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11회차] 사랑합니다, 주인님!
노래 가사를 오해한 정령들이 일으킨 소란을 듣고 깬 요정들이 집 밖으로 우르르 뛰쳐 나왔다. 그리고 노랫말처럼 진짜 ‘인간 용사’를 발견했다.
대체로 반응은,
“인간이다.”
“정말로 인간이네.”
“귀가 둥글어.”
“근육이 엄청 많아.”
“인간은 처음 봐.”
신기한 육식동물을 발견한 것 같은 시선이었다.
요정왕의 폐쇄적인 정책 탓에 왕국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던 요정들이 대부분인 까닭.
앳된 외모를 가졌어도 100살이 넘는데, 세상 경험은 10살짜리 인간 꼬마보다도 못했다.
호기심, 두려움.
크게 둘로 나뉜 시선들이 나를 관찰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령들이 미쳐 날뛴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야!”
“진정해, 친구! 진정- 크악?!”
내 몸에서 쫓겨나기 싫은 정령들이 목격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탓이다.
여기에 요정들은 정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능력치가 문제였다.
▷종족: 엘프
▷레벨: 1254
▷직업: 농부(토지→농사↑)
▷스킬: 정령S 축복S 농사A 휴식A 요리B…
▷상태: 경악
이랬던 것이,
▷종족: 엘프
▷레벨: 1254
▷직업: 농부(토지→농사↑)
▷스킬: 농사A 휴식A 요리B 채집B 교감B…
▷상태: 혼란, 경악
이렇게 바뀌었다.
대다수 요정의 유일한 전투 스킬이었던 ‘정령’과 ‘축복’이 빠졌다. 지금까지 그 둘만으로도 웬만한 위기는 다 헤쳐올 수 있었기에 문제없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두 스킬이 요정들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유일한 공격수단을 빼앗긴 거로 모자라, 적으로 돌아섰으니...
내 예상대로, 요정들은 움직이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야야, 머리만 남기고 묻어.”
요정들이 내게 송곳니를 드러낸 것도 아닐뿐더러, 나는 요정왕국을 정복하러 온 게 아니니까.
최초의 정령을 몰래 만나러 온 것뿐이다.
푹! 푹! 푹! 푹!
여기저기서 삽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주문을 받아들인 정령들이 요정을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걸 그만두고 땅에 묻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체형이 말뚝처럼 마른 요정들은 걸리는 것 없이 쑥쑥 땅에 박혔다.
높은 레벨을 활용해서 자력으로 빠져나온 요정은 정말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레벨이 높아도 증폭할 ‘근력’ 스킬이 없었다.
힘쓰는 일까지 정령들에게 맡긴 요정 종족의 말로였다.
“낯선 인간이여. 폭력을 그만두고 멈추십시오.”
이때, 내 앞을 가로막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그 선두에 선 미청년이 요정왕국 3대 비보인 정령검 엔드미온을 뽑으며 경고했다.
나는 이 요정이 누군지 매우 잘 알고 있다.
“나서스 왕자...”
통칭, 중간보스.
내가 블랙박스를 활용할 수 있게 된 2회차 이후로는 그다지 ‘중간보스’의 위용을 느끼기 힘들었는데, 입학시험의 특수성으로 그 악몽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종족: 아크 엘프
▷레벨: 9999+
▷직업: 검사(검술=절단↑)
▷스킬: 검술ZZZ 검기ZZ 재생Z 위엄Z 정령Z…
▷상태: 경계
검왕 알렉스가 심검을 난사할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나서스 왕자의 능력치는 양심 없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그는 스킬 ‘정령’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일부 정령들이 추종자처럼 그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갈등과 고뇌에 휩싸인 정령들의 얼굴이 무척 괴로워 보였다.
아무튼,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남자는 진짜라고.
그의 부관인 요정A도 어마어마하긴 마찬가지였다.
▷종족: 하프 엘프
▷레벨: 9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불굴ZZ 검술Z 마법Z 정령Z 궁술Z···
▷상태: 신중
예전에는 가슴만 무시무시했는데, 이젠 능력치마저 MAX급 용사님을 뛰어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서스 왕자는 가슴 큰 부관만 대동한 게 아니다.
요정왕국을 수호하는 기사들. 왕비를 호위하는 5대 기사 다음가는 정예 중에서 정령사가 아닌 자들만 끌고 왔다.
양과 질.
양쪽으로 불리한 상황.
정말 오랜만에 겪는 열세였다.
“정령들이 날뛰는 건 당신 때문입니까?”
“나를 위협하는 난폭한 요정들을 발견한 정령들이 과잉 충성을 보이긴 했지.”
“인간의 나라였다면 저희가 사과할 문제이지만, 이곳은 요정의 나라입니다. 낯선 인간을 발견하고 위협하는 행동은 지극히 정당한 대응이라고 판단됩니다만? 떳떳하다면 이 나라를 방문한 용무를 밝히시고 무장을 해제해주십시오.”
역시, 왕의 자질이 넘치는 남자다운 언변이다.
이번만큼은 나도 반박할 말이나 대응이 떠오르질 않았다.
상대가 나서스 왕자가 아닌 실비아 공주였다면 “저 더러운 인간을 죽여!”라고 외치면서 먼저 빌미를 제공해줬을 텐데.
이 왕자는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았다.
정론으로 나를 압박했다.
하지만 나도 이대로 순순히 무장해제 할 마음이 없었다.
나서스 왕자는 신뢰하지만, 인간혐오가 극에 달한 현직 요정왕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내 선택은 하나.
“제 목적은 왕궁 지하에 감금된 최초의 정령을 구하는 겁니다. 나서스 왕자님께서 의(義)와 협(俠)을 아신다면 제 앞길을 가로막지 마십시오.”
“...피차 물러설 수 없겠군요.”
“이미 알고 있었다?”
“낯선 인간이여. 당신이 어떻게 그 비밀을 아는지 묻고 싶지만, 그건 제압한 뒤로 미루지요. 당신 외에도 누가 더 아는지 들어야 하니... 음? 어떻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방금 나는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당했다.
왕자의 심검에.
하지만 왕관 쓴 마음의 정령이 알렉스 때처럼 무마해줬다. 검술ZZZ 효과는 내게 무용지물인 셈.
그렇다고 상황이 유리해진 건 아니었다.
심검이 안 통한다는 걸 깨닫자마자 전술을 바꾼 나서스 왕자가 내게 도약하며 정령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나는 여기에 성검 뉴클리온으로 대응했다.
캉! 캉! 캉! 캉!
...막기 급급했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서스 왕자의 심검을 막았다고 해서, 그의 ZZZ등급에 오른 순수한 검술 실력마저 줄어드는 건 아니었던 탓이다.
검술MAX에서 멈춘 내가 이렇게 버티는 게 기적이었다.
“당신, 인간이 맞습니까?”
기습에 실패한 나서스 왕자가 한 걸음 물러서며 내게 물었다.
검술은 그가 우위에 있었지만, 육체적인 능력은 내가 압도적으로 앞선 상황이었다.
높은 반사신경과 좋은 무기로 견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그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솔직히 답해줬다.
“아니. 그리고 생각할 틈을 줘서 고마워.”
혼자 싸워서 될 문제가 아니다.
조금 전에는 나서스 왕자만 상대했지만, 지금부터는 요정A를 포함한 강력한 잡것들도 참전할 테니까.
나도 지원군이 필요했다.
우정의 힘?
아니다.
이건 ‘지배의 힘’이다.
내가 명령하면 가족과 애인도 공격해서 무자비하게 살해할 수 있는 무기.
뿅! 뿅! 뿅! 뿅!
늙은 정령 4인방을 소환했다.
나처럼 상대의 능력치를 볼 수 있는 그들은 나서스 왕자와 요정A를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월자가 이렇게 흔했나...?”
“검술이 ZZZ등급이라고? 미친...”
“주인님?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요?”
“제가 알던 그곳이 맞나요...?”
나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들의 불평불만을 들어주지 않았다.
은하계를 다스리는 선배님이 신뢰하는 수하들답게 활약해줬으면 좋겠다.
설마, 일개 왕국의 졸개들에게 패배하진 않겠지?
“과연... 최초의 정령을 구한다기에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굉장한 실력파 정령사였군.”
“정령사? 섭섭한 소리. 아직 안 끝났어.”
나는 찰떡과 쑥떡을 소환했다.
LCD 모니터인 주제에 자기들이 아름답다고 착각하는 요정들 앞에서 절대적인 미모를 뽐내는 성녀.
그리고 아직 5살도 안 됐는데 어른보다 훨씬 큰 덩치를 자랑하는 녹색 새끼용.
날개를 활짝 펼친 그 둘이 하늘을 뒤덮었다.
“요정왕국이군요?”
“Greeee-!”
내가 현재 뽑아낼 수 있는 최고전력.
물론, 여기서 내가 빠지면 나서스 왕자에게 간단히 썰려버릴 오합지졸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나서스 왕자만 빠지면, 부관인 요정A를 포함한 잡것들은 경험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성스러운 천사와 거대한 용까지? 당신은 대체...?”
“용사다.”
나서스 왕자의 물음에 나는 짤막하게 답해줬다.
그는 무척 유감이란 표정을 지었다.
“...그랬군요. 역대 용사들은 저희 요정 종족에 이상한 환상을 품으며 무한한 호감을 품었는데, 진실에 접근한 이번 용사는 다르군요. 하하! 용사를 죽이면 세계가 멸망하고, 살려두면 요정이 멸족하는 상황이라니? 용사님. 부탁드립니다. 진실을 모른 척하고 넘길 수 없습니까? 요정은 정령 없이 살 수 없는 하등한 종족입니다. 선처를 베풀어주십시오.”
“그건 최초의 정령에게 말해.”
“용사님을 정중히 모신 후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평화로운 대화는 거기서 끝.
그래도 이 틈에 무고한 시민을 대피시킨다는 왕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달성된 게 아닐까?
“훌륭한 왕자님께 예우(禮遇)를 담아서 전력으로.”
안 그러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목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14049레벨→13000레벨
내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잡다한 영령(英靈)들이여.
나에게 힘을!
*
매우 치열한 접전이었다.
경험치를 소모해서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수십 배 뻥튀기할 수 있는 내 승리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지만, 아무런 희생 없이 요정왕국 최강전력을 이기진 못했다.
“부디, 선처를...”
성검 뉴클리온에 심장을 관통당한 나서스 왕자가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경험치란 전리품을 회수했다.
8000레벨→12281레벨
하지만 그 경험치는 대단히 초라했다.
10배씩 터무니없이 강해지는 내 증폭에 맞서기 위해, 나서스 왕자도 맞불을 놓은 탓이다.
그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스킬 ‘폭주’를 사용했다.
원래는 나서스 왕자에게 없었던 스킬인데, 불리해지자마자 자력으로 전투 중에 습득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F등급의 비효율적인 스킬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이건 그 결과.
“이겨도 손해네!”
전투 시작 전보다 레벨이 살짝 감소했다.
피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요정A와 잡것들의 협공에 정령B와 정령D가 사망했다.
그런데 누군지 잘 기억이 안 나기에 교생 아가씨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교생 아가씨?
▶해설: 정령B의 정체는 검성(劍星) 실레리온. 강한수 생도님이 지구에서 쓰러트린 요정 용사예요. 최초의 정령을 감시하는 요정 실레시아의 오라버니이기도 하답니다. 정령D의 이름은 시리엘. 최초의 용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전해지는 천사장 비루엘의 딸이에요.
그렇군! 명복을 빌어줄게!
하지만 그들의 신상정보를 다시 떠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대다수 정령이 그러하듯, 물질세계에서 죽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부활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탓이다.
죽으면 그걸로 끝!
삼투압(滲透壓) 현상처럼 다른 정령에게 흡수되기 때문이다.
정령A+정령B=정령A+
정령C+정령D=정령C+
...요렇게.
그런데 내 정령 속성이 ‘인간’이기 때문일까?
재활용센터인 줄 알았던 정령 합체가 대단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정령A>
▷종족: 올드 스피릿
▷레벨: 999+
▷직업: 왕자(국력=기력↑)
▷스킬: 기력Z 침투Z 검술MAX 마기MAX 내성SSS…
▷상태: 종속
<정령A+>
▷종족: 올드 스피릿
▷레벨: 9999+
▷직업: 왕자(국력=기력↑)
▷스킬: 검술ZZ 침투ZZ 맷집Z 기력Z 내성Z…
▷상태: 종속, 당혹
극단적으로 강해진 정령A의 소감을 들어보겠다.
“묘하군. 내가 어둠의 왕자 보리스란 사실은 틀림없는데, 실레리온의 지식과 경험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귀도 요정처럼 뾰족해지고... 하지만 난감한걸. 그가 아내랑 보낸 시간까지 생생하게 떠오르는 건...”
“당장 머릿속에서 지우세요, 보리스 왕자님. 정화되고 싶지 않으시다면♪”
사망한 정령B의 아내였던 정령C가 싱긋 웃었다.
음험한 살인미소이긴 했지만, 그녀의 현재 기분이 대단히 좋다고 느낀 건 절대로 내 착각이 아니다.
출렁출렁~
천사였던 정령D의 우월한 육체를 계승한 덕분이다.
순혈 요정이었던 그녀에게 능력치 상승은 사소한 이득 같았다.
<정령C>
▷종족: 올드 스피릿
▷레벨: 999+
▷직업: 퇴마사(악마→피해↑)
▷스킬: 항마ZZ 정화ZZ 신성Z 쌍검MAX 민첩MAX…
▷상태: 종속
<정령C+>
▷종족: 올드 스피릿
▷레벨: 9999+
▷직업: 퇴마사(악마→피해↑)
▷스킬: 정화ZZZ 항마ZZ 신성ZZ 축복Z 비행Z…
▷상태: 종속, 흥분
이전처럼 잡것으로 치부하기엔 능력치가 너무 좋아졌다. 악마와 수컷은 그녀의 흔들리는 열매만 봐도 녹아내리지 않을까?
나는 두 정령을 번갈아봤다.
그리고 결정했다.
“...보리스.”
“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 이름을 똑바로 부르는 거지?”
“정말 미안하다.”
“뭐-?”
탁!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정령C++>
▷종족: 스피릿 레볼루션
▷레벨: 9999+
▷직업: 퇴마사(악마→피해↑)
▷스킬: 정화ZZZ 검술ZZZ 항마ZZZ 신성ZZ 침투ZZ…
▷상태: 종속, 흥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보리스, 네 희생을 잊지 않을게.
“정령C. 오늘부터는 네가 보리스야. 남자이름 같아서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말해.”
“그, 그럴 리가요! 사랑합니다, 주인님!”
이별의 슬픔을 가슴에 묻고, MAX급 용사 일행은 요정왕국 수도에 단 하나뿐인 푸줏간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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