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회차] 투명드래곤
내가 지구에서 판타지 세계로 납치되기 직전에 읽은 과학잡지의 설명에 따르면, 암흑물질은 ‘중력으로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물질’이었다.
지구의 시간으로 약 5년이 지난 현재는 무언가 더 발견됐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5년 전까지의 지식뿐.
내가 아는 암흑물질의 정보는 셋이다.
1) 전자기파로 관측되지 않는다.
2) 우주의 30%를 구성한다.
3) 몰랑몰랑에 반응한다!
3번에 붉은색 색연필로 동그라미 혹은 형광펜으로 밑줄 쫙!
매우 중요하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발현하는데 필수적인 원천인 마력을 느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술의 대가라고 불리는 자들은, 상대의 다음 움직임이 보인다고 말한다.
즉, 보여야 뭐든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읽은 과학잡지에 따르면, 지구의 과학자들은 암흑물질이 입자인지 파동인지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우주의 30%를 구성하고 있음에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존재는 달랐다.
“위대한 마스터 몰랑에게 경의(敬意)를.”
그러나 언제까지나 스승의 그림자 밑에 있을 순 없는 법.
마스터 몰랑이 암흑물질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제자인 나도 간단히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접근법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페스티벌 대륙에 소환되고부터 약 1년.
나는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방식을 개발해냈다.
인류를 사랑하는 정의로운 용사로서, 내가 발견한 이 획기적인 전투기술을 무료로 뿌리고 싶지만, 그 이론이 너무 몰랑몰랑해서 언어로 표현 안 된다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나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오른발을 굴렀다.
콰지지직-!
벽보다 10배 단단한 바닥에 퍼즐 같은 균열이 생겼다.
마왕 페도나르처럼 단숨에 파괴할 순 없지만, 그것도 잠깐뿐이다. 공간이 미세하게 비틀리며 생긴 균열이 단단한 고체의 벽을 분쇄했다.
우르르르….
고전 게임 테트리스의 3D 실사판이 이러할까?
내가 찍은 발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꽤 넓은 면적의 바닥이 작은 벽돌 크기로 나뉘며 하나둘 내려앉았다.
4층을 부수고 3층까지 쭉.
“헉?!”
“천장이 또-?!”
“오! 젠장!”
그 아래에 우연히 있었던 인간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
내가 앞으로 쭉 뻗은 오른손에 살짝 닿자마자 그들은 온몸을 비틀고 경련을 일으키며 목각인형처럼 쓰러졌다.
털썩, 털썩….
죽지는 않았다.
외부자극을 받은 내분비샘이 착란을 일으켜서 호르몬 균형이 깨지고,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뉴런(neuron)이 가닥가닥 끊기는 정도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
심각한 장애가 올 순 있지만.
“너무 간단해졌네….”
아날로그의 종말을 본 것 같아서 씁쓸했다.
직접 등뼈를 어루만지며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를 선사해주는 손맛이 일품이었거늘.
버튼 하나로 대량생산하는 공장의 등장으로 기존의 장인과 가내수공업이 몰락했듯이, 이젠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 더욱 효과적인 결과를 내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렇게 과거의 향수에 빠져서 실망하길 잠시, 나는 점수가 미세하게 내려간 걸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신기술의 위력도 마음에 들고.
“1번! 더는 날뛰지 못한다!”
“네놈이 숙소에서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지!”
“쉽게 당한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싸워온 이유는 전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소란을 들은 졸업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로로 나란히 10명이 서서 걸어도 될 만큼 폭이 넓은 기숙사 복도를 발 디딜 틈 없이 꾸역꾸역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들이 전부 나를 만나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것이다.
감격스럽구먼.
나도 저들의 성원에 보답해주기로 했다.
뿅-!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해서 왼손에 쥐었다.
절삭력 하나만은 일품!
무르익은 벼를 베듯 저들의 허리를 양단해줄 것이다.
그동안 상대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졸업생들의 머리를 넘은 가지각색의 마법들이 나를 정확히 노리며 날아들었다.
회피도 어려웠다.
창문까지 빈틈없이 메운 졸업생들의 포위망이 두껍고, 근접전에 특화된 자들이 나를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제법 강했다.
댕강댕강- 캉!
성검 뉴클리온으로 서너 명쯤 벤 직후에 막혔다.
막아선 자의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이름표가 나처럼 무지갯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1번. 너만 영원히 S급일 거라고 믿었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가늘게 뜬 눈이 뱀처럼 교활하게 생긴 사내가 내게 우쭐대듯 말했다.
흑발흑안(黑髮黑眼)에 검은색 코트.
검은색으로 통일한 친구였는데, 방패도 없이 양손의 쌍검(雙劍)을 교차해서 성검 뉴클리온을 막아낸 점이 독특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고작 한 번 막은 것뿐이다.
“어…? 어엇?!”
촤아악-!
나는 1레벨을 경험치로 치환해서 증폭 후, S급 졸업생의 쌍검을 순수한 힘으로 밀어내며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수직으로 벴다.
시간이 많았다면 경험치를 소모하지 않고 싸우며 참교육을 해줬겠지만, 주위에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손해는 아니다.
1레벨을 투자해서 10레벨을 회수한다면 남는 장사 아닌가?
“내가 최강이어야 하는데! 이건 사기- 커억?!”
“여러분! 뭉쳐서 함께 싸우- 켁?!”
“1년 동안 숙소에만 있었던 놈이 왜 이리 강해!”
“두고 보자! 헉?! 다음에 보자니깐- 꾸엑!”
압도적인 머리 숫자만 믿고 기세등등했던 졸업생 무리의 포위진은 순식간에 와해됐다.
그래도 도망치거나 항복(포기)하는 자는 얼마 안 됐다.
이 공명정대한 용사님이 끝까지 쫓아가서 무조건 죽인다는 사실을 경험이나 소문으로 알기 때문이다.
나는 채무가 깨끗한 걸 좋아하니까.
중고등학교 때도 친구에게 돈을 빌리면, 어머니의 테니스라켓에 맞는 한이 있어도 다음 날 바로 갚았다.
빚이 있으면 머리 위에 납덩이를 얹은 것처럼 온종일 신경 쓰였던 탓이다.
물론, 싸우면서 나도 멀쩡할 순 없었다.
사방에서 날아든 마법은 내 몸에 달라붙은 정령들이 알아서 막아줬지만, 5대 원소에 해당하지 않는 날붙이와 화살촉은 맨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총알까지!
비열한 우정의 힘은 확실히 막강했다.
무능하고 게으른 사회부적응자들의 협공에 정상인인 내가 상처를 입었으니까.
“쯧. 아날로그의 한계로군.”
성검 뉴클리온만 사용해서 이기긴 무리였다.
내 주력인 정령들을 소환한다면 수적 열세를 줄이고 압도적인 승리를 따내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내 정령들이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 출신이란 게 문제였다.
여기서 정령들을 소환하면?
나도 외계인이랑 한패란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래도 상관없다. 개미들이 오해하든 말든 알 게 뭐람?
하지만 ‘인류의 배신자를 낳은 자들’이란 식으로 부모님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정령들을 봉인했다.
내가 밀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졸업생들의 평균역량이 확실히 상승했다.
1년 전에는 성검 뉴클리온과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만으로 어찌어찌 쓸어버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내 발목을 잡는 수준의 S급도 꽤 생겨서 전투가 상당히 번거로워졌다.
저들도 1년 동안 성장했다는 의미.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자, 그러면. 우선은 절반쯤 줄이고 시작해볼까?”
나는 아까부터 놀고 있던 오른손의 중지와 엄지를 맞대며 튕겼다.
탁!
“커어억?!”
“아악-?!”
내가 손가락을 튕기며 확산시킨 신기술의 파동에 노출된 졸업생들이 휘청했다. 그리고 육체가 약한 순서대로 고꾸라졌다.
원리는 조금 전이랑 같다.
인체의 섬세한 생체리듬을 흔들고 뇌세포를 파괴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공간의 비틀림으로 만들어낸 현상.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상당했다.
수평이나 직각이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건, 두 직선이 완벽한 180도 혹은 90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0.1도쯤 틀어지면 어떻게 될까?
직선이 짧을 때는 육안(肉眼)으로 티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길어지면 더는 수평과 직각으로 안 보인다.
내 신기술이 핵심이 바로 그거다.
암흑물질처럼 보이지 않는 미세한 비틀림을 주는 것.
대신, 빼곡하게.
“제법 정리가 됐네.”
내 신기술에 버틴 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뇌세포가 죽어도 티가 안 날 정도로 멍청하거나, 뼈를 포함한 육체가 충격흡수를 잘하는 체질이거나.
그래도 괜찮다.
숫자를 대폭 줄였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니까.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졸업생들이 전의를 상실했다. 혹은 이 같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사회부적응자들의 중2병 같은 사고방식은 이래서 문제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기가 성장하는 동안, 남들은 고정적인 능력을 유지한 채 가만히 기다려주는 줄 안다.
현실은 이토록 잔인한 것을….
“이, 이건 사기야!”
“전멸? 믿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이건 악몽이 틀림없어.”
1년 동안 연구한 끝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꾼 S급 용사님의 강함에 놀란 졸업생들이 현실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일깨워주기로 했다.
이놈의 오지랖은 끝이 없군….
퍽!
“꾸엑?!”
“많이 아프지? 꿈이 아닌 현실이라서 그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발전한 내 신기술은 버틴다고 끝이 아니다. 마스터 몰랑의 수제자가 그렇게 허술할 리 없잖은가?
광범위하게 설정해서 그렇다.
집중하면 조금 전에 견뎌낸 자들도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뇌세포 100개 줄어든 거랑 100만 개 줄어든 게 같을 수 없는 이치.
발동조건은 접촉이다.
“크아악~?!”
“아앜-?!”
털썩.
내 오른손에 닿은 자들이 한심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용사님. 기숙사 청결 유지를 위해 시체와 부상자들을 임의로 치워도 될까요? 기념사진을 찍고 싶으시면 지금 빠르게 부탁합니다.”
“안 찍어.”
“네. 그러시면 빠르게 치우겠습니다.”
차디찬 시체 혹은 시체처럼 복도에 널브러진 졸업생들은 하녀들이 와서 조용히 정리했다.
아직 살아있다면 양호실로 보내고, 죽었다면 기숙사 뒤편에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을 위해 마련된 신전으로 옮겼다.
그러나 여전히 1위였다.
남자 기숙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 그리고 졸업생 몰살을 두세 번쯤 더 해야 안정적으로 5위까지 내려갈 것 같다.
그리고 난관은 아직 하나 더 남았다.
“역시, 제 추측대로군요.”
무려 1년이나 흘렀음에도 집요하게 숙소 주위를 맴돌던 학생회장이 불쑥 튀어나오며 친한 척했다.
“아줌마.”
“아직 결혼도 안 한 처자에게 아줌마라니, 굉장히 불편하네요.”
“나도 아줌마를 만나서 굉장히 불편해.”
학생회장을 죽이면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아서 중급교육과정을 밟게 될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소심하게 대응했었다.
그게 실수였다.
숙소에 틀어박힌 채 점수가 쌓이는 걸 수수방관했다. 이건 그 잘못된 판단의 대가.
소심한 대응은 나답지 않았다.
“당신의 투명한 기술. 상당히 흥미롭네요. 마법인가요?”
“아니.”
“전투를 쭉 관찰해본 결과, 그 특이한 기술은 오른손과 오른발로만 발동하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무슨 질문을 하든 대답해줄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예외였다.
“궁금하다면 가르쳐주는 게 인지상정.”
“어머나! 1년 사이에 무슨 심경변화가 있었나요? 이번에는 쉽게 알려주네요. 여자에게 관심 없는 목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표현력이 부족할 뿐, 매우 친절한 신사분이셨군요. 제 남자친구가 될래요? 같이 점심도 먹어줄게요.”
학생회장이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무시하고 질문에만 답해줬다.
“내가 오른손만 쓰는 이유. 그건, 내 오른손에 투명드래곤이 봉인되어있기 때문이지.”
“아…!”
이봐, 아줌마.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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