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70화 (170/430)

 170화

[11회차] 울면 안 돼♪

거주민들의 충성도를 확인한 나는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출장을 가려면 돈이 필요한 법.

그건 세상을 구할 용사님도 예외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지 못할망정, 숙박료부터 음식값, 통행세, 이용료 등을 꼬박꼬박 받아내는 판타지아 원주민의 인성에는 두 손, 두 발 다 든 지 오래.

하지만 이것도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용사여! 면담을 신청하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지원금을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로 짐의 시간을 빼앗기 위함이었는가? 도시 밖으로 나가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그 부산물과 전리품을 팔아서 직접 마련하게. 경험치도 올릴 수 있고 얼마나 좋은가?”

만두 국왕이 통통한 볼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말로는 안 했지만, 굉장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옆에서 들려온 간드러진 목소리 탓이다.

“폐하. 용사님께 그리 말씀하시다니, 소녀는 이 가슴이 찢어질 만큼 폐하께 실망했습니다. 지원금 이상을 원하시더라도 다 드릴 마음으로 섬겨야 할 위대한 분이십니다.”

“왕비! 그 무슨…!”

“소첩의 말이 틀렸는지요?”

당장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만두 국왕을 빤히 쳐다보는 왕비.

그녀의 가녀린 손은 통통한 남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틀리지 않았소. 짐이 살짝 흥분했던 모양이오.”

침착했던 표정이 바보처럼 풀린 만두 국왕이 대답했다. 그리고 시종을 불러서 내게 큼직한 돈주머니를 건네도록 지시했다.

왕비의 명령 같은 부탁대로.

E급 악마추종자인 왕비는 첫 대면 때부터 나의 마기Z를 느끼고 몸이 한껏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애타게 바라보며 말했다.

“용사님. 공사다망하신 줄은 아오나, 나중에 소녀에게 시간을 할애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절대로 남편 옆에서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스킬 ‘마성’에 삼켜진 국왕은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생각해보지.”

“무한한 영광입니다!”

짤랑!

두둑한 돈주머니를 습득한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중앙대륙 서쪽 끝에 처박혀 있는 요정왕국까지 단숨에 가려면 돈이 꽤 많이 든다. 그리고 그 여행자금을 확보한 이상, 더는 이 왕국에 볼일이 없었다.

다음 과제는 공간이동 마법진이다.

돈이 있는 이상, 사용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폐쇄적인 요정왕국까지 직통으로 가는 방법은 없었다.

이 방화벽을 깨려면 요정왕국 관계자가 꼭 필요하다.

그것도 왕국에서 신뢰하는 간부로.

나는 국외에서 활동 중인 그런 존재를 무려 다섯이나 알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는 실비아가 있지만, 그 난폭한 요정이 암시장에서 참교육을 당하길 바라기에 그쪽은 논외로 쳤다.

그렇기에,

“용사님! 성왕국으로 바로 가시게요? 요정왕국으로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라누벨은 그렇게 기억하는데요.”

만두왕국에서 운영하는 마탑에서 성왕국의 어느 도시로 공간이동 마법을 주문하는 내게 라누벨이 참견했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계속 따라올 거면 닥쳐.”

“우우….”

나와 라누벨은 성왕국의 숨겨진 신전으로 이동했다.

9회차 때, 나는 요정왕국이 자랑하는 다섯 기사 중 하나인 ‘물의 기사’를 방랑극단에서 구해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죽여서 입막음하려는 배신자 ‘불의 기사’를 쓰러트리고 이 비밀스러운 장소를 알아냈다.

나는 그 장소를 또 찾았다.

진입하는 방식은 이전이랑 같았다.

우물로 착각되는 굴뚝을 타고 신전으로 내려가서, 구덩이 함정의 사각지대에 숨겨진 통로로 아지트에 진입.

그곳에서 나는 요정을 만날 수 있었다.

“누, 누구냐!”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해주는 게 인지상정. 야만적인 판타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무료로 빛을 뿌리고 다니는 MAX급 용사님이시다.”

“용사가 내 순결을…!”

이곳에는 혼자뿐이라고 방심한 걸까.

그 요정의 정체는 불의 기사.

마법사E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알몸을 닦고는 전신 거울 앞에서 여러 자세를 취하며 자아도취를 즐기고 있었다.

“진지하게 묻는데. 뭐 하고 있었니? 혹시…?”

“묻지 마라! 자살하기 전에!”

“신개념 협박인걸!”

동료들과 왕비를 배신할 만큼 대범한 줄 알았던 불의 기사는, 고작 알몸을 보인 정도로 간단히 무력화됐다.

정의로운 용사님을 성범죄자로 오해하다니!

대단한 실례다.

그래서 오해를 풀어주기로 했다.

“나는 너처럼 누추한 요정을 건드리거나 나체를 머릿속에 기억해둘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이미 그럭저럭 괜찮게 생긴 요정을 소유 중이거든. 잘 봐.”

나는 정령C를 소환했다.

숨만 쉬어도 악마를 갈아버리는 퇴마사이며, 요정 용사의 마누라이자 동료였던 그녀의 외모는 요정 중에서도 발군을 자랑했다.

등급을 매기자면 ‘전설’급.

같잖은 마법사 나부랭이랑 격이 다르다.

“왕비님보다 아름다운 요정이 현존할 줄이야….”

불의 기사가 넋을 놓은 채 정령C를 바라봤다.

시골에서 올라온 연예인 지망생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여배우를 우연히 목격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제 안심이 되지?”

“제 주인님은 당신처럼 변변찮은 요정에게 관심 없으시니 괜한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정령C가 슬그머니 내 몸에 기댔다.

내 겨드랑이에 달라붙어서 변태처럼 킁킁거리던 물의 정령이 항의했지만, 나랑 팔짱을 낀 요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용사가 존재한 줄은….”

불의 기사는 용사님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빠르게 오해를 풀었다.

그리고 빠르게 대화할 자세를 갖췄다.

“마법사E. 나를 요정왕국까지 공간이동 시켜줘.”

“왕국을 멸망시킬 생각이라면 협조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용사야.”

그런 비합리적인 짓을 하지 않는다.

“당신이기 때문에 불안해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어때서?”

“...마법사로서 직감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인간이라고. 당신은 스스로 용사라고 소개했지만, 증명할 방법이-”

뿅!

나는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했다.

“...용사가 맞네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당신을 믿을 수 없기에 요정왕국의 심장인 수도 마탑으로는 이동하지 않을 겁니다. 그 대신, 제 연구실의 공간이동 마법진을 쓸 건데, 그래도 상관없겠죠?”

“문제없어.”

수도에서 지나치게 떨어져 있지만 않다면 말이다.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

공간이동 마법은 미리 약속해둔 지점까지 시공간을 무시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하는 마법이다.

듣기에는 대단히 편리하지만, 비행기가 뜨고 내리려면 공항이 필요하듯이 이 마법도 ‘승객’의 범위를 지정할 마법진이 꼭 필요하다.

나는 불의 기사에게 그 마법진 좌표와 암호를 받았다.

이건 일종의 집 열쇠.

언제 어디서든 공간이동 마법진과 충분한 촉매제만 있다면, 불의 기사 연구실로 곧장 이동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바로 지금처럼.

파아앗!

나와 라누벨, 마법사E는 어느 어두컴컴한 장소로 이동했다.

벽에는 각종 시험관과 약재, 약병, 서적 등이 빼곡했다.

“참 누추한 곳이네.”

“실례입니다. 그리고 암호는 조만간 바꿀 예정이니, 다음에는 이용할 생각을 포기하세요.”

“그래? 그건 곤란한데….”

“당신이 곤란하든 말든 여긴 저의 집-”

우득.

나는 무방비 상태로 등을 보인 마법사E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 부드럽게 어루만져줬다.

마법사E의 몸이 예쁘게 허물어졌다.

“레벨들이 높아서 참 좋아.”

어째서 999레벨 너머가 보이는지 모르지만, 몬스터든 요정이든 1000레벨을 넘기는 존재가 많아서 경험치 회수하는 맛이 났다.

▶설명: 그 부분은 제가 당장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메뉴얼에서 최근에 읽었거든요! 그건 입학시험 특수예요. 강한수 생도님 말씀처럼 1000레벨이 넘는 존재가 많은데, 그러면 능력치를 확인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레벨을 볼 수 있는 한도가 입학시험 한정으로 9999레벨까지 확장됐어요.

유익한 설명 고마워, 교생 아가씨!

죽은 마법사E의 시신은 스킬 ‘축복’의 효과 중 하나인 ‘죽음의 축복’으로 흔적도 없이 지웠다.

원래는 가까운 신전을 방문해서 해야 할 일이지만, 신성Z와 축복MAX를 보유한 용사님보다 우수한 신관은 판타지아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다.

“후생에는 열등한 요정 말고 인간으로 태어나길….”

명복도 빌어주는 착한 용사님이다.

내 오지랖이란 참….

“용사님, 용사님! 이제 라누벨도 말하면 안 될까요? 새장 속의 파랑새처럼 자유를 빼앗긴 라누벨의 입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요!”

“하지 마. 그리고 파랑새를 모독하지 마.”

어디서 라누벨 따위랑 비교해?

“하지만 정말 놀라운걸요! 라누벨은 용사님이 요정왕국으로 가신다고 말씀하실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었거든요. 그런데 생뚱맞게 동쪽의 성왕국에 가시더니, 서쪽의 요정왕국으로 또 한 번에! 이게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란 게 믿기지 않아요!”

참아온 주둥이를 열고 폭포수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한 라누벨의 설명처럼, 아직 용사력 1일도 지나지 않았다.

이게 다 공간이동 마법진과 돈주머니의 힘!

만두 국왕의 주장처럼 사냥으로 돈을 직접 모았다면, 지금도 만두 왕궁 주변을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대단히 비효율적이다.

“...라누벨.”

“네! 용사님!”

“할 말 끝났으면 다시 입 다물어.”

“아직 안 끝났어요! 조금 전에 요정은 왜 죽이신 거예요?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던전의 비밀통로에 숨어 사는 사악한 마녀 같은 인상이긴 했지만, 요정이잖아요!”

“요정은 무조건 착하다는 편견은 좀 버려.”

“사실이 그런데요?”

“꼰대처럼 우기지 말고 세상을 좀 더 넓게 봐. 세상에는 말이야. 요정 노예랑 결혼하려는 못생긴 인간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노예로 팔린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뻔뻔한 요정이 아주 많아. 참나! 노예로도 안 사줘서 굶어 죽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우우….”

라누벨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긴 했지만, 내 말에 반박하진 않았다.

나는 연구실을 둘러보며 출구를 찾았다.

음침한 마법사답게 창문 하나 없는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도 주변이 밝아지진 않았다.

“벌써 밤이군.”

그다지 한 것도 없는데 하루가 지나버렸다.

마탑의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때마다 신분검사와 준비시간 같은 자잘한 절차를 밟느라 은근히 시간을 많이 소요한 탓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빠른 편이다.

신성Z의 나는 ‘아무튼 신성한 손님’이기에 대기열 없이 최우선순위로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었으니까.

마법사E의 실험실 위치도 생각보다 좋았다.

요정왕국 수도 밖이긴 했지만, 그건 내가 지금 찾아가려는 푸줏간도 마찬가지.

나는 푸줏간의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최초의 정령이 감금된 하수구까지 단번에 이동할 예정이다.

“용사님. 안 주무세요?”

“너는 세계가 위기에 빠졌는데 잠이 오니?”

“어…. 라누벨은 잘 오는 것 같아요. 세계는 용사님이 구해주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거예요. 그게 진리니까요!”

“말을 말자.”

라누벨이랑 대화를 시도한 내 잘못이 크다.

그나저나….

뿅! 뿅! 뿅!

와글와글!

정령 없이는 굴러가질 않는 요정왕국인 탓일까?

정령의 밀도가 높은 동네인 만큼, 비빌 자리가 없어서 손가락만 빨며 내 주위를 맴도는 정령의 숫자 또한 급격히 늘어났다.

그 숫자는 줄어들긴커녕 정령들끼리 입소문을 타면서 점점 더 바글바글해지기만 했다.

이래선 몰래 침입하기 힘들다.

나는 정령들에게 말했다.

“계속 따라올 거면 들키지 않게 조심해. 난폭한 요정들에게 발각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알겠어?”

순진한 척하는 정령들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인간 용사는 우는 요정에게는 도움을 안 주신대요~♬ 인간 용사는 알고 계신대요♪ 누가 착한 요정인지 나쁜 요정인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요~♬”

묘하게 가사는 다르지만, 익숙한 동요 멜로디.

요정의 가정(家庭)에선, 인간 용사가 호구라고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조기교육 해온 모양….

퍼엉-! 콰직! 휘이잉~

그 괴상한 동요가 들려온 방향에서 불이 치솟고 땅이 갈라졌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이 잔해를 쓸어버렸다.

“이거, 혹시…?”

목격자(?)들을 제거한 정령들이 하이파이브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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