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회차] 순위는 거짓말하지 않는
“능력치는 별거 아닌- 꺄앗?!”
“이게 대체 무슨 짓…?”
“도망쳐! 누가 선생을 불러…. 컥!”
나는 F급이 바글바글한 기숙사 지하는 건드리지 않았다. 고블린의 여자를 빼앗을 만큼 야박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지상 1층부터 3층까지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긴 시간이 소요됐다.
소문을 접한 졸업생들이 비겁하게 뭉쳐서 우정의 힘으로 덤벼줬다면 일망타진했을 텐데, 놀랍게도 뿔뿔이 흩어진 탓이다.
그러고도 네놈들이 용사냐?
...라고 그들의 요추에 손을 얹으며 물어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사실, 그래서 더 시간이 소요된 것 같다.
털썩.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여자 기숙사 1층의 공중목욕탕에 샤워 중이란 팻말을 문에 걸어두고 탈의실 선반 아래에 숨어있던 졸업생을 끝으로 처리가 끝났다.
“발전이 없네.”
이 사회부적응자들은 학습이란 걸 하지 않는 걸까?
우리는 약 일주일 전에 한 번 붙었었다.
그때는 내가 MAX급 숙소에 갇히는 식으로 상황이 정리된 반강제적인 패배. 그리고 이번에는 패배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저들은 분석할 대상이 ‘1번 S급’ 하나다.
반면에 내가 상대해야 할 졸업생의 숫자는, 남녀 다 합치면 1만 명도 가뿐히 넘는다.
정보전에서 벌써 밀리고 시작.
일주일이면 속옷 색깔까지 알아낼 수 있는 시간이다.
그것을 경계하며 불리한 싸움을 예상했던 나는, 이들의 방만한 태도를 간과했음을 깨닫고 반성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모두가 100%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구의 부지런한 문화시민을 기준으로 잡은 거였는데….
이들이 지구에서 낙오된 사회부적응자란 점을 간과했다.
“아니면 나를 깔보는 건가?”
세상을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어떻게든 이길 거야! 같은 중2병 마인드와 나태한 마음가짐으로 일주일 동안 쉰 걸까.
내게는 이들이 먼지나 다름없었다.
쓰러트리는데 걸리는 시간과 수고가 바닥의 먼지를 치우는 거랑 정말 비슷했기에.
“강한수 씨. 일주일 동안 안 보이셔서 걱정했는데, 걱정한 제가 참 어리석었네요.”
팩토리아가 한숨을 내쉬면서 누추한 A급 숙소에서 나왔다.
“몰골이 참 어울리네.”
굉장히 부스스했다.
“여자 기숙사 복도를 피와 뼈로 장식하신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마술사 겸 사업가라고요. 갑자기 페스티벌에 납치돼서 밀린 사업과 연구를 어떻게든 진행해야…. 듣고 있나요?”
“...뭐?”
“저랑 이야기하는 중이었잖아요.”
“하고 있었나?”
“네!”
“농담이야. 제대로 들었어. 남자가 밀렸다며?”
“그런 말은 전혀 안 했거든요?! 어떻게 곡해하면 그런 해석과 결과가 나오는 거죠?!”
나는 눈을 감고 기척을 살폈다.
남자 기숙사에서 여자 기숙사로 넘어오기 직전에도 반드시 짚고 넘어갔었던 사안이다.
후환(後患.) 정리.
결국에는 또 부활하겠지만, 저번에 나를 마왕으로 오해하고 공격한 자들과 그들의 친구까지 싹 쓸어서 보복할 의지를 꺾고 능력치도 약화해둘 필요가 있었다.
“팩토리아. 전에 부탁했던 후보들은?”
1위부터 4위까지 내 위로 올릴 졸업생 둘을 여자 기숙사에서 골라 달라고 부탁했었다.
“아! 그거요…. 농담인 줄 알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호호!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겸손 몰라요? 겸손! 그러니 자동반사처럼 올라간 그 오른손은 내려놓으세요!”
“내 오른손이 어때서? 사람이 살다 보면 머리가 갑자기 가려워서 긁적이려고 손을 올릴 수도 있는 거지. 나는 기분이 좀 언짢다고 여성에게 손찌검하는 무뢰배가 아니야. 선량한 용사님을 어떻게 보고! 정말 언짢아지려고 하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팩토리아가 말하길.
여성 졸업생 전체 2위와 3위는 팩토리아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면서 외박 중이라고 한다.
먼지들에 섞여서 쓸려가지 않았다는 뜻.
나는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실력이 다 고만고만해서 구분이 안 됐는데, 여기에 없다고 하니 천만다행이네.”
“고만고만한가요…?”
“당연하잖아?”
평균 경력 3년 애송이들이 어떻게, 산전수전 다 겪은 53년 베테랑 S급 용사님에게 비빌 수 있겠는가?
내가 저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건 당연하다.
그리고 이 격차는, 내가 아름다운 녹색별 지구의 문화시민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계속 벌어질 것이다.
“뭐…. 이 광경을 본다면, 전부 고만고만하다는 자신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요.”
팩토리아가 여자 기숙사 복도를 보면서 질색했다.
“대충 정리된 듯하니, 나는 이만 간다. 아! 팩토리아. 현재 전체 2위라고 했지? 3위까지 내려가. 아니, 안전하게 4위로. 명심해. 1위나 2위를 계속 유지했다가 걸리면 진짜 용서 안 한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
그 뒤에는 제법 순조롭게 진행됐다.
여자 기숙사 1위에게 더는 점수를 쌓지 말라고 해놨으며, 2위와 3위는 밖에서 열심히 점수를 쌓는 중.
남자 쪽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여기도 점수가 가장 높은 친구들로 미리 뽑아놨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짐꾼이랑 비슷하게 생긴 둘을 무작위로 뽑았다. 인생은 원래 실력보다 운이잖은가?
두 행운아는 눈알을 굴리면서 “어째서 우리지?”라는 시선을 내게 보냈다. 그래서 질문할 기회를 줬다.
“짐꾼A, 짐꾼B. 내가 너희를 최상위권까지 키워줄게! 질문 있으면 잘리고 싶은 손을 들어.”
“......”
“......”
따뜻한 날씨에 오들오들 떠는 B급 졸업생들. 몸이 너무 허약한 것 같아서 살짝 걱정됐지만, 보다 눈치가 빠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없군. 훌륭해. S급 용사님을 알아본 훌륭한 친구들다워.”
내 진면모를 볼 줄 아는 식견만으로도 이들은 중급교육과정을 밟을 자격이 충분하다.
다음 할 일은?
“강한수 졸업생님. 이 B급 분들이랑 장기외박이요?”
하녀 엘리스에게 신고하는 것이다.
점수를 내리고 싶은 나는 신고를 안 해도 되지만, 판타지아 대륙의 미래를 책임질 훌륭한 중급교육생이 될 두 짐꾼은 아니다.
1점이라도 잃을 순 없다.
“마왕 페도나르…!”
“맙소사! 정말로 기숙사에…!”
나를 따라서 MAX급 숙소까지 따라온 두 짐꾼이,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독서 중인 마왕님을 보고는 경악했다.
마왕님도 그제야 손님이 왔음을 눈치챘다.
“어흠! 잘 왔다, 용사들이여! 짐은 무시무시한 용사의 숙소에 얹혀사는 마의 정점, 마왕 페도나르다! 짐에게 용무가 있다면 먼저 집주인부터 쓰러트리고 와라.”
마왕의 업무를 왜 내게 떠넘기는 거야?
“짐꾼들. 마왕이랑 닮은 저 인간은 신경 쓰지 마. 분홍색 파자마 차림으로 용사님의 아지트에서 성인잡지를 읽는 마왕이 상식적으로 있을 리 없잖아? 우리는 점수만 생각하자고.”
“그, 그런가…?”
“그렇겠지? 하하….”
내 설득에 짐꾼들은 수긍한 것 같았다.
“나만 믿고 따라와. 그러면 지구 최강이 될 수 있어. 예쁜 아가씨들로 하렘을 차리고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나? 신경 쓰지 마. 대충 5년쯤 지나면 너희보다 약해져 있을 엑스트라니까.”
우리는 숙소 공중정원의 마구간으로 이동했다.
처녀만 태우는 유니콘이 어째서 있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옆의 푸른색 비룡은 쓸 수 있었다.
따라오는 짐꾼들은 넋을 놓은 상태였다.
“아름다운 인어와 요정이 대체 몇 명이야…?”
“내 숙소랑 왜 이리 격차가 심한 걸까….”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도 1회차 때는 참으로 한심했었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엉덩이에서 시선을 못 뗐었으니까.
올챙이적 생각하는 청개구리 같은 마음으로, 우물 밖을 평정한 황소개구리 같은 포용력으로 저들을 이해해주자!
“용사님. 실례지만, 비룡을 운전할 줄 아시나요? 3급 면허증만 있으시면 됩니다. 유니콘은 면허증이 필요 없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처녀만 태우는 고집이 있어서…. 저는 당연히 1급 면허증이 있습니다.”
마구간을 관리하는 요정이 내가 면허증을 요구했다.
“그게 꼭 필요한가?”
“아! 면허증을 모르시는군요. 그러면 당장은 운전이 곤란한데…. 괜찮습니다. 이 비룡은 덩치가 좀 작아도 최대 5명까지 탑승할 수 있으니까요. 용사님께서 가시려는 목적지만 가르쳐주시면 제가 운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둘을 부탁해.”
“용사님은요?”
“나? 남이 모는 싸구려 승용차는 안 타는 주의라서.”
“예?”
“아버지에게는 제가 있으니까요!”
공중정원에서 인어와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채 시시덕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쫓아온 쑥떡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현재는 인간의 모습이지만, 실체는 녹색 용.
완전히 다 자라도 아담한 오두막집 크기를 넘지 못하는 비룡은 태생이 하찮지만, 쑥떡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용(龍).
심지어 우량아라서 덩치는 이미 성체(成體)도 때려잡을 만큼 거대하다. 등판에 5천 명의 인간을 태워도 거뜬하리라.
그리고 면허증도 필요 없다.
“쑥떡아. 너는 보기만 해.”
“아! 저도 데려가시는 건가요?”
“그래. 너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 친우가 있거든.”
“아버지의 친구라면, 굉장히 멋진 분이실 것 같아요.”
쑥떡이 말할 때마다 꼬박꼬박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것이 은근히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일부러 이들에게는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친구를 부르는 데 실패하면,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생성해서 직접 날아가야 하니까.
그리고 계획에도 차질이 생겨서 변경이 불가피할 것이다.
하늘을 향해 힘을 공명시켰다.
혼돈의 힘이 아니다.
내 고유의 냄새.
방송국의 라디오 주파수처럼 페스티벌 대륙 전역으로 쏘았다. 느긋하게 처자고 있지 않다면 분명히 느꼈으리라.
그리고 반응을 보이겠지.
“Bluuuuuuu…!”
“Uniiiii…!”
마구간에 매인 비룡과 유니콘이 흥분하며 울었다.
녀석들의 예민한 본능이 느낀 것이다.
“아버지. 무언가 이쪽으로 와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쑥떡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날짐승처럼 녀석도 용의 본능으로 느낀 것이다.
“온다.”
휘이이잉~!
태풍이 몰아치고 밝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졌다. 그리고 칠흑색 거대한 벽이 기숙사 앞에 떨어졌다.
쿠웅!
지축이 흔들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도 있지만, 종합운동장처럼 너무나 거대해서 온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반갑게 인사했다.
“여어~ 40년 만이지? 잘 지냈어?”
“Chaoooo.”
안부를 묻는 내게 담담한 어조로 칠흑색 벽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중후한 울음소리에 대기가 흔들렸다.
“뇌비우스. 또 함께할 텐가? 아니, 무의미한 질문이군. 그러기 위해 온 거겠지?”
“Chaoooo…!”
젊은 망룡왕 뇌비우스가 긍정하듯 힘찬 포효를 질렀다.
엘리스처럼 능력치가 우수한 하녀들은 버텼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 요정과 인어는 다리와 꼬리지느러미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거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두 짐꾼은?
“뇌비우스라고?! 설마, 5대 재앙?!”
“1번 씨! 5대 재앙을 쓰러트리란 건 아니겠지요?!”
기절하진 않았지만, 공황에 빠졌다.
“왜 호들갑이야, 5대 재앙을 한 번도 못 잡아본 초보자처럼. 다들 집에 한두 마리씩은 박제해놨거나 키우잖아?”
“아뇨.”
“전혀.”
나는 너무나 한심한 대답을 들려준 둘을 지그시 쳐다봤다.
잡것들을 바꿀 기회가 아직 있다.
지금쯤이면 부활했을 남자 기숙사 2위와 3위의 경추를 양손에 쥐고 데려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데 역시, 눈치들이 빨랐다.
“그때는 든든한 동료들이 곁에 있었죠!”
“지금은 성검도 없어서 필살기도 못 쓴다고요!”
두 짐꾼이 서둘러 변명했다.
비열한 우정의 힘이나 초보자용 오토매틱 무기 없이 혼자서는 5대 재앙을 못 쓰러트린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뭐…. 좋아. 처음부터 강한 자는 없으니까.”
물론, 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제법 강했다.
판타지아 북대륙 만백성이 인정한 귀여운 아기를 살해하려 한 극악무도한 야만인들과 제국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때려잡았다.
아무튼,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요정 조련사를 내려다 봤다. 비룡을 조종할 만큼 강단이 있는 걸까?
다행히 기절하진 않았다.
“면허증이 1급이라고 했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수준이고 실력인지는 모르지만, 나랑 뇌비우스의 뒤를 놓치지 말고 잘 쫓아와.”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아주 좋은 질문이야.
“닭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Chaooooooo…!”
친애하는 전우 뇌비우스를 괴롭히던 천사들이랑 얽힌 원한은 대부분 청산했다.
하지만 100%는 아니었다.
그게 중요하다.
40년 동안 복리로 계산했더니 또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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