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11회차] 하늘 위의 하늘
200레벨이었던 라누벨이 2,000레벨로 급변했다.
앵무조개가 암모나이트(Ammonite)로 진화한 수준!
스킬도 예전에는 일반영역뿐이었는데, 현재는 초월영역을 아무렇지 않게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누벨만 바뀐 게 아니었다.
그녀 주위의 왕궁기사들도 1,000레벨을 가볍게 넘겼다.
초월영역 스킬은 하나도 없었지만, 과거의 나약하고 호구 같은 기사A의 합집합 같은 게 아니었다.
▷종족: 휴먼
▷레벨: 1258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맷집MAX 검술MAX 체력MAX 오감SSS 내성SSS…
▷상태: 경계
왕궁기사.
이제야 왕궁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 같았다. 예전에는 네임드 몬스터보다 약한 주제에 자존심만 강한 꼰대 같았으니까.
...잠깐.
몬스터도 강해진 게 아닐까?
레벨을 올리고 싶어도 경험치를 수급할 장소가 마땅치 않으면 충분히 성장할 수 없다. 판타지 신이 “너는 오늘부터 500레벨, 옆의 너는 600레벨….” 이런 식으로 멋대로 설정해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라누벨의 이름을 아시는 용사님. 정신이 드셨나요?”
“강한수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귀여운 척하지 말고 이름을 불러라.
“네! 용사님!”
“......”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소환돼서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이곳은 판타지아. 용사님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랑 다른 차원입니다.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게요.”
하지만 내용이 약간 달랐다.
1) 5대 재앙이 깨어나려 한다.
2) 인류의 위기가 도래했다.
3) 신탁의 용사님을 소환했다.
4) 이 세계를 구해주세요!
11회차를 시작하면서 받은 임무 탓일까? 마왕 페도나르가 부활했으니 막아달라는 이야기가 빠지고, 그 대신에 5대 재앙이 들어갔다.
그래서 라누벨의 설명도 훨씬 길었다.
반드시 쓰러트릴 적이 하나에서 다섯으로 늘어났으니까.
“앞으로 용사님께서 쓰러트려야 할 적들을 라누벨이 요약해서 설명해드릴게요! 동대륙의 재앙은 저주왕 말파르트. 놈의 저주에 걸리면 온몸에 물집이 잡히면서 끔찍한 고통을 받게 돼요. 북대륙의 재앙인 서리여왕 엘쉬. 그녀의 얼음 송곳니에 스치기만 해도 심장까지 언다고 해요. 남대륙의 재앙인 불꽃왕 페닉스. 손이 화염으로 늘 타오르기에 근처만 가도 화상을 입어요. 그리고 서대륙의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 죽은 자를 모욕하는 악질이에요. 마지막으로 중앙대륙의 재앙인 망룡왕 뇌비우스. 이 용의 맹독은 앞서 네 재앙이 힘을 합친 것보다 끔찍하다고 전해져요.”
나는 그녀의 설명을 끊지 않고 잠자코 들었다.
초등교육과정의 5대 재앙이랑 다른 설정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1회차 때 전부 쓰러트린 내 경험에서 보자면, 달라진 점은 크게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망룡왕은 어디에 있지?”
“라누벨이 설명해도 모르시겠지만, 이웃하는 나라인 신성제국에서 성물로 용의 시간을 정지시킨 상태예요. 하지만 최근에 성물의 힘이 약해지면서 이 사악한 용이 깨어나려 해요.”
“그렇군.”
황혼기 막바지에 접어든 망룡왕 뇌비우스는 가만히 놔둬도 2년 이내에 자연사한다. 그런데 중등교육과정에서는 그의 시간을 동결시키는 방식으로 유예기간을 늘렸다.
머리를 잘 썼네.
모험 도중에 망룡왕 뇌비우스가 자연사해서 임무에 실패하는 불상사는 없을 것 같다.
“어머! 제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요. 저는 라누벨. 고대의 전설을 쫓는 여행 중, 신탁을 받고 용사님을 소환한 고고학자입니다. 라누벨은 고대언어로 ‘진리’란 뜻이에요.”
“바보니? 네 촌스러운 이름을 아는데 왜 소개해?”
“우우….”
라누벨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또 귀여운 척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오른 나는 그녀를 무시하는 데 성공했다.
무려 11회차.
이젠 철천지원수랑도 웃으며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라누벨쯤이야….
“용사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왕궁기사가 이동을 재촉했다.
토벌 대상이 마왕에서 5대 재앙으로 바뀐 것 외에는 현재까지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가자고.”
*
소란이 없었기에 왕궁 복도에서 검왕 알렉스랑 마주치는 깜짝 이벤트도 없었다.
나도 10회차에서 배운 점이 많으니까.
용사 루크가 설명해준 공략집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중등교육장에 들어왔더라도 내 목적은 초등교육장 시절이랑 다를 게 없다.
깽판이 아닌 빠른 졸업.
최대한 무난하게 진행해서 지구로 귀환할 것이다.
...아들이랑.
진학상담사가 약속을 제대로 지켰는지 확인하기 위해 북대륙의 검희도 찾아가야 한다.
만두 국왕이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짐의 땅에 잘 와주었다! 용사여!”
“환대에 감사합니다, 폐하.”
빈틈없는 귀족 예법을 선보이며 인사한 나는 주위를 쓱 둘러봤다.
왕, 왕자, 공주, 왕비, 귀족, 마법사….
라누벨과 왕궁기사처럼 평균 능력치들이 높았다.
거기서 나는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종족: 휴먼
▷레벨: 164
▷직업: 왕비(총애→마성↑)
▷스킬: 매력SSS 사교SS 마성SS 기품S 방사S 주목S 노래S 불로A 자수A 매혹A 고성A 명령A 색적B 내성B 면역B 재봉B 목욕B 건강B 체형B 기력B 예절B 신앙C 외교C 모략C 보정C 사랑C 지력C 휴식C 약효C 임신C 숙면C 정신C 독서C 체력D 원예D 질투D 작곡D 타락D 허세D 출산D 품평D 날조D 암투D 작사D 인내D 연주D 단검D 요리D 변비D 음란D 마기E···
▷상태: 발정, 격동
왕비도 레벨과 스킬이 전반적으로 대폭 상승했다.
하지만 딱 하나.
스킬 ‘마기’만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자연에 흩어진 마기 관련 약초나 육류를 섭취해도 오르지만, 대부분의 마기는 악마 혹은 상급 악마추종자에게 주입받는다.
그렇기에 영향을 안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의문.
“마왕은 어떻게 됐습니까?”
중앙대륙 남쪽을 지배하는 마왕 페도나르.
페스티벌 때는 내 장인을 자처하면서 숙소에 눌러앉았었다. 딱히 민폐를 끼친 건 없었고, 신기술의 초석을 쌓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마왕B에게 신기술을 선보이며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마왕? 페도나르라면 부활했다는 소식을 못 들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 마기는 누구에게 받은 것이고, 누구의 최종결재를 받는 걸까?
악마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악마도 상급자의 지배를 받을 터. 직장사회처럼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최종적으로 마왕이 나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 마왕이 현재 없단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용사여. 지금은 변변찮지만, 능력을 키워서 5대 재앙을 쓰러트리고 인류를 구해다오.”
“능력이라….”
지금이 변변찮다면 대체 얼마나 더 올리란 소리일까?
▶종족: 네츄럴 스피릿
▷레벨: 14047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영재ZZ 신성Z 마기Z 날조MAX 투기MAX 오감MAX 검술MAX 광기MAX 비행MAX 불굴MAX 희롱MAX 권투MAX 검기MAX 학살MAX 심판MAX 불사MAX 격투MAX 체술MAX 불로MAX 영생MAX 근성MAX 탐색MAX 조화MAX 체력MAX 협상MAX 색적MAX 망각MAX 회복MAX 인내MAX 활력MAX 선동MAX 악령MAX 패기MAX 축복MAX 몰살MAX 혼돈MAX 파괴MAX 내성MAX 근력MAX 맷집MAX 민첩MAX 저항MAX 기력MAX 재생MAX 면역MAX 냉정MAX 철벽MAX 금강MAX 지력MAX 도발MAX 정력MAX 투시MAX 거래MAX 지진MAX 겁화MAX 태풍MAX 홍수MAX 평정MAX 채광MAX 농사MAX 요리MAX 제련MAX 채집MAX 낚시MAX 수영MAX 사육MAX 교감MAX 살인MAX···
블랙박스를 따로 활성화하지 않았음에도 기존의 스킬들이 전부 개방된 상태였다.
그러니 이건 회귀가 아닌 복습이라고, 멀리서 관전하고 있을지도 모를 교직원들이 주장하는 것 같아서 살짝 우스웠다.
스킬만 보자면 내가 라누벨보다 훨씬 불리했다.
하지만 레벨.
라누벨 100마리가 덤벼도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을 만큼 내 레벨은 높았다. 스킬은 레벨이 높을수록 효율이 높아지니까.
내 F급 스킬은 남들의 S급이랑 맞먹는다.
중학생 셋을 죽이고 얻은 경험치가 그만큼 많았다.
심지어 지금보다도 레벨이 더 높았다. 진학상담사랑 거래로 세 중학생의 영혼을 돌려주면서 이것도 꽤 떨어진 상태.
그래도 스킬이 레벨을 못 따라가는 기형적인 능력치란 건 변함없었다.
“상관없지.”
나는 알현실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내 최종목표는 능력치 스킬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다.
마왕님은 “사라질 걱정 없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건 내가 마왕의 데릴사위가 됐을 때의 이야기.
나는 그 비겁한 여자랑 결혼할 마음이 없다.
가슴으로 성검을 튕겨내고 시선을 출렁거리게 하다니?
그 비겁함에 몸서리쳐진다.
▷종류: 스킬
▷명칭: 영재
▷등급: ZZ(35%)
▶ZZZ: ???
▶ZZ: 뿌리부터 재구성한다.
▶Z: 한계돌파가 약간 쉬워진다.
▷SSS: 손재주가 꽤 증가한다.
▷SS: 성공률이 꽤 증가한다.
▷S: 숙련도가 꽤 증가한다.
▷A: 경험치가 꽤 증가한다.
▷B: 손재주가 약간 증가한다.
▷C: 성공률이 약간 증가한다.
▷D: 숙련도가 약간 증가한다.
▷E: 경험치가 약간 증가한다.
▷F: 떡잎부터 비범해진다.
나는 무럭무럭 숙련도가 쌓이는 중인 스킬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영재ZZ 한계돌파 숙련도가 무려 35%…!
서두르지 않고 MAX급에 도달한 스킬들을 제물로 바치면서 차근차근 올린 결과물이다.
현재 능력치의 스킬들은 페스티벌 때, F급부터 다시 MAX까지 올렸다고 보면 된다.
날조 빼고.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나다.
생산직업과 보조직업 기술을 올려야 한다고.
제물은 ‘같은 스킬’로 중복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전투기술만으로 35%까지 올렸지만, 이제는 더 올릴 방도가 없었다.
남은 돌파구는 생산직과 보조직.
내게 미지나 다름없는 이 영역의 스킬들을 MAX급까지 올려서 나머지 65%를 채워야 한다.
“용사님. 뭐가 상관없으신데요?”
“그런 게 있어.”
“라누벨에게 가르쳐주세요.”
“끈질기네. 아! 혹시, 검희라고 알아?”
“네? 네. 알아요. 북대륙의 유명한 천재 검사잖아요. 자기를 검으로 쓰러트린 남자랑 결혼한다고 발언해서 귀부인들의 사교계에서 말이 참 많았었죠. 동료 영입순위 2순위! 용사님의 검술 실력이 검희를 이길 정도로 성장했으면 좋겠네요.”
“검으로만 이길까.”
내 성창(聖槍)으로 그녀를 꿰뚫은 적도 있었다.
연계기 500콤보부터 세지 않았다.
“검에 자신 있으신 모양이네요. 그런데 갑자기 검희는 왜요?”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소리 없어?”
“아, 아기요?! 검희를 쓰러트린 사내도 없는 상황에서 아기가 생겼을 리 없잖아요. 왜요? 용사님도 검희에게 청혼하시게요?”
“글쎄….”
만나서 상황을 봐야 알 것 같았다.
아이의 존재를 감춘 건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건지를.
하지만 내 첫 번째 목적지가 북대륙이란 건 틀림없었다.
그곳에서 검희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김에 5대 재앙도 쓰러트리자.
▷북대륙의 재앙: 서리여왕 엘쉬 토벌(0/1)
냉기 저항만 충분하다면 그렇게 힘든 상대가 아니다. 거기까지 찾아가는 일이 훨씬 성가시고 어렵다.
하지만 내게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있다.
여차하면 쑥떡의 등에 타도 되고.
남은 건?
“하하! 용사. 왕궁훈련장에 잘 왔다! 계집처럼 상처 하나 없는 피부를 보니,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왕국 제일의 검이 너를 훌륭한 용사로 키워주마! 그것도 단시간에.”
검왕(劍王) 알렉스.
이 빌어먹을 자식이다.
배려심이 눈곱만큼 있었던 초등교육과정이랑 다르게, 이번에는 닷새라는 판타지 적응 기간을 주지 않았다.
국왕 알현이 끝나자마자 따라붙은 왕궁기사들이 나를 왕궁훈련장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나의 검술 스승.
루크의 공략집에서는, 서민 출신으로 성공한 알렉스를 칭찬하면 수련 강도가 내려가고 펀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친해질 필요성을 못 느꼈다.
수련받을 마음이 없으니까.
나는 곧바로 북대륙으로 떠날 예정이다.
“하! 알렉스. 할 수 있다면 해보시지!”
녀석이 라누벨처럼 중등교육과정에서 업그레이드했더라도 나를 이길 순 없다. 그리고 오늘 허리디스크를 안고 퇴장할 것이다.
이것이 정해진 미래.
“우선은 기고만장한 용사에게 수준 차이를 알려줘야겠군.”
“수준? 내가 오늘 너에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줄게, 알렉스. 교육비는 좀 비쌀 테지만.”
“네가 하늘이라면 참 좁군. 이미 너는 베였다.”
“...뭐?”
푸확-!
내 허리에서 가로로 피가 솟구쳤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무식한 야만인 알렉스 따위에게 정의롭고 선량한 용사인 내가 당했다고? 하지만 대체 언제? 어떻게…?
“심검(心劍)이라고 하지.”
마음의 검?
“미친….”
압도적인 레벨은 스킬을 압살한다는 게, 판타지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했다.
▷종족: 휴먼
▷레벨: 2915
▷직업: 검객(체력=검술↑)
▷스킬: 검술ZZZ 체력ZZ 철벽Z 내성Z 불굴Z…
▷상태: 기대
궁극(窮極)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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