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회차] 이 벽을 부숴봐!
능력치를 조작한다!
그야말로 ‘게임 마스터’ 같은 절대적인 권한이었다.
남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경지를, 키보드 버튼 한두 번 누르는 것만으로 따라잡는 불합리의 극치.
하지만 그게 게임이고, 그게 판타지였다.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의 차별성과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사의 특전인 ‘경험치 500%’도 굉장한 특혜에 해당했다.
그러니 용사들은 이 불합리한 설정에 불만을 토로해선 안 된다.
물론,
“정치질로 가득한 쓰레기네…!”
나는 해야겠다.
판타지 신이나 쏘시아에게 아양 떠는 연놈들은 아무리 병신이라도 능력치는 우수해질 수 있다는 뜻이잖은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뭘 걱정하는가? 남들이야 어찌 됐든 내 마누라가 게임 마스터면 그만인 것을. 그러니 결혼하게.”
“결혼 타령 좀 그만~!”
“딸아이 시집 못 보내서 한 맺히면 다 이렇게 돼. 그대도 결혼해서 나이 먹으면 다 알게 될 거야.”
이런 무의미한 대화도 계속되진 않았다.
우리는 좀 더 건설적인 내용으로 넘어갔다.
바로 탈출에 관한 거였다.
“가출해서 새살림을 차린 최초의 용사는 짐이 봉인을 풀고 나오는 걸 대단히 꺼리는 모양이군. 100레벨 용사를 키워서 잠복해두다니. 용사답지 않은 비겁한 방법이야.”
마왕님은 요정 용사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그거 때문에 손해가 막심합니다. 보상해주십시오.”
나는 일전에 졸업해서 지구로 귀환했었다.
하지만 선배 용사님께서 사람을 착각하시는 바람에 사망,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담아서 “응애!”라고 외쳤었다.
지금도 잊지 못할 트라우마다.
“사위. 가족끼리는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걸세.”
“은근슬쩍 가족에 넣지 마세요.”
“뭐…. 아직 합방도 안 했으니 그렇다고 해두지. 보상이라…. 주고 싶어도 힘을 다 빼앗기는 바람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군. 그대는 실업자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닌가? 고블린에게 여자를 내놓으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어.”
몬스터인 고블린도 남성밖에 존재하지 않는 종족.
그렇기에 ‘여자’가 늘 귀하다.
“주실 거 없으면 노숙하십시오.”
“용사가 어찌 이리도 박정하단 말인가?! 잠시만 기다려보게! 짐에게도 생각할 시간쯤은 줘야 할 것 아닌가?”
슬라임처럼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상체를 기댄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마왕님.
그렇게 대충 10분쯤 흘렀을까?
그가 굳게 닫혔던 입술을 열며 말했다.
“최초의 용사가 100레벨짜리 용사를 준비했듯이, 짐도 녀석에게 한 방 먹여주려고 고안한 기교가 있지. 능력치로 설명할 수 없는 힘. 최초이기에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는 특이점을 응용한 것이라서, 필멸자(必滅者)인 그대가 익혀도 괜찮을지 걱정이군.”
“일단 가르쳐주십쇼. 쓸지는 제가 판단할 테니.”
사용하면 반드시 죽는 기술인가?
핵무기처럼 무조건 한 놈을 끌고 갈 수 있는 기술이라면 절대 나쁘지 않다.
자살하겠다는 게 아니다. 이런 게 있으면 “나를 건드리면 절대 무사하지 못한다!”라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마왕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귀엽기만 한 줄 알았는데, 패기도 제법 있군. 쏘시아가 좋아할 만해.”
“이상한 소리는 됐습니다.”
“하하! 그러면, 우선 장소부터 옮길까?”
*
기숙사에 단 하나뿐인 MAX급 숙소에는 개인 훈련장이 있는데, 창문 하나 없는 내부는 아무리 강력한 공격에도 끄떡없는 특수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오! 자네도 아르바이트 중이었군.”
“마왕님…! 그 기백 없는 복장은 뭡니까! 아니, 그보다 어째서 마왕님께서 용사들의 소굴에?!”
훈련장에는 샌드백으로 내정된 악마가 있었다.
쇠사슬로 바닥이랑 발목을 연결한 족쇄가 양발에 채워져 있고, 수갑이 채워진 양팔 또한 천장이랑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저항은 일절 불가.
또한, 겉보기엔 가녀린 미모의 여성. 게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일방적으로 때리기엔 이래저래 꺼림칙했다.
“엘리스. 아무리 그래도 무력화된 악마를 샌드백으로 쓰는 건, 용사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나는 MAX급 숙소를 총괄하는 하녀에게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돌아온 대답은 더욱 상식적이었다.
“용사가 악마를 공격하는 데 의문이 필요할까요?”
“...그렇군.”
흑백으로 나뉜 가치관.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다운 상식이다.
“물론, 강한수 졸업생님의 의문처럼 예외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쁜 악마는 갱생해서 하렘에 넣겠다는 단순한 욕망 덩어리의 용사들은 논외로 치고, 중등교육과정에서 그걸 전문적으로 배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초등교육과정이니까요.”
“선행학습도 안 되나?”
“그건 강한수 졸업생님의 판단대로 하세요. 당신은 이미 초등교육과정을 무사히 이수하신 S급 용사님이십니다. 당연히 적대해야 할 마왕이랑 예민한 주제로 대화하시는 중임에도 제가 간섭하지 않는 것이 답변을 대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내가 엘리스랑 대화하는 사이.
마왕님도 구면으로 짐작되는 옛 부하랑 이야기가 정리돼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종족: 그랜드 데몬
▷레벨: 999+
▷직업: 근위병(호위→피해↓)
▷스킬: 맷집ZZ 재생ZZ 불굴Z 면역Z 마기Z…
▷상태: 속박, 봉인
스킬 구성이 보건 선생이랑 다른 의미로 딴딴한 악마였다. 내가 밤새도록 성문을 두드려도 신음 한 번 안 흘릴 것 같았다.
괜히 샌드백으로 선정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기사도 아닌 일개 ‘병사’가 마왕님보다 능력치 면에선 훨씬 윗줄이란 점이다. 마왕의 딸인 쏘시아보다도 강했다.
비정상적인 상하구조.
둘의 대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자네는 봉인되지 않았군. 불행 중 다행이야.”
“마왕님께서는 여전히…. 역시, 그때 천사들을 용서하지 말고 멸절시켰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비참한 사태가…!”
“짐이 무능했던 탓이지.”
“마왕님…. 꺄악?!”
애절한 목소리의 근위병 악마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챙그랑!
성검 뉴클리온이 악마의 엉덩이 탄력에 튕겨 나갔다.
탱글탱글한 연붉은색 피부에 살짝 생채기가 생기긴 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됐다.
“역시, 단단하네.”
손이 미끄러지는 정도로는 안 되는 모양이다.
“...용사여. 이 타이밍에 상대의 방어력을 테스트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 같네만.”
마왕님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핀잔줬다.
“손이 미끄러졌습니다.”
이건 내 습관의 잘못이 아니다.
상대가 대화에 한창 집중하며 방심할 때, 기습공격 하면 효과적이란 상식 탓이다.
“과연, S급 용사님! 아름다운 악마에게 일말의 양심이나 빈틈을 보이지 않는 늠름한 모습에 소녀는 탄복했습니다!”
중도적인 입장이라고 방금까지 주장하던 하녀 엘리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찬양했다.
이 악마 근위병이 훈련장에서 노예 이하의 비참한 대우를 받는 것도 그녀의 영향 탓이 틀림없다.
개인적인 원한인가?
“고대의 악마들을 수감해둔 무간지옥의 간수이셨던 제 할아버지가 이 악마에게 살해되셨습니다.”
내 생각을 읽은 엘리스가 바로 대답했다.
“그렇군.”
악의를 품을 만하네.
“아니야! 엘리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그를 죽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 마왕님의 방패가 못 되고 비굴하게 살아남았다며 모든 악마의 비난을 받던 나를 위로해준 그를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어! 제발 믿어줘!”
“그렇게나 강했던 할아버지가 복상사(腹上死)했다고, 말이죠?”
“나도 믿기지 않지만, 정말인 걸 어떡해….”
여기도 가정사가 꽤 복잡하게 얽힌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다.
“마왕님. 과거의 부하랑 오랜만에 해후해서 입이 근질근질하신 건 잘 알겠는데, 얼른 그 자살하는 기술이나 저에게 전수해주십쇼.”
“그대는 성미가 급하군.”
“인간의 수명은 찰나처럼 짧아서 그렇습니다.”
“정해진 인명(人命)이란 제약에서 벗어난 정령의 용사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군.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거두절미하게 알려주지. 우선, 저 벽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부숴보게.”
“못 부쉈다고 칩시다.”
못 부수길 기대하고 한 말 같은데.
“...그러지 말고 해보게. 시스템으로 보호받는 벽이라서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못 부수는 건 맞지만.”
“못 하리란 걸 알면서도 시키다니, 심보가 고약하시네요.”
“그대에게 고약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군! 이렇게 말할 시간에 했으면 진즉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거야.”
“쯧!”
벽 부수기를 시도해보기 전에는 안 가르쳐줄 기세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벽을 돌아봤다.
이왕 하는 거,
우우웅-!
진심으로 가보자!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응용해서 개조한 육체를 활성화했다.
과학을 기반으로 강화된 근섬유가 각종 호르몬에 찌들면서 한계마저 무리하여 돌파했다.
여기에 ‘자연인’ 종족특성인 레벨을 소모한 2차 강화.
덧셈이 아닌 곱셈으로 계산된 증폭은, 나를 평상시보다 수천 배 강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여기까지는 순간적으로 끌어올린 힘일 뿐.
준비시간까지 주어지면 더한 것도 가능하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내 몸에 달라붙어서 성희롱 중이던 다섯 가지 정령이 하나로 합쳐지며 ‘캡틴 강한수’의 힘을 끌어냈다.
중등교육과정 학생회 임원마저 한순간에 압살한….
증폭에 증폭을 얹었다.
“살짝 뻐근하네.”
녹색의 불꽃을 튀기며 성화(聖火)처럼 활활 타오르는 성검 뉴클리온을 쥔 오른손이 미세하게 덜덜 떨렸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블랙박스.
이건 순수한 내 힘이 아니지만, 그렇게 시시콜콜 다 따지면 내 대부분의 힘은 위대한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자.
우우우웅--
사방으로 위협하듯 타오르던 녹색의 불꽃이 정련된 금속처럼 성검 뉴클리온의 칼날에 깃들었다.
검의 흔들림이 사라졌다.
음양의 이치처럼 균형과 조화가 맞춰졌다는 의미.
물론, 실전에선 전혀 쓸 수 없다. 준비까지 1초 넘게 걸리는 큰 기술을 기다려주는 멍청이는 용사와 악당 정도밖에 없으니까.
“엘리스. 이 벽, 절대로 안 부서지는 거 맞지?”
“네. 고등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도 파괴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합니다. 아마, 악마들을 가둔 무간지옥의 벽보다 튼튼할걸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래?”
내가 보기엔 훈련장의 벽이 시원찮은데, 이곳 관리자가 저렇게까지 호언장담한다면 문제없을 것이다.
“이미 능력치 외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두 눈을 부릅뜬 마왕님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마왕님이 언급하신 목숨을 담보로 한 기교만큼 막강한 초필살기는 아닙니다.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과 용사 경력 53년의 노하우가 합쳐진 부산물일 뿐. 뚫려라!”
겸허하게 대답한 나는 힘찬 기합성과 함께 성검을 내질렀다.
이건 검술이 아니다.
칼끝에서 쏘아진 녹색의 빛이 벽을-
퍼어엉-!
결과는 금방 나왔다.
“아앗?! 그 방향에는 인어들이 사는 수영장이…!”
콸콸콸!
소스라치게 놀란 엘리스의 비명이 끝나기 무섭게, 수영장 물이 홍수처럼 인어들이랑 함께 훈련장으로 떠내려왔다.
“엘리스! 절대로 안 부서진다며?!”
“시간과 예산에 착오가…!”
바로 그때,
마왕 페도나르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지르며 바닥을 찍었다.
콰지직- 쿠웅!
단숨에 균열이 간 바닥이 뚫렸다. 그리고 수영장 물은 마왕이 부순 바닥의 구멍을 따라 4층으로 흘러갔다.
이 아래가 어떻게 됐을지는….
뒷수습해야 할 하녀들에게 애도를.
“맙소사! 바닥을 부쉈다고요?! 벽보다 10배는 단단할 텐데…!”
수영장 물에 홀딱 젖은 엘리스가 검은색 엉큼한 속옷이 비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넋을 놔버렸다.
그래도 해설을 제대로 해주는군.
벽보다 무려 10배!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파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왕 페도나르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능력치는 지금의 나보다 확연하게 떨어짐에도….
“갑자기 벽을 정말로 부숴서 당황했네만…. 적성이 마왕에 어울리는 용사여. 배워볼 텐가?”
“사족이 기네.”
배우는 게 당연하잖아?
아주 멋진 힘이다.
저거라면, 도덕 선생을 포함한 교직원 일동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의 디스크를 얼마든지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꼭 배우자.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