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11회차] 이 먼닭은 뭐지?
진학상담사?
퇴학상담사를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동급생을 두들겨 패고, 기숙사에 불을 질렀으며, 선배들에게 목디스크를 선물해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학생회장까지!
나는 눈곱만큼도 기억나지 않지만, 상급생이랑 굉장히 뜨겁게 풍기문란한 밤을 보냈다는 것 같다.
그런데 진학상담사라니?
여기는 불량학생을 우대하는 교육시설이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강한수 학생.”
복잡한 심사를 끌어안고 거실에 나오자마자 진학상담사로 짐작되는 사내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약간 마른 체형의 칼날 같은 분위기의 사내다.
변수나 오차 없이 학생의 성적에 맞춰서 현실적으로 진학시킬 것 같은 선생. 그걸 달리 말하면, 듣기 좋은 꿈과 희망 같은 거품을 일절 배제하고 현실적인 조언만 할 것 같다.
...이런 내 첫인상의 감상도 읽었을 터.
하지만 그는 부정하지 않고 더욱 짙은 미소만 지었다.
“강한수입니다.”
나는 부드러운 소파에 앉으며 답했다.
어째선지 관계없는 마왕님도 이 자리에 참석해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녀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선도위원장 겸 진학상담사를 맡은 ‘페이커-리’라고 합니다. 친근하게 리 선생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아, 네.”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다.
우리의 만남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강한수 학생의 중등교육과정 전공에 대해 진지하게 상담하고 싶지만, 일단은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자퇴하려는 마음부터 돌리는 게 급선무겠군요.”
“자퇴가 아니라 졸업입니다만?”
“하지만 학력 미달이지요. 당신의 고향에서도 초등학교 졸업장만으로는 사회인으로 편입하기가 굉장히 힘들지 않습니까?”
“이거랑 다르죠.”
나는 지구로 돌아가서 문화시민의 삶을 보내면 된다.
내 관점에서 이곳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대학교에서 대학원으로 갈지 선택하는 거랑 같다.
내가 그쪽에 뼈를 묻을 생각이 없기에, 굳이 학력을 더 쌓지 않아도 사회생활에 문제없다.
“당신의 착각은 잘 이해했습니다.”
“착각이 아닌 사실이죠.”
“하하!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차원 지구는 약 200년 동안 외부의 간섭 없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했습니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종교전쟁부터 세계전쟁까지 별의별 불행한 사건이 있었지만, 인류 전체가 멸망할 만큼 끔찍한 사태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게 당신들 덕분이다?”
“저희는 그저 선생으로서 가르쳐줬을 뿐입니다. 창작은 모방의 어머니란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악마와 천사란 개념은 인간이 정치와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낸 상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원래부터 실존했던 존재를 보고, 지배층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변형해서 신화에 넣은 것이죠. 하지만 모두가 이용할 생각만 한 건 아닙니다. 손짓만으로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천사와 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보고 위기의식을 느낀 지구의 영웅들이 저희에게 가르침을 받고 200년 동안 고향별을 지켜왔습니다. 그 윗세대들이 그러했듯이.”
...진학상담사라서 그런가?
말이 참 많은 것 같다. 은근슬쩍 주제를 돌리기도 하고.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 지구의 인구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저희는 약 100년 주기로 학생을 모집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지구가 농업혁명을 맞이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 덕분에 학생 모집이 수월해지면서 주기가 200년으로 바뀌었…. 아! 이것도 주제에 어긋나나요? 결론은 이겁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진학을 거부하는 행위는 지구와 인류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내가 어딜 봐서 능력이 있다는 건지…?”
“구차한 말보다는 객관적인 자료가 신빙성 있겠지요. 이것을 한 번 봐주십시오.”
▷관리자 권한으로 기록을 열람합니다.
▷이름: 강한수
▷업적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마왕 토벌★★
▷2: 초등교육과정 최초, 망룡왕 토벌★
▷3: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성검 없이 마왕 토벌★
▷4: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동료 없이 마왕 토벌★
▷5: 초등교육과정 최초, 성검 없이 망룡왕 토벌
▷6: 초등교육과정 최초, 동료 없이 망룡왕 토벌
▷7: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성검 없이 망룡왕 토벌
▷8: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동료 없이 망룡왕 토벌
▷9: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초월영역 진입★★
▷10: 초등교육과정 페스티벌 최단시간, 이벤트 달성★★
▷11: 초등교육과정 페스티벌 최고점수 갱신★★
...
▷46: 전체교육과정 최초, 두 번째 악마 패퇴★
▷47: 전체교육과정 최단시간, 두 번째 악마 패퇴
▷48: 전체교육과정 최고기록, 매우 빠른 성장
▷49: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귀여운 용사 선정★★★
▷50: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무서운 용사 선정
▷51: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위대한 지도자 선정★
▷52: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위험한 학살자 선정
무려 52가지!
업적이 가치에 따라, 뒤에 별(★)이 많이 붙는 것 같았다.
중복 비슷한 업적이 꽤 많이 보였지만, 원래는 전부 따로따로 누군가 가져갔었던 업적일 것이다.
그래서 성검과 동료 없이 최단시간에 토벌하면서 쌓인 업적이 많았다. 내가 엑스트라 베듯 무심코 넘겨버린 비중 있는 몬스터와 악마, 악당도 업적에 꽤 포함되어 있던 까닭이다.
그리고 내 시선을 끄는 업적 하나.
“역시! 내가 어릴 때는 참 귀여웠지!”
“...절대로 있을 리 없는 부정투표를 의심했을 만큼,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업적이었지요.”
“하여간 업적이 참 많네.”
“그렇습니다.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초등교육과정 학생들이 평균 두세 개의 업적을 세웁니다. 그런데 강한수 학생은 무려 52가지. 중복이 많다고 투덜대셨지만, 원래는 중복이 나오기 힘든 업적들입니다. 전투에 큰 도움을 주는 성검과 동료 없이 최단시간에 토벌한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객관적인 자료를 들이미는 바람에 전투력 부분에서는 나도 더는 발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점을 노렸다.
“...평판과 인성은?”
1회차 때부터 내 발목을 잡았던 학점이다.
특히, 인성은 교직원 일동과 판타지 신이 바라는 용사의 정신상태랑 멀어서 늘 낙제를 받았었다.
아무리 능력이 우수해도 성격이 마음에 안 들면 채용하기 힘든 법.
내게 스트레스를 주던 ‘인성’이 도움 될 날이 줄은 몰랐다.
진학상담사가 말했다.
“좋다고 말하긴 어렵겠군요. 그러나 정정할 게 있습니다. 강한수 학생의 말대로 평판 학점은 저조한 편이었지만,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에서 역대 5위를 했을 만큼 꽤 좋게 나왔습니다. 문제는 인성이죠. 하지만 당신의 능력을 포기할 만큼 문제 되진 않습니다.”
“중등교육장을 부숴버릴 건데?”
“편한 대로 하십시오. 교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
나는 진학상담사를 지그시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한 채 이어서 말했다.
“이번에 스스로 증명했듯이, 당신의 전투력은 이미 중등교육과정 학생들마저 뛰어넘었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강한수 학생을 고등교육과정으로 편입시켜서 직접 지도편달을 하고 싶지만, 반대하는 교사들이 많아서…. 그 인성 학점이 참 아쉽습니다.”
“강제진학을 시키시겠다?”
“그럴 리가요. 현재 페스티벌 점수를 확인해주세요.”
“...점수? 미친!”
▷점수: 872345
▷순위: 1
기숙사를 부수고 졸업생들을 응징할 때까지만 해도 점수는 순조롭게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나로선 교직원 일동의 조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작은 없습니다. 선도위원장을 맡은 제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당신을 좋게 본 보건 선생님께서 감시하고 계시거든요.”
“그러면 뭐 때문에…?”
“당신이 잠든 사이에 초등교육생 기숙사가 불탔습니다. 그런데 이걸 본 페스티벌 원주민들이 기뻐했습니다.”
“하앙?”
이게 뭔 쑥떡 같은 소리야?
“보복이 두려워서 여태까지 말은 안 했지만, 졸업생들이 임무를 수행한답시고 도시를 헤집고 다니면서 원주민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쳤던 모양입니다. 그 결과, 원주민들이 정체 모를 기숙사 방화범을 축복하면서 점수를 퍼줬습니다.”
“마, 맙소사….”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야만적인 판타지아 원주민들은 도움을 받아도 “고마워!” 한마디만 던지고 입을 싹 닦았었다.
그런데 페스티벌 원주민들은 어찌 이리도 계산이 철저하단 말인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뒷골이 확 땅겼다.
“강한수 학생.”
진학상담사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불렀다.
“뭐?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중등교육생부터는 각종 특혜가 있습니다. 고향에 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학교 차원에서 보호해주고, 정기휴가와 포상휴가로 고향별이나 동맹 행성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나는 시큰둥했다.
가족은 인질이나 다름없고, 생색내는 휴가를 받을 바에 그냥 졸업하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일단 들어보십시오. 판타지아 대륙의 분할된 존재 중 하나를 완전한 존재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단, 동료를 포함한 핵심적인 존재는 제외입니다.”
“흥!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는데?”
“간혹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관주인이나 잘생긴 방랑기사랑 사랑에 빠지는 학생들이.”
“나는 그딴 거 없….”
큰소리치던 나는 그의 다음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신에게는 검희가 낳은 아들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사라졌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변수로 태어난 존재들의 영혼을 500년간 보존해둡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세요. 사라진 줄 알았던 인연을 되살리기 위해 중등교육생이 되고 싶어도 능력이 안 돼서 탄식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합니다.”
나는 눈을 질끔 감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불장난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내가 사라져도 판타지아 대륙이 유지될 경우를 대비한 거였다. 통일된 북대륙이 전란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내 피를 이은 후사(後嗣)가 꼭 필요했으니까.
당시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남은 건 책임뿐.
“...좋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나는 감성이 아닌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로 했다.
54년 동안 갈망한 아름다운 녹색별 지구의 문화시민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을 살리는 건 훨씬 중요했다.
이건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 가족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의무다.
“하하! 잘 선택했습니다. 억지로 입학하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편이 낫죠.”
“단, 조건이 있어.”
“뭐지요? 웬만한 건 수용하겠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진학상담사는 대범하게 나왔다.
그래서 나도 거침없이 말했다.
“내가 이 빌어먹을 학교를 완전히 졸업할 때까지 그 아이를 검희의 자식으로 설정해줘. 엄마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아.”
“아빠 없는 아이는 괜찮고요?”
“나는 졸업한 후에 계속 만날 수 있으니까.”
“검희는 처녀입니다만….”
“지구에서는 처녀도 애를 낳아. 아무튼, 낳는대.”
“그렇습니까…? 아무튼…. 참 편리한 이론이군요. 보건 선생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저희도 쉽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검희는 중요인물. 그녀를 사랑하는 남학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애를 가졌다는 설정을 추가해버리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그러니 조건으로, 잡아두신 세 멍청이의 영혼을 돌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책임지고 그 설정을 밀어 넣겠습니다.”
“뭐, 좋아.”
나는 한시름 놓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뿅! 뿅! 뿅!
학생회장의 남자친구를 자칭하던 중학생들의 영혼을 풀어줬다.
내 정령으로 임명해서 영혼이 갈려 나갈 때까지 부려먹을 예정이었는데, 내 아들 덕분에 살았다.
“감사합니다. 거래가 깔끔해서 마음에 드는군요.”
진학상담사가 허공에 뜬 세 영혼을 갈무리하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서 중등교육과정은 언제 가는 거지?”
“원래는 페스티벌이 끝나려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학생회장이 저 상태고, 중등교육장 선도부의 세 학생이 박살 나는 바람에 일정이 좀 촉박해졌습니다. 성적이 조금 쌓이면 제 추천으로 선도부장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학생회장 이후에 고등교육과정 입학까지. 그건 또 그때 상담하도록 하지요.”
“이야기 끝?”
“그렇습-”
나는 진학상담사를 향해 도약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탁!
하지만 그의 손바닥에 간단히 막히고 말았다. 정입자를 침투시키긴 했지만, 미지의 무언가에 차단되어 효과가 미미했다.
“나를 입학시킨 걸 후회하게 해줄게.”
“처음에 말했을 텐데요? 저는 선도위원장입니다. 거친 학생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초등교육과정에 입학하고 54년 만에 이 정도라니? 장래가 정말 무서울 지경입니다. 지금의 패기처럼 제 기대를 실망시키지 마시길.”
진학상담사가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내 의식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
중등교육과정이라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면상이 보이는 순간부터 내 기대는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또 반복인가….
▷초등교육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신 학생의 중등교육과정 입학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지만 중등교육과정을 밟으려면 기존의 능력치로는 부족합니다. 아래의 복습과제를 해결하면서 스킬을 초월영역에 진입해주세요. 건투를 빕니다!
엘리스였나? 학생회장이었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초등교육과정을 졸업하더라도 바로 중등교육과정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여기서 그 부족한 능력치를 올리라는 것 같았다.
▷입학시험을 시작합니다.
▷동대륙의 재앙: 저주왕 말파르트 토벌(0/1)
▷북대륙의 재앙: 서리여왕 엘쉬 토벌(0/1)
▷남대륙의 재앙: 불꽃왕 페닉스 토벌(0/1)
▷서대륙의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 토벌(0/1)
▷중앙대륙의 재앙: 망룡왕 뇌비우스 토벌(0/1)
매우 쉽고 단순했다.
판타지아 차원의 다섯 대륙에 따로따로 사는 5대 재앙을 전부 쓰러트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라누벨?”
“네! 라누벨입니다! 어라?! 그런데 용사님. 라누벨 이름을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이년의 얼굴이나 이름을 정말 잊어서 물은 게 아니다.
능력치 탓이다.
▷종족: 휴먼
▷레벨: 2000
▷직업: 학자(지식=마술↑)
▷스킬: 마법ZZ 마술ZZ 매력Z 요리Z 불로Z…
▷상태: 당황
대체 뭐냐, 이 먼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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