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11회차] 편애
그것은 굉장히 묘한 감각이었다.
나는 내 능력과 한계를 뚜렷하게 알기에 늘 겸손하게 살아왔다.
누구나 나처럼 56년쯤 판타지 세계에 틀어박히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 인식이 살짝 바뀌려고 한다.
1회차의 라누벨이 “당신은 선택받은 용사입니다!”라고 했을 때도 내가 특별한 존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운 없이 판타지 세계로 납치된 지구인.
이유도 없이 아무 사람이나 공격하는 정신병자에게 걸린 피해자 같은 신세였다.
그런데,
“후천성 천재가 된 기분인걸?”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全能感).
철저한 준비도 없이 단순한 오기로 밀어붙여도 무조건 성공하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천운(天運)이 따라야 한다고?
내게는 1% 가능성도 100%나 다름없었다.
능력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선택지가 늘어나고,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다음 계획을 짜기 힘들어졌다.
이걸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던가?
“마약 용사.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리고 얼른 이 사슬을 풀어줘! 약속해놓고 그냥 가면 영원히 저주할 테다!”
최초의 정령 때문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 변화를 느끼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 잠깐을 못 참냐?”
“인간의 다이어트랑 비슷하다. 주위에 맛없는 것만 있으면 견딜 수 있지만, 맛있는 것들에 둘러싸이면 괴로워지는 이치지.”
“네가 다이어트를 알아?”
정령인데?
“나는 최초의 정령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았다고. 결혼식 열흘 전부터 살인적인 다이어트로 몸매관리에 들어간 공주만 500명 넘게 봤다. 그 뒤에 요요현상과 임신으로 흔한 아줌마가 돼가는 광경도 포함해서. 흠. 요정은 그런 면에선 참 자유로워.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거든.”
현대지구에선 비만을 안 좋게 보고, 실제로도 건강에 매우 안 좋은 영향을 준다.
하지만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라는 성질 자체에는 죄가 없다. 영양소를 몸에 비축해두는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요정이 문제다.
규칙적인 식생활이 깨지면 바로 영양실조로 쓰러지니까. 인간처럼 미리 먹어서 한두 끼쯤 거르는 방식을 쓸 수 없다.
아무튼,
나는 최초의 정령을 속박하고 있는 악마의 사슬을 건드렸다.
부스스···.
그것만으로도 사슬은 바스러졌다.
1레벨→1872레벨
내게 경험치를 싹 빨렸기 때문이다.
악마의 사슬은 속박한 대상의 경험치를 빨아들이면서 강화된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경험치를 내게 빨리면서 그 기능은 물론이고 형태마저 상실했다.
여기까진 좋다.
단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슈우우우-
묘한 흡입력이 내 영혼을 어딘가로 빨아들이려 했다.
아직은 그 힘이 미약하지만,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라서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풀려난 최초의 정령이 내 머리 위에 팔자 좋게 드러누우며 말했다.
“약속을 지킨 상으로 내가 좋은 정보를 알려줄게. 자연의 사랑을 받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져. 하지만 뭐든 과하면 안 좋다고 하잖아? 이것도 마찬가지야. 자연의 사랑이 지나치면 그 일부로 흡수돼버려. 내가 영겁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무한히 강해지지 못하고 마약 용사의 손가락에 농락당한 것도 그 때문이야.”
“아니, 그건 별개의 문제 같은데···.”
“같아! 내가 봤어!”
“어, 그래. 알겠으니 남의 머리에 엉덩이 문대지 마!”
뭐든 가능할 것 같았던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사랑이 이래서 무섭다는 것 같다.
“자연에 흡수되어 하나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안락사나 다름없으니 조심해. 아! 방법을 알려주는 걸 깜빡했네. 힘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해. 사랑이 클수록 자연에 빌릴 수 있는 권한도 커지지만, 그만큼 흡수될 확률도 높아지거든.”
“...편애라면?”
“히히, 히히힛···!”
갑자기 최초의 정령이 어깨와 엉덩이를 들썩이며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뭐야?”
“너무 놀랍잖아! 편애! 자연에 사랑받는 존재는 이 우주에 별처럼 많지만, 너는 특별히 관심받는 중이란 뜻이야! 물론, 편애는 영원하지 않아. 하지만 편애받는 동안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최초의 천사를 소멸시키는 것도 포함해서! 대가는 네 안락사지만.”
“대가가 너무 비싸잖아!”
“남들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쌀걸? 히히힛!”
진심으로 판타지 신을 죽이고 싶지만, 같이 죽는 건 사양이다.
“그 외에 주의할 점은?”
“능력치를 최대한 낮춰. 이전에는 도움이 됐겠지만, 자연에서 비롯된 스킬과 레벨은 너의 안락사를 부채질하는 속박일 뿐이야. 너에게 허락된 능력치를 100이라고 했을 때, 방어와 보조에 50을 사용하면 공격에 50밖에 못 쓰겠지? 그러니 방어와 보조를 포기하고 100을 온전히 공격에 투자하는 거야! 방어는 걱정하지 마. 자연의 편애를 받는 존재는 은하계가 폭발해도 안 죽어. 절대로.”
“흐음···.”
“내 말을 안 믿는 모양이네.”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지.”
스르륵.
나는 등에서 솟아난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펄럭이며 수직으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이곳은 요정왕국 왕궁 정원의 지하.
하지만 내 머리가 단단한 천장이랑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드드드드-
지진이 발생하면서 천장이 갈라진 덕분이다.
땅의 정령이 눈치껏 도운 게 아니다. 우주의 의지가 내 행동에 장단을 맞춰서 발현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긴 커다란 균열을 통해서 지상까지 단번에 탈출했다.
아래쪽에 남겨둔 라누벨?
알 바 아니다.
“자연의 집중관심을 받는다는 건 역시 대단하네. 지진의 여파로 왕궁이 단번에 둘로 쪼개졌어. 아주 멋져!”
“또 해줄 조언 없어?”
“그건 능력치를 포기한 뒤에 해줄게.”
“쩝.”
요정왕국에 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작다고 평가하기에는 내가 깨달음으로 얻은 성과가 매우 컸지만, 원래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었다.
다음 일정은···.
“용사님~ 라누벨을 떼놓고 가시면 어떡해요!”
“...깜빡했네.”
예전의 라누벨이라면 내가 사라져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11회차의 라누벨은 초월영역 스킬을 다수 보유한 대마법사였다.
...라누벨이 대마법사라니?
아주 막 나가는 세기말 설정 같다.
“용사님! 용사님! 큰일이에요! 이미 소환됐거나 소환될 예정인 용사가 약 500명인데, 그중에 라누벨이 소환해야 하는 용사가 50명이 넘는대요! 과로사할지도 몰라요!”
“축하할 일이군.”
꼭 죽어줬으면 좋겠다.
“도와주실 거죠?”
“아니. 우리의 모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 라누벨, 하루 동안 따라오느라 수고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우우···.”
라누벨이 떠나는 척하면서 나를 힐끔힐끔 돌아봤다.
붙잡아주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나는 무시하고 요정왕국의 심장부인 왕궁으로 향했다.
“인간 따위가 감히 내 왕궁에 그 더러운 발을···!”
길길이 날뛰는 요정이 1마리.
현직 요정왕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왕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보물창고에 틀어박혀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종족: 아크 엘프
▷레벨: 9999+
▷직업: 우왕(평판→통솔↓)
▷스킬: 정령ZZZ 궁술S 검술S 위엄A 정치A···
▷상태: 격분
그의 능력치는 뻥튀기가 됐어도 변변찮았다. 레벨은 높지만, 정령 스킬 외에는 볼 거 없던 이전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거 참···.”
보물창고에서 요정왕국 3대 비보 중 하나인 ‘요정왕의 눈물’만 챙겨갈 예정이었던 나로선 조금 난감해졌다.
이 왕국과 요정들에게는 더는 볼일 없거늘.
슝! 슝! 슝!
정령이 봉인된 요정들이 내게 일제히 화살을 쐈다.
하지만 그 화살들은 전부 내 몸을 피했다. 단시간에 수백 발이 날아들었지만, 단 한 발도 닿지 않았다.
고의로 안 맞추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
운을 넘어서서 노골적인 조작이 의심되는 광경이었다.
반면,
“어이쿠!”
내 손에서 미끄러진 성검 뉴클리온은 다수의 요정을 수확하듯 베어 넘기고 마지막에 요정왕의 가슴에 박혔다.
회피를 시도한 요정도 있었다.
하지만 발목을 접질리거나 동료랑 충돌해서 성검을 피하지 못했다.
토막 난 요정의 시체와 붉은 피가 난무하긴 했지만, 그 과정은 삼류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이, 이대로 못 죽는다···!”
성검에 찔려 죽어가는 요정왕이 두 눈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러더니 환한 빛에 휩싸였다.
뭐지? 자폭인가?
“정령으로 환생하는 거야.”
내 머리 위에 나태한 자세로 누워있던 최초의 정령이 나긋한 말투로 해설해줬다.
나는 흥미롭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심상치 않다고 파악되자마자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긴장감도 느낄 수 없었다.
팝콘이 없는 게 아쉬운걸.
물질세계에서 반쯤 이탈한 요정왕의 몸에서 화려한 왕족의 옷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드러난 알몸이 차츰 변화했다.
마르긴 했어도 남자 같은 체형과 외모를 지녔던 요정왕의 턱선이 가늘어지고 어깨도 좁아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아···!”
요정왕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탄식했다.
남자에게 소중한 그것이 쪼그라들면서 퇴화하더니, 끝끝내 완전히 자취를 감추며 민둥산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약 용사. 정령은 원래 없어. 그것을 거부한 빛의 정령은 천사가 됐고, 어둠의 정령은 악마가 됐지. 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저 녀석의 정령친화력은 강제된 맹약에서 비롯된 것. 원래는 F급도 안 되는 머저리에게 초월영역은 과분하지.”
최초의 정령이 담담히 해설해줬다.
요정들이 가진 정령친화력은 정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등급이 아무리 높아도 온전히 그 힘을 끌어낼 수 없다.
물론, 겉핥기식은 가능하다.
정령으로 환생한 요정왕처럼.
▷종족: 아크 스피릿
▷레벨: 9999+
▷직업: 우왕(평판→통솔↓)
▷스킬: 대지ZZ 지진Z 농사Z 위엄A 정치A···
▷상태: 격분
고자가 된 요정왕의 몸은 은은한 황토색을 발하고 있었다. 땅의 정령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래서 스킬에도 큰 변동이 생겼다.
하지만 정령으로 환생하며 사라진 줄 알았던 정령 스킬의 ZZ등급 효과가 이어서 발현됐다.
번쩍! 번쩍! 번쩍!
내 성검에 쓰러진 요정들이 정령으로 환생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그들은 정령의 5가지 속성 중 하나씩 갖고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요정왕 주위로 군대처럼 집결했다.
본격적인 2차전?
그런 이벤트는 벌어지지 않았다.
“꿇어.”
최초의 정령이 한마디 하면서 상황이 종료됐다.
요정에서 정령으로 환생한 시점에 항복한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요정B도 죽는 그 순간까지 정령으로는 환생하지 않았다.
사용하면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멍청한 요정왕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내 머리 위에 누워있는 정령을 이제야 발견한 듯했다.
“엘브하임의 후손들은 참 멍청하구나···. 그 유감스럽긴 해도 영리했던 요정의 혈통이 어쩌다가···.”
최초의 정령이 옛 친구를 떠올리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마약 용사는 요정을 어떻게 하고 싶지? 나를 구해준 건 너다. 그러니 결정권도 너에게 주겠다.”
“흠. 어차피 사라질 세계이긴 하지만···.”
*
나는 정령들을 난폭한 요정의 지배로부터 해방했다.
그리고 요정왕국 엘브하임을 새롭게 개편했다.
정령은 귀족, 요정은 평민.
그리고 정령을 억압해온 요정 간부와 왕족은 살았든 죽었든 노예로 강등했다.
“세세한 사항은 너희가 알아서 해.”
평민(요정)이 나라를 다스리고 귀족(정령)은 얌전히 놀기만 하는 이상적인 국가관이 완성됐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아닐까!
“마약 용사. 민주주의에 당장 사과해라.”
“내가 뭘 어쨌다고?”
“너, 이과지?”
“그런데?”
“그럴 줄 알았다.”
우리는 요정왕국의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라누벨은 동대륙의 5대 재앙부터 쓰러트린다고 했지만, 중앙대륙 서쪽에 자리한 요정왕국에서 굳이 반대편으로 되돌아가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대륙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서대륙의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 토벌(0/1)
시체와 영혼을 모욕하는, 취미가 독특한 친구다.
1회차 이후로 만난 적이 없으니, 거의 50년 만에 재회하는 셈. 얼마나 강해졌는지 또한 궁금했다.
그런 내 앞을 거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름하여, 요정산맥!
중앙대륙과 서대륙은 요정왕국과 요정산맥으로 교류가 거의 차단되어 있다.
“요정산맥? 내가 아는 이름은 그게 아닌데···.”
“내가 그렇게 정했어.”
“이해했다. 마약 용사가 마약 용사를 했다는 거네.”
“이 정령이 뭐래?”
그렇게 막 요정산맥을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빼꼼: 강한수 생도님, 지금 안 바쁘시죠? 제가 열심히 알아보고 왔는데요. 꼭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진짜 큰일이랍니다!
내 비밀 친구가 정보를 물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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