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11회차] 상대평가 vs 절대평
“알렉스가 용(龍) 됐네….”
판타지 생활 55년.
언제나 “뼈를 주고 뼈를 꺾는다!”라는 무식한 전법을 구사하던 검왕 알렉스가 ‘마음의 검’이란 심오한 검술을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일들을 다 겪는군.
하지만 말이다.
치이이….
허리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출혈?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정령’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아미노산과 물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정입자.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암흑물질의 한 종류.
즉, 자잘한 상처로 나를 피 말려서 죽이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심검에 당한 상처는 잘 아물지 않을 텐데.”
“내가 알 바냐.”
촤아- 드득!
이번에는 목이었다.
어김없이 반쯤 베였지만, 내 경추(頸椎)에서 막혔다.
상대의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를 노린다면 역으로 당할 때를 대비하는 것도 필수. 뼈마디의 디스크도 전설의 금속처럼 견고한 덕분에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베인 건 부드러운 살뿐.
“괴물인가…?”
“용사를 죽이려는 너는 정상이고?”
“지금은 실전이다. 그리고 완전히 벨 생각은 없었다. 주위에 치유사도 있고, 여차해서 죽더라도 이웃 나라의 성녀를 부르는 수단도 있다.”
알렉스는 알렉스로군.
심오한 검술을 쓰기에 전혀 다른 인간이 된 줄 알았다.
알렉스가 강해진 건 틀림없지만, 그것이 내가 이 야만인 앞에 쓰러져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건 오기가 아닌 검증된 이론!
검술ZZZ를 막아낼 방법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지만, 내게 치명상을 줄 만큼 강력하진 못했다.
덤으로,
뿅! 뿅! 뿅! 뿅! 뿅!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정령들이 MAX급 용사님의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1km 밖에서도 피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찾아오는 상어처럼 순식간에 내 몸을 에워쌌다.
그리고 뺨을 문대고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순진한 척하는 성범죄자 같으니.
“흡혈귀가 따로 없네.”
이 용사님의 피 냄새를 대륙 끝에서도 맡을 수 있는 모양이다.
“이, 이런….”
알렉스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런가 봤더니, 왕관 쓴 마음의 정령이 내 반지 위에 미끄럼틀 타듯 걸터앉은 이후부터 심검의 공세가 뚝 멈췄다.
마음의 검.
마음의 정령.
마음끼리는 통한다는 걸까?
“더 보여줄 재롱 없으면 이번에는 내가 간다.”
나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눈치 빠른 바람의 정령이 돌풍으로 내 등을 밀어주고, 땅의 정령이 바닥에 단단한 발돋움 판을 만들어줬다.
공기저항도 없었다.
자연이 성희롱한 대가로 도와주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알렉스는 힘든 환경에 놓였다.
불의 정령이 공기 중의 수분을 증발시키며 알렉스의 눈을 공격해서 심각한 안구건조증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덩치 큰 알렉스의 두 발은, 물의 정령이 질퍽하게 만든 흙바닥에 늪처럼 빠져들었다.
빠각-!
나는 알렉스의 검은 무시하고 놈의 턱주가리를 날려줬다.
내 뼈가 단단해서 통상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알렉스가 눈구멍을 노리리란 건 진즉 예상했다.
내가 그에게 이 전술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레벨은 5배 넘게 차이 난다.
이 차이는 초월영역 스킬이 많더라도 극복할 수 없다. 알렉스의 검술ZZZ는 의외였지만, 그건 ‘최종오의’ 같은 거였기에 먹힌 것이다.
보통은 그렇지 않다.
바로 지금처럼.
“크엌-?!”
“알렉스 주제에…!”
“카허억?!”
“알렉스 따위가…!”
정입자가 듬뿍 담긴 내 오른손이 알렉스의 육체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방어계열 초월영역 스킬이 많은 탓일까?
알렉스의 몸은 샌드백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신체균형은 정입자의 간섭으로 변질했다. 방사능에 오염된 돌연변이 비슷하게 된 상태랄까?
그것도 대단히 안 좋은 방향으로.
털썩-!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 같은 꼴이 된 알렉스가 마침내 쓰러졌다. 아니, 내가 쓰러지게 허락해줬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간 여러 사건으로 쌓인 스트레스가 풀렸으니까.
“크…! 역시, 이 손맛이야!”
내 응어리진 마음을 단시간에 풀어줄 수 있는 존재는 역시 알렉스뿐이다. 그 아무리 대단한 미모의 여인도 따라올 수 없다.
“알렉스 경?!”
“오! 맙소사! 신이시여….”
“숨은 붙어있나!”
“알렉스 경! 정신 차리십시오!”
왕궁훈련장 밖에서 관전 중이던 왕궁기사와 치유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찌그러진 깡통이 된 알렉스를 살피기 시작했다.
“흥~ 흐응~♪”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알렉스에게 처맞기만 했던 초등교육과정 1회차랑 비교하면, 중등교육과정의 시작은 매우 순조로웠다.
▶난감: 이게 순조로운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 학창시절이랑 진행이 너무 달라서….
오! 교생 아가씨잖아? 중학교로 전근 왔어?
▶환영: 정말 오랜만에 다시 뵙는 기분이에요! 강한수 생도님! 지구로 돌아가신다고 노래를 부르곤 하셨는데, 중등교육과정을 밟으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 전근이요? 저도 얼떨떨해요. 저는 어제까지 초등교육장 선생과정을 밟고 있었거든요. 갑작스럽게 발령 난 거예요.
그래? 슬슬 내 전담이 된 것 같은 느낌인걸?
▶불안: 훌륭하신 선배님들이 어째서 저 같은 초보 교생에게 강한수 생도님 같은 우등생을 계속 맡기는지 모르겠어요. 실습 기회가 많을수록 등용의 기회에 가까워지지만, 제가 잘하고 있는지 불안해요.
비밀 친구! 잘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적어도 내 혈압을 터트리진 않는다.
▶난감: 학생 비위를 맞추는 건 훌륭한 선생이 아니에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비난 들을 각오하고 올바른 소리도 해야 하는 법이랍니다. 아!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에요. 미리 고백할 일이 있습니다.
고백? 대기번호 뽑고 기다려.
▶깜짝: 사랑 타령 아니거든요!
그러면 뭔데?
▶설명: 제 전공은 초등교육과정이에요. 그래서 중등교육과정은 아직 학생 시절의 지식밖에 없어서 전문성이 떨어져요. 부지런히 메뉴얼을 읽고 있지만, 제 경험담이 주를 이룰 거예요.
오! 교생 아가씨의 학창시절이라! 본인 주장처럼 미녀라면 남자 꽤 홀리고 다녔겠네. 혹시, 알렉스도?
▶단호: 사양했죠. 아! 안 그래도 검왕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제가 중등교육과정 입학시험을 치를 때는 저렇게 강하지 않았거든요. 심검이라니…. 그 경지는 체육 전공의 선배님 중에도 몇 분 안 되세요.
뭐야? 지금 나, 사기당한 거?
▶해명: 그건 아니에요. 입학시험은 학생의 수준에 맞춰서 난이도가 오르거나 내려가요. 시험 수준이 너무 낮거나 높으면 학생의 장단점을 파악하기 힘드니까요. 즉, 검왕이 저렇게 강해진 원인은 강한수 생도님에게 있다는 뜻이에요.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회귀(재시험)하면 보통은 1레벨로 전락한다. 그래서 알렉스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만큼 약해진다.
하지만 이건 재시험이 아닌 입학시험.
1레벨로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비슷한 환경을 만들려면, 환경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겨울에 수영을 즐기기 위해 실내수영장을 찾는 게 아니라, 계절을 여름으로 바꾼다고 할까!
참으로 신(神)다운 발상이다.
그렇다면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나는 알렉스를 쓰러트렸는데?
▶당혹: 시스템이 판독하지 못한 강함이 강한수 생도님께 있다는 뜻이겠죠. 원래는 패배해서 그의 가르침을 다시 받게 돼요. 그리고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검왕이 이 수준이라면, 5대 재앙은 얼마나 강해졌을지…. 상상이 가질 않네요.
절대평가 대신 상대평가를 적용한 시스템 결함으로 인해서 입학시험이 중등교육시험보다 어렵게 변했단다.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
하지만 그 취지는 잘 알겠다.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란 거군.”
내 수준에 맞춰서 강해진 동료들을 모아서 더욱 어처구니없는 수준으로 강화된 5대 재앙을 ‘우정의 힘’으로 쓰러트리는 것.
입학시험이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용사님. 라누벨이 치유사에게 물어봤는데요. 알렉스 씨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합류하기 힘들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대륙 최강의 전위(前衛)인데 큰일이네요.”
“왜? 기사왕이 있잖아.”
“기사왕? 그분은 누군가요?”
“아! 그 마조히스트(Masochist)는 아직 영업 전인가?”
아직은 재야(在野)에서 자해하며 수련 중인 것이다. 거창한 ‘기사왕’이란 칭호도 한참 뒤에 얻는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이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기 방패가 없어도 될 만큼 내 몸뚱이는 견고하다. 부족하다면 주위의 협찬을 더 받아서 강해지면 된다.
알렉스와 우정의 힘은 필요 없다.
“용사님. 알렉스 씨의 몸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아서 일정이 변경됐어요. 원래는 열흘 동안 그의 특훈을 받고, 성왕국에서 성녀님이랑 합류 후, 동쪽의 상인공화국에서 배를 타고 동대륙으로 넘어갈 예정이었거든요. 성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세요?”
이것도 변경된 사항인 듯했다.
원래는 알렉스의 시험에 통과하거나 1년 동안 처맞아야 훈련이 끝나는데, 완전한 초짜도 아니고 복습이라서 열흘로 단축한 모양이다.
미미하게 융통성을 발휘한 부분들이 보인다.
소심한 에디터(editor)가 자잘하게 수정한 느낌?
▶보충: 소심한지는 모르지만요. 교육과정이 시대를 거듭할수록 발전하고 있는 건 틀림없어요. 대선배님께 들은 이야기인데요. 먼 과거에는 용사는 남성, 동료는 여성이란 고정관념 때문에 무척 답답하셨대요. 그 마지막 흔적이 성녀라는 직업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군!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줘서 고마워! 교생 아가씨!
▶뿌잉: 수다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했어요.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중등교육과정 매뉴얼만 보고 있으려니 속이 울렁거려요. 그러니 이 정도는 양해해주세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그렇지, 비밀 친구.
언제든 너무 힘들면 이 MAX급 용사님에게 말해. 대기번호 무시하고 위로해줄게.
“용사님? 라누벨의 이야기를 듣고 계세요?”
“아니. 뭐라고 했었지? 너무나 하찮은 라누벨의 하찮은 이야기라서 전혀 듣고 있지 않았어.”
“우우…. 성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따로 계획이 있으세요?”
“있지.”
“엇! 정말요? 없으시면 라누벨이 근사한 술집을 소개해드리려고 했거든요. 그 집의 양고기와 포도주 궁합이 정말 환상적이에요!”
...양고기와 포도주라고?
“혹시, 토니가 운영하는 술집을 말하는 거니?”
“헛!? 어떻게 아셨어요? 라누벨의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술집이었던 모양이네요. 이제 막 판타지아 대륙으로 넘어온 용사님이 단번에 아실 정도라니!”
“그야….”
교생 아가씨의 말이 맞았다.
교육과정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전직 암살자 토니의 술집은, 내가 암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라누벨에게 추천했던 맛집이다.
그런데 역으로 추천받게 될 줄이야….
내 추측이 맞는다면, 라누벨이 내 2회차 흉내를 내서 암시장으로 나를 인도할 것이다.
미래의 요정왕 실비아랑 마주치도록.
이러면 그녀를 노예로 사는 것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동료로 합류시킬 수 있다.
매우 자연스럽게.
“용사님. 가실래요? 라누벨이 살게요!”
이 망할 년이 귀여운 척하면서 저작권 위반을 대놓고 하네!
아무튼,
“아니.”
“엣?! 왜요?!”
나는 정령을 기막히게 잘 다루는 요정왕이 필요 없다. 이미 내 몸에 정령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을뿐더러, 정령을 다루는 데 있어서 훨씬 대단한 존재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누벨 덕분에 다음 일정이 결정됐다.
“우리는 요정왕국으로 간다.”
최초의 정령을 만나기 위해.
내 신기술인 정입자를 발전시키려면, 정입자의 또 다른 사용자이자 선지자인 그녀의 조언이 꼭 필요하니까.
검왕 알렉스.
요정왕 실비아.
쓸모없는 두 잡것은 일단 아웃(Out)이다.
우정의 힘? 내가 3배로 강해지면 해결될 사소한 문제다.
▶걱정: 왕궁을 지키는 요정들도 엄청나게 강해져 있을 텐데요…?
그렇진 않을 거야, 교생 아가씨!
순진한 척하면서 성희롱하는 정령들이 내 편이기 때문이다. 정령 없는 요정은 호구나 다름없고.
요정왕국을 점령하는 데 필요한 준비물은,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자릿세면 충분하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되는 정령은 당장 방 빼!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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