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72화 (172/430)

 172화

[11회차] 우주인

“저기, 용사님? 용사님~”

“......”

“라누벨의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라누벨의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라누벨의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라누벨! 라누벨! 라누벨!”

“야야, 알겠으니 좀 닥쳐!”

“닥치면 어떻게 말해요!”

“뭔데 난리야?”

찰떡과 쑥떡, 보리스의 소환을 해제한 나는 푸줏간의 냉동실에 숨겨진 통로를 통해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요정이란 이유만으로, 용사의 동료를 자처하면서 일절 돕지 않고 수수방관했던 라누벨이 귀찮게 나를 불렀다.

능지처참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길 것이지!

“어떻게 뭐든 잘 아세요?”

“내가 누구냐?”

“용사님이죠.”

“이유가 더 필요하냐?”

“우우…. 라누벨이 할 일이 없어졌어요. 라누벨의 역할은 용사의 길잡이인데, 용사님이 더 잘 아셔서 라누벨의 존재가치가 희박해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며칠 이내에 백수가 될지도 몰라요.”

“그거 잘됐네.”

“어? 정말요? 라누벨이 아무것도 안 하고 따라다녀도 좋으시다면 상관없고요.”

“내 말을 곡해하면 곤란하지!”

쓸모없으면 양심껏 빠지는 게 도리 아닌가?

귀여운 척하면서 따라다니는 백수는 이 용사님이 용납할 수 없다!

“그래도 라누벨이 사라지면 허전하고 섭섭하실걸요?”

“허전? 섭섭?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 세상이 2% 정도 더 아름답게 보이더라.”

“정말인지 두고 볼게요!”

“...어? 정말로 떠나주게?”

“왜요? 갑자기 후회가 막 몰려오세요?”

“그건 아닌데, 신기해서.”

좌우로 씰룩이며 무고한 총각들을 괴롭혀온 간악한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도 쫄래쫄래 따라오던 라누벨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떠나준다고?

“조금 전에 신탁이 내려왔거든요.”

“신탁이?”

1회차 때부터 신탁은 몇 차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신출내기 용사 시절의 내가 ‘마왕을 쓰러트리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라는 정보를 얻은 출처도 ‘신탁’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창구(窓口) 중 하나가 라누벨이었다.

2회차부터는 진실을 아는 내가 주도적으로 모험일정표를 짰지만, 1회차 때는 신탁을 받은 라누벨이 길잡이 역할을 했었다.

그래서 개고생을 정말 많이 했었지….

이가 갈릴 정도로!

“용사가 더 소환될 예정이래요. 그래도 라누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요…. 소환될 용사가 좀 많은 모양이에요.”

“많다면 몇 명?”

“대충 300명쯤?”

...이건 정말 이상한데. 교생 아가씨?

▶당혹: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여기는 강한수 생도님의 실력에 맞춰진 입학시험장이니까요. 다른 생도가 중간에 난입할 수 없어요. 하지만 고고학자 라누벨이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건 확실해요. 그녀에게 신탁이 내려지는 광경을 수십 차례 포착했거든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무식한 알렉스 따위가 심검을 사용할 때부터 이 입학시험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교육계를 좀먹는 이 사기꾼들!

▶난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무슨 일인지 빠르게 알아볼게요!

그렇게 대화하는 사이에 1차 목적지에 도착했다.

푸줏간 아래에 이런 사악한-

“꿈 많은 숙녀의 방이네요.”

“사악한- 앙? 라누벨. 잘 들어. 여기는 최초의 정령을 감금한 악독한 포주의 생활공간이야. 타인을 억압하려는 비틀린 욕망의 악취가 사방에서 진동하고 있거늘! 너는 숙녀들을 모욕했어. 당장 우주에 사는 모든 숙녀에게 사과해.”

“하, 하지만 딱 봐도 숙녀의 방인데요!”

“깔끔히 인정하고 사과해.”

“우우….”

나는 라누벨에게 입 다물도록 다시 주문했다.

기껏 소환한 쑥떡과 찰떡, 보리스를 바로 돌려보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라누벨을 1차 목적지에 대기하도록 한 나는 홀로 2차, 최종 목적지를 향해 조심히 나아갔다.

살금살금.

높은 제단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 꼭대기.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악마의 사슬에 ‘대(大)’자로 묶인 정령의 반투명한 잠자리 날개와 민망하게 벌어진 다리가 보였다.

최초의 정령.

그녀는 등 뒤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쉿.”

끄덕끄덕.

나를 따라온 정령들도 입을 다물었다.

사악한 요정을 쓰러트리고 자기들의 여왕을 구해내는 중요한 임무를 술래잡기로 착각하는 것 같았지만,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그쯤은 용서해줄 수 있다.

나는 이해심 넘치는 MAX급 용사니까!

1회차 때, 붙잡힌 사람들을 보자마자 “그 여인의 몸에서 손을 떼! 변태 악당아!”라고 외치며 돌격하는 동료들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잠입 계획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돌격하지 왜 잠입한 건데?

잠입 실패로 파탄 날 뻔한 상황을 내가 간신히 수습한 후에 동료들에게 따지면, 그들은 “어떻게 그 상황에서 참을 생각을 하지?”라면서 역으로 내 인성을 비난했었다.

아무튼,

“지금은 평온한걸.”

방해하는 동료가 주위에 없었다.

지구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조금 떨어진 거리, 왕궁 정원 지하의 원래 출입구를 바라보면서 침입자가 오길 기다리는 요정B가 보였다.

보스K의 둘째 부인.

남편을 배신하고 최초의 정령을 감금한 악당이다.

속옷조차 안 입은 알몸을 화려한 장신구와 피어싱으로 장식한 그녀의 파격적인 패션은 방어력 0.

물론, 능력치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종족: 그랜드 엘프

▷레벨: 9999+

▷직업: 수호자(수호→피해↓)

▷스킬: 정령ZZZ 축복ZZ 최면ZZ 휴식ZZ 민첩ZZ…

▷상태: 수호, 해동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정면돌파하지 않고 조용히 잠입한 이유가 바로 이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이니까.

뿅!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했다.

그리고 곧바로 내 손에서 미끄러지듯 날아간 칼날은 요정B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방어력 0의 복장, 방어계열 스킬 빈약.

레벨이 아무리 높아도 이런 상태에서 내 성검을 막을 순 없었다.

정령친화력이 ZZZ급인 그녀를 따르는 강력한 정령들이 이곳에는 무척 많았지만, 전투경험이 없었다.

암살시도인 줄 모른 그들도 다른 정령들처럼 술래잡기(?)에 동참하여 침묵했다. 그리고 상황을 눈치챘을 때는 너무 늦었다.

이런 정령들이 뒤늦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어가는 요정B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오또케! 오또케!”를 연발하는 것뿐.

“어, 어떻게 침입을…?”

잘록한 허리의 정중앙에 성검이 박힌 요정B가 피투성이의 몸을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따르는 정령들의 부축과 스킬 축복으로 간신히 유예기간을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에게 싸울 여력은 없었다.

“네가 가르쳐줘서.”

“회귀…. 그렇다면 당신은….”

내 한마디에 상황을 바로 이해한 요정B은 하고 싶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12281레벨→20156레벨

레벨이 무지막지하게 올랐다.

긴 세월을 살아온 존재답게 요정B의 경험치가 풍부했던 덕분이다. 그러면서도 방어력은 취약하기까지!

현직 요정왕을 능가하는 경험치 덩어리였다.

“마약 용사! 죽은 요정 암컷의 알몸은 그만 쳐다보고 얼른 나를 풀어줘!”

이변을 눈치채고 나를 발견한 최초의 정령이 잠시를 못 기다리고 버둥거렸다.

“뭐냐, 그 마약왕 같은 호칭은.”

“심심- 어흠! 심사숙고 끝에 내가 그렇게 정했다! 한 번이라도 그 체취(體臭)를 맡은 정령은 헤어나올 수 없는 마약 용사라고.”

최초의 정령이 학명(學名)을 정한 학자 같은 발언을 했다.

나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제단을 올랐다. 그리고 정령의 탁구공 크기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가까이 해봤다.

콧대 높은 정령의 코가 벌렁거린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정령의 고개가 돌아갔다.

위, 아래, 오른쪽, 왼쪽, 앞, 뒤….

주인의 손에 들린 간식을 갈망하는 애완동물 같은 반응이다.

재미있어서 한참을 그렇게 노는데, 자신의 추태를 뒤늦게 깨달은 최초의 정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마약으로 장난치는 거 아니다!”

“마음씨 착한 용사를 불길한 마약 취급하는 건 괜찮고?”

“그건 사실이잖아?”

나는 반박하는 대신 본론을 꺼냈다.

“최초의 마약중독자. 정입자에 대해서 아는 대로 설명해봐.”

*

질질 끌면서 비싸게 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자유와 마약(?)의 유혹에 굴복한 최초의 정령은 자기가 아는 내용을 술술 이야기했다.

과학과 공상과학, 판타지를 넘나들었다.

“즉, 대기의 구성성분처럼 암흑물질도 한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 게 아니란 거군?”

“맞아. 정입자는 그 일부지.”

고대의 인간들은 투명한 대기(大氣)를 하나의 물질로 취급했다.

하지만 대기는 78%의 질소와 20.9%의 산소, 0.9%의 아르곤 등의 기체로 이루어져 있다.

암흑물질도 마찬가지다.

지구의 인류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간신히 파악만 한 상태. 그 구성성분까지 알아내진 못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마약 용사는 착각하고 있다. 암흑물질이 우주의 30%쯤 차지한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90% 이상이다. 그중 정입자의 비율은 70%쯤 하지. 이 행성을 비추는 태양조차 어쩌지 못하는 생명체들이 지배자를 자칭하면서 오만하게 굴 수 있는 것도 정입자의 비호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30%라고? 그건 대체 어느 멍청이가 말한 거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까지 진지하게 공부한 게 아니라서.

내 지식은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와 과학잡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우주에도 정령이 사냐?”

“당연하다. 우주에도 정입자가 있으니까. 무식한 요정과 인간들이 정령을 5가지 속성으로 한정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다양하다. 영겁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식으로 진화하긴 했으나, 빛과 어둠에서 태어난 천사와 악마도 넓게 보면 정령이지. 그리고 지금도 계속 속성이 늘어나는 중이다. 바로 너처럼. 인간 같은 정령이여.”

“아!”

어느 순간부터 별 기대 안 하고 듣던 나는 솜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내 종족특성 탓이다.

▷종류: 종족

▶명칭: 네츄럴 스피릿

▶등급: 고유

▶고유1: 경험치를 제어한다.

▶고유2: 정령으로 임명한다.

▷특성1: 정령의 사랑을 받는다.

▷특성2: 자연의 가호를 받는다.

▷특성3: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

▷종족1: 친화력이 우수하다.

▷종족2: 하나의 속성에 특화한다.

스킬 의존도를 낮춘 내 전투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종족 빼면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내 착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특성1, 특성2, 특성3.

이 셋을 따로 분리해놓은 것이다.

최초의 정령이 들려준 설명대로라면, 비슷한 수준을 넘어서서 완전히 똑같은 효과가 중복된 셈.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활용해왔다는 뜻이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유1, 고유2.

암흑물질이 우주의 90%를 차지한다면 경험치는 뭘까?

능력치는 최초의 악마(어둠)와 최초의 천사(빛)가 힘을 합쳐서 만들어졌다고, 일전에 들었다.

그리고 내가 정입자를 다룰 수 있는 이유.

그건, 내가 제어하는 경험치도 결국은 암흑물질의 구성성분이란 해석이 된다.

정입자로 구성된 정령처럼.

“하하, 하하하….”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우주랑 관련된 스킬을 하나 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류: 스킬

▷명칭: 행운

▷등급: S

▷SS: 상대의 운을 빼앗는다.

▷S: 운이 마르지 않는다.

▷A: 우주의 기운이 가끔 돕는다.

▷B: 함정을 가끔 무시한다.

▷C: 운이 약간 상승한다.

▷D: 추락해도 죽지 않는다.

▷E: 눈먼 화살을 가끔 피한다.

▷F: 운이 좋아진다.

인간의 가능성과 운은 연관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운은 우주의 기운이랑 연계되어 있다.

가능성→행운→우주→정령→경험치→정입자→가능성….

단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러다가 결론에 도달했다.

행운S→행운SS→행운SSS→행운MAX→삭제

네츄럴 스피릿→ 유니버설 휴먼

20156레벨→1레벨

나는 완전한 우주인(宇宙人)이 됐다.

▷종류: 종족

▶명칭: 유니버설 휴먼

▶등급: 태초

▶태초1: 우주를 티끌만큼 제어한다.

▷특성1: 우주의 편애를 받는다.

▷종족1: 아무튼 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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