 페도나르가 대륙 어디에 숨든 졸업생이랑 마주칠 가능성이 0%인 건 아니다.
하지만 기숙사 4층과 5층은 예외다.
S급 이하의 용사는 아예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여기에 의문을 품는 졸업생은 없으며, 몰래 들어오고 싶어도 ‘시스템’으로 차단되어 있어서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시스템.
게임 캐릭터 같은 능력치부터 시작해서 초현실적인 무언가로 세계는 보호 혹은 통제를 받고 있다.
여기도 그런 시스템의 영향권 중 하나다.
허가받지 않은 자가 4층, 5층으로 접근하면 기숙사 후문으로 추방당한다. 하늘로 날든 땅으로 기어오든 몰래 접근하든 뭐든 간에….
그런고로 마왕님은 그 시스템의 허가를 받고 들어온 셈. 아니면 그 시스템조차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라.
무시무시한 마왕이 용사들의 기숙사를 습격했는데, 위풍당당하게 4층 계단을 오르다가 밖으로 추방된다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그래서 허가증을 줬을 확률이 매우 높다.
“용사여.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그대가 기억하는 마왕 페도나르가 아니다. 수없이 나뉜 영혼의 조각 중 하나일 뿐. 그나저나 흥미롭군. 어떤 용사가 마왕 행세를 하는지 궁금해서 와본 거였는데, 짐의 사위였을 줄이야.”
“누구 멋대로 사위야!”
“그대의 영혼에 짐이 그렇게 써놨다.”
“누구 멋대로 낙서야!”
“재차 말하지만, 짐이 쓴 게 아니다. 또 다른 짐이 그대를 사윗감이라고 판단해서 쓴 거지. 하지만 허투루 생각하진 않는다. 짐은 짐을 신뢰하기에. 그러니 장인어른이라고 불러도 좋다.”
“누구 멋대로 장인이야!”
예전에도 초면에 사위 타령을 했었다.
그게 내 영혼에 ‘얘는 내 사위. 찜!’이라고 써둔 탓이었다니!
누군가 그걸 본다면, 나는 평생 장가 못갈 것이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저주가 있을 줄이야!
“사위가 수줍음이 많군. 쏘시아의 취향은 귀여운 남자였나? 허어! 아비로서 실격이야. 여태 그것도 몰랐다니.”
“돌겠네….”
“일단 밥부터 먹고 이야기하지. 절대로 죽거나 소멸하지 않는 짐이 할 말은 아니지만, 다 살자고 하는 일이지 않은가?”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
우리의 눈치를 보면서 대기하고 있던 천사 요리사가 다가왔다.
“첫날이라서 아직 강한수 졸업생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메뉴를 제가 임의로 골랐습니다. 아침은 훈제연어와 키위드레싱 샐러드, 슬라임 감촉 푸딩, 만드라고라(Mandragora) 주스입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 하물며 마왕이랑 한 테이블에 앉은 내게 천사 요리사가 메뉴를 설명했다.
지금부터 요리하겠다는 게 아니다.
일정 공간의 시간을 멈춘다는, 고차원적인 마법으로 보존해둔 요리를 내놓는 것이다.
뿅! 뿅! 뿅!
아침 식사가 테이블 위에 접시째 소환됐다.
요리사보다는 요술사 같다.
천사의 외모 또한 요리 관련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 주연배우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엄연히 눈앞의 천사가 만든 음식이다. 화려한 데코레이션만 보더라도 상당히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으리라.
“좀 많은데?”
내 위장은 블랙홀이나 다름없어서 문제없지만, 먹다가 질려서 물릴 것 같은 양이었다.
요리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남으면 저희끼리 나눠 먹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무조건 남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드시고 싶으신 만큼만. 그래도 만드라고라 주스와 슬라임 감촉 푸딩은 꼭 드시길 바랍니다.”
“오! 자신작인 모양이군.”
내가 대답한 게 아니다.
나랑 눈이 마주친 마왕님이 포크를 들며 이어서 말했다.
“용사여. 사양하지 말고 들게.”
“쯧.”
집주인보다 더 자연스럽게 권하는 모습이 영 못마땅했지만, 마왕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
사랑하는 가족을 죽인 원수도 아니잖은가? 보자마자 핏대 올리며 다짜고짜 칼부림할 이유는 없었다.
우선은 먹고 이야기하자!
나는 샐러드에 곁들여서 훈제연어를 조금 먹은 후,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반투명한 푸딩을 젓가락으로 콕콕 찔러봤다.
말랑말랑~
“오….”
천사 요리사의 호언장담대로였다. 슬라임의 감촉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디저트였다.
맛도 굉장히 훌륭했다.
그러나,
“내 입맛에는 좀 달군. 슬라임 같은 감촉을 내기 위해서 로맨시아(Romanceia) 꿀을 너무 넣었어. 하지만 이 레시피는 정말 놀라워. 디저트에 우주 3대 진미를 넣다니.”
푸딩을 한 입 떠먹은 마왕은 예리한 눈빛으로 음식평을 내렸다.
“그것을 알아보다니…! 요리한 보람이 있군요.”
천사가 날개를 팔랑거리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 음식평은?
“몰랑거리면 더 좋을 텐데….”
마스터 몰랑의 그 환상적인 감촉이 그리웠다.
나도 전문적인 음식평을 할 줄 안다.
판타지 세계의 야만인들에게 무식하다는 소리를 안 들으려면 귀족들의 사교모임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마왕님과 천사의 이야기만 살짝 들어봐도, 내가 모르는 고유명사의 식재료가 상당히 많았다.
원산지가 은하계 저편인 허브와 감초라니….
이럴 때는 조금이라도 아는 척하기보다는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낫다. 이것도 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슬라임 감촉의 디저트 후에 입가심으로 만드라고라 주스가 나왔다.
만드라고라.
무, 당근처럼 땅에 심어진 그것을 뽑으면, 뿌리가 비명을 지르는 판타지 세계의 식물이다.
참고로, 약재로 쓰인다.
그러니 이 만드라고라 주스도 맛을 기대하면 안 된다. 마즙 같은 영양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쭉 들이켰다.
“꺄아아아아~!”
비명이 절로 나오는 맛이었다.
맙소사! 오! 빌어먹을 신이시여! 세상에 어찌 이런 맛을…!
함께 마신 마왕님은?
“목청이 좋군.”
거의 동시에 들이켠 줄 알았는데, 먹는 시늉만 하고 주스 잔에서 입술을 뗀 마왕이 껄껄 웃었다.
*
식사 후.
마왕님이랑 거실에서 대면했다.
그는 혼자였지만, 내 뒤편에는 성녀H와 잡것들이 서 있었다.
정령들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마왕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지만, 나는 전부 입 다물도록 명령했다.
“사위여. 모든 마(魔)의 정점인 짐이 할 말은 아니지만, 부하들을 너무 험하게 다루는군. 그러다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당하는 수가 있지.”
“상관없어.”
태어난 걸 후회하게 해줄 테니.
전원이 배신해서 고립돼도 이길 자신이 있기에 놔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령으로 임명하지도 않았다.
“쏘시아의 취향을 정말 모르겠군….”
“이보쇼, 마왕님. 당신의 따님이 뭐라고 하든 간에 나는 사위가 될 마음이 없습니다.”
“그건 자네의 뜻이겠지?”
“네.”
“그러면 상관없네.”
“...네?”
“짐에게도 딸아이를 아끼던 시절이 있었네. 내 딸을 데려가고 싶으면 짐을 이기라고 패기를 부리던 때가. 하지만 그 패기와 사랑도 세월 앞에 무너졌지. 지금은 제발 좀 결혼해서 귀여운 손자 하나만 품에 안고 왔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심정이야.”
“아, 네.”
마왕 페도나르의 이웃집 사업가 같은 외모 때문에 나이를 깜빡했다.
그의 종족은 최초의 악마.
그렇다면, 현생인류의 시조인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보다 더 오래된 원시인이 아닐까?
이팔청춘 10대인 나로선 잘 모르겠다.
“최초의 천사랑 우주의 패권을 놓고 다투거나 봉인을 풀고 복수한다는 집념도 전부 한때였을 뿐. 현재의 짐에게는 딸아이를 시집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없네. 세월이 흐르면 어련히 좋은 남자를 찾아서 결혼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안 하더군.”
“사족이 기네요.”
정말 쓸데없는 잡소리다.
“성급한 용사여! 그대도 언젠가 겪게 될 거라고 장담하지. 하지만 짐도 젊은 시절에는 이 문제를 하찮게 여겼으니 더 말하지 않겠네. 자! 그러면, 더부살이로서 밥값쯤은 해야겠지. 뭐든 물어보게.”
“차원을 넘는 방법.”
“참 뜻밖의 질문이군. 세계의 진실이나 판타지 신의 정체를 물어볼 줄 알았는데.”
“나는 실용주의자라서.”
그딴 거 알아서 뭐하게? 면접이나 수능시험에 나오나?
내게 지구로 돌아가는 일보다 중요한 건 없다.
“악마가 차원을 넘는 보편적인 방법쯤은 알지. 하지만 이걸 이해하려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부터 알아야 해. 즉, 세계의 진실에 접근할 필요가 있지.”
“자동차의 역사를 몰라도 운전은 할 수 있습니다만?”
“하지만 도로주행법은 알아야지. 안 그런가?”
“......”
밉살스럽게 웃는 마왕에게 앞에서 내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어떻게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의 마왕님이 도로주행법 같은 걸 아는지 의문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던 탓이다.
“짐은 우주의 시커먼 암흑물질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최초의 생명체. 그리고 누이는 초신성의 찬란한 폭발 속에서 살아남은 최초의 생명이었지. 여기에 악마와 천사란 명칭은 아주 먼 훗날에 붙여진 거네. 전쟁에서 승리한 종족에게는 고결한 천사, 패자에게는 비열한 악마. 역사는 승자가 쓰는 법이니.”
“판타지 신이 최초의 천사?”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대답이 영 시원찮았지만, 마왕님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 정보인가?”
“이걸 알아야 다음 진도로 넘어갈 수 있네. 학창시절에 공부를 못 했을 것 같군.”
“평균은 했습니다만!”
“그냥 해본 소리였네. 손자는 자네의 성격을 닮아서 귀엽고 능력은 쏘시아를 닮아서 분명 똑똑할 거야. 하하!”
“이 인간- 악마가 진짜…!”
...우리는 한참 뒤에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짐이 누이를 제치고 우주의 패권을 노리던 시절. 두 번째로 태어난 어둠의 아이가 짐에게 반항했네. 그래, 그 아이가 쏘시아지. 우주의 지배자 같은 무의미한 짓은 그만두고 조용히 살자는 제안이었는데…. 짐도 그때는 어렸네.”
그 결과.
최초의 천사와 두 번째 악마가 공모하게 됐다.
빛과 어둠.
두 힘이 처음으로 합쳐진다.
이건 실로 놀라운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공식으로 ‘1+1=2’이지만, 우정의 힘은 ‘1=1=3’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상반된 두 힘의 결합은‘1+1=10’이란 터무니없는 계산법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힘을 온전히 받아들인 괴물이 탄생했네.”
“최초의 용사?”
“맞네.”
최초의 용사는 실로 무쌍이었다고 한다. 우주의 패권을 노리던 마왕마저 ‘혼자’ 고꾸라트릴 만큼.
똑같이 힘을 받은 동급생과 선생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능력치의 기원이지.”
“흐음…. 그러면 내 능력치도 회수할 수 있습니까?”
“갑자기 말투가 정중해졌군.”
“속물이라서.”
“하하! 솔직해서 좋군! 귀여워. 정답부터 이야기하자면, 회수는 어렵네. 최초의 천사도 그건 마음대로 못해. 재차 말하지만, 능력치는 빛과 어둠이 합쳐져서 탄생했네. 짐에게서 빼앗은 어둠을 남들에게 나눠줄 순 있어도 돌려받진 못하지. 어둠이랑 섞인 빛도 마찬가지고. 능력치를 회수하려면 짐의 동의가 꼭 필요하네.”
하지만 가능성이 0%는 아니었다.
즉, 능력치를 쭉 유지하려면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
최초의 천사, 최초의 악마.
둘 모두에게 미움받으면 능력치도 잃기 때문이다.
대신에 한쪽이라도 호의적이면 능력치를 잃을 걱정이 사라진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정치질은 필요하겠지만.
“그래서 차원이동은?”
“집요하군.”
“얼른 가르쳐주십시오!”
“지금까지 무얼 들은 건가? 자네가 정상적으로 차원이동하려면 짐에게서 어둠의 힘 대부분을 빼앗은 누이의 동의를 꼭 얻어야 하네. 스킬 형태로 만들어진 통행증을. 그것만이 능력치랑 똑같은 시스템으로 보호받는 이 세계를 탈출할 유일한 방법이지.”
“아…!”
바로 어제 보았었다!
피자 배달부.
그는 피자집 사장님에게 차원이동 권한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사장님은 누구에게 그 권한을 받았을까?
판타지 신.
아주 간단한 논리이자 이치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나 들으려고 마왕의 쓸모없는 사족을 참아준 게 아니거늘….
“또 다른 방법도 있지.”
“오! 뭡니까?”
“...사위에게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대는 정말 멍청하군. 지금까지 짐의 이야기를….”
“그거야 어쨌든!”
“능력치의 제작자는 둘이라고 했네. 짐은 능력치 프로토타입인 최초의 용사에게 패배한 후에 힘을 빼앗긴 것뿐이고.”
“아! 쏘시아…!”
이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마왕님.
지금까지의 설명은 전부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한 사족이고, 이게 본론임이 틀림없다.
내가 봤다.
“그러니 결혼하게. 분명히 후회하지 않고 행복할 걸세.”
실로 놀라운 만류귀종(萬流歸宗)이었다.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