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11회차] Gob! Gob! ⑱
교생 아가씨. 흥분하지 말고 이야기해봐.
▶설명: 이미 소환됐거나 소환예정인 생도는 총 505명이에요. 임시방편으로 그들의 시작지점을 대륙마다 101명씩 분산시켜놨어요. 사태가 이렇게 된 원인은 지나치게 높은 난이도로 설정된 강한수 생도님의 입학시험장 때문이에요.
교생 아가씨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판타지아 대륙을 은하계 사이즈의 피자 한 판이라고 해보자.
피자는 인원수에 맞춰서 100조각이든 500조각이든 무한정 나눌 수 있다. 하지만 피자 위에 올릴 수 있는 전체 토핑의 양은 제한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피자 조각의 크기는 공평하게 전부 같지만, 피자의 핵심인 토핑이 전부 내 조각으로 몰렸다. S급 원주민을 Z급으로 업그레이드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그래서 다른 조각은 밀가루 덩어리.
505명이나 되는 용사가 내 피자 조각으로 들이닥친 이유다.
뻔뻔하고 탐욕스러운 연놈들!
▶정정: 엄밀히 따지면, 다른 생도들도 원해서 온 건 아니에요. 토핑 없는 피자는 피자가 아니라서 불려온 거죠. 더욱 쉽게 말하면, 이 입학시험장은 약 500,000개의 초등교육장을 만들 수 있는 재료로 이루어져 있어요. 여기로 소환된 505명은 교실 없는 생도들인 셈이죠.
교생 아가씨의 장황한 설명은 잘 알아들었다.
하지만 하필 왜 여기인데?
▶변호: 이미 다른 초등교육장에도 최소 3명씩 들어간 상태예요. 그러고도 남은 인원을 이곳에 몰아넣은 거죠. 교육과정이 전혀 다른 중등교육장에 초등교육 생도들을 넣을 순 없잖아요? 시스템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거랍니다.
합리적이라….
교사들도 버거운 ZZZ등급의 악당들이 바글바글한 이곳에 초등학생들을 몰아넣은 게 합리적이라고?
▶난감: 시스템도 그것을 인지하고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모양이에요. 저에게 잘해주시는 선배님 말씀에 따르면, 앞으로 더 많은 생도가 이 입학시험장에 소환될 예정이래요. 초등교육과정 페스티벌도 개편돼서 10위까지 여기로 소환될 거라던데요?
나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보험으로 들어둔 팩토리아를 지구에 상주시킨다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침착해졌다.
이 땅에 용사가 몇 명이 소환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5대 재앙을 전부 쓰러트리기만 하면 된다.
달라질 건 없었- 음?
“고블린 무리군.”
고블린(Goblin).
요정과 난쟁이의 단점만 모아놓은 몬스터다.
비실비실하고 신장도 작다. 그리고 이런 열등감 때문에 인간종을 상대로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강간, 고문, 장난, 모욕, 약탈….
그래서 판타지아 대륙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고블린에게 생포될 것 같으면 자살해라.-
이건 빈말이 아니다.
고블린이랑 하루만 보내면 멀쩡했던 사람도 정신병자가 된다.
정신만 망가지면 그나마 다행이다. 고블린의 성형수술은 잘생긴 왕자님도 10분이면 괴물로 만든다.
바로 저 사내처럼.
요정산맥을 넘고 있는 나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나는 굉장히 바쁜 MAX급 용사님이니까.
내가 토벌을 늦추고 하루 쉴 때마다 판타지아 대륙 원주민들은 하루 더 고통받기 때문이다.
고작 한두 명 때문에 발목 잡힐 순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고블린에게 성형수술 당하고 있는 남자의 능력치 탓이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896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검술A 체력A 맷집B 마법B 마력B…
▷상태: 공포, 절망, 고통, 혼란, 출혈…
레벨과 스킬이 제법 균형 잡힌 ‘용사’였다.
용사력 이틀째에 896레벨을 찍긴 어렵다. 나처럼 블랙박스를 가졌거나 복학생일 것이다.
그러니 벌써 외지(外地)로 나온 거겠지.
“흠. 낯선 서대륙에서 익숙한 중앙대륙으로 넘어가려던 용사인 것 같은데….”
고블린 따위에게 짓밟힐 능력치는 절대 아니다.
단지, 여기가 이상한 것이다.
▷종족: 고블린
▷레벨: 703
▷직업: 산적(지형→기습↑)
▷스킬: 기습S 광기A 잠복A 악의B 근성B…
▷상태: 유희, 경상
중앙대륙과 서대륙을 분단하는 요정산맥의 몬스터는 강하기로 악명 높지만, 그래도 고블린이 오우거 수준으로 강하진 않다.
그런데 이런 초강력 고블린이 40마리!
주위에 몇 마리 죽은 거로 봐서는 원래 50마리쯤 됐었던 무리 같다.
“Gob! Gob!”
“Goooob!”
“Gob~ Goob~”
그들은 죽은 동료의 원한을 열심히 갚고 있었다.
고블린들이 싼 오물을 뒤집어쓴 용사.
두피가 여기저기 뜯겨 있고, 코와 입술도 절단되고 없었다. 손가락 몇 개와 남성의 보물도 보이지 않았다.
“아으, 아아으~ 요, 용서~아으~”
인사불성이 된 용사는 애원했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개의치 않고 임플란트 시술에 들어갔다. 멀쩡한 이빨을 하나씩 뽑고 뾰족한 돌멩이를 대신 쑤셔 넣었다.
일반인이었으면 벌써 죽었을 터.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선 심장이 멈추고 머리가 잘려도 부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지 않는다.
고블린들도 그 사실을 안다.
그리고 놈들은 얇고 길게 인간을 괴롭힐 줄 안다. 평생을 이것만 연구한 전문가처럼.
“Goooob-!”
“하읔! 으읔!”
자세히 보니, 고블린에게 생포된 용사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다수의 고블린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고블린도 수컷으로 이루어진 몬스터 종족. 시커먼 수컷 용사보다 암컷 쪽이 훨씬 인기 있었다.
그리고 이 인기 탓에 서열로 괴롭히는 순서가 정해졌다.
여성 용사의 가슴을 움켜쥔 그 녀석은 다른 고블린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래도 인간종보다 작다는 건 변함없었지만.
▷종족: 빅 고블린
▷레벨: 1206
▷직업: 산적(지형→기습↑)
▷스킬: 근력SS 기습S 잠복S 통솔A 내성A…
▷상태: 쾌락
종족만 빼고 보면 용사의 동료라고 소개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녀석은 자기 레벨의 절반밖에 안 되는 인간 용사의 부드러운 육체를 찢어버릴 기세로 폭풍처럼 몰아붙이고 있었다.
▶충격: 도저히 못 보겠어요….
교생 아가씨. 이런 광경 처음 봐?
▶긍정: 네. 진짜 처음이에요. 그렇다고 순진한 어린애 취급하진 마세요! 저도 학창시절에 고블린의 악행을 수없이 목격했으니까요. 이처럼 젊고 아름다운 용사가 고블린 따위에게 당하는 건….
나는 고블린 무리 중앙에 착지했다.
놈들도 나를 발견했다.
번쩍!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면서 약 10마리의 고블린이 비명도 못 지르고 숯덩이로 변했다.
그리고 여기에 놀란 고블린들이 벌러덩 자빠졌다. 그런데 운이 나쁘게도 뾰족한 돌에 머리를 찍히면서 3마리가 추가로 사망.
화살에 맹독을 바르던 고블린은 뒷걸음치던 동료랑 충돌하면서 화살통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자기는 화살촉에 묻은 독에 죽고, 근처에서 서성이던 고블린들은 바닥에 흩어진 화살을 밟고 중독되어 쓰러졌다.
그리고 또….
“기가 막힌 행운 보정이군.”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고블린 무리가 알아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가장 어이없는 것은 빅 고블린이었다.
석탄을 가득 실은 기관차처럼 힘차게 날뛰던 녀석은 심장을 부여잡더니, 여성 용사를 깔아뭉개듯 그녀의 몸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차갑게 식어갔다.
남은 고블린은 몇 마리 안 됐다.
하지만 놈들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Gob! Gob~?!”
단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내게 돌격하던 고블린은 돌부리에 발이 걸리며 휘청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옆에서 달리던 동료를 단검으로 찔렀다. 그것도 하필 목에.
하지만 동료에게 당한 고블린도 만만치 않았다.
“Gob-!”
복수하고 죽었다.
그리고 남은 고블린은 2마리.
궁수였는데, 한 놈은 내 앞에 있고 또 한 놈은 뒤에 있었다. 거의 동시에 앞뒤에서 쏘아진 화살 2대가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푹! 푹!
두 고블린의 정수리에 정확히 박혔다.
처음부터 내가 아닌 동료를 노린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만큼 완벽한 활솜씨였다.
이것으로 고블린 무리는 전멸.
내가 한 일이라고는 첫 등장이 전부였다.
“은하계가 멸망해도 죽지 않는다더니….”
고블린 따위는 ‘우주의 편애’에 먼지처럼 쓸려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만능은 아니다. 너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대상에게는 적용되지 않거든. 그리고 우연만으로 쓰러트릴 수 없는 절대적인 강적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안락사 외에는.”
최초의 정령은 이 모든 게 즐거운 듯했다.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랄까.
“회복부터 해줘야 대화가 진행될 것 같네. 찰떡.”
“네, 주인님.”
내 부름에 응답한 성녀H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다양한 방식으로 죽은 고블린 무리 틈새에 있는 두 인간을 바로 포착해냈다.
그리고 바로 치료를 시작했다.
파앗!
성녀H의 손에서 쏘아진 빛이 두 용사를 감쌌다.
육체적인 부상은 순식간에 회복됐다. 그 대가로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지불하긴 했지만, 괴물 같은 몰골로 사는 것보다는 낫잖은가?
그러나 성녀의 치유도 완벽하진 않았다.
“헤, 헤헤, 헤헤헤….”
백마 탄 왕자님처럼 잘생긴 미남 용사가 자기 엄지손가락을 빨면서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연기로 보이진 않았다.
“얘는 틀렸네.”
최약체라고 깔보던 고블린에게 당한 정신적인 후유증으로 완전히 정신이 가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형수술 당한 이 용사가 거기에 해당했다.
나는 깔끔히 포기하고 다른 용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해주셔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흑흑!”
양팔로 자기 몸을 끌어안은 채 울기 시작하는 여성 용사.
너덜너덜해진 남성 용사랑 달리, 그녀는 팔다리가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어서 인대가 파열한 것 외에는 큰 외상이 없었다.
덕분에 치료도 간편!
정신적인 충격은 좀 있지만, 그건 유능한 정신과 의사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물어볼 게 있어.”
“은인께 뭐든 대답해드리고 싶지만, 먼저 장소부터 옮기면 안 될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장소라….”
내가 판타지 경력 57년이다.
자격증은 없지만, 몬스터에게서 구해낸 사람들의 정신치료도 꽤 했었다.
이 여자가 바라는 것도 쉽게 이해했다.
안전하다고 확신이 드는 장소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물에 빠진 것을 구해줬더니 보따리도 내놓으란 심보였지만, 울면서 죄송하다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
나는 이런 동향(同鄕)에게 비싸게 굴 만큼 매정한 용사가 아니다.
같은 고향별 출신끼리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요정왕국까지 가긴 번거로우니….”
나는 머리 위에 들러붙은 정령을 건드리며 불렀다.
“무례하다, 마약 용사! 마약으로 정령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나를 손가락으로 찌르다니! 언젠가 천벌 받을…. 앗?! 천벌도 빗나가는 뻔뻔한 용사잖아?! 으으…. 원통하다!”
“...시끄럽고. 여기에 근사한 요새 하나만 지어봐.”
“요새? 이 암컷 때문에?”
“돌아가기 귀찮아.”
여긴 요정산맥이다.
가장 가까운 요정 마을까지 가려면 한참 걸린다.
그럴 바에 여기에 안전한 요새 하나를 건설하는 편이 시간도 절약되고 훨씬 간편하다.
“보통은 그 반대로 생각한다만…. 알겠다. 애들아!”
최초의 정령이 정령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귀찮은 일들은 아래에 시키고 본인은 내 머리 위에 누워서 변태처럼 코를 킁킁거릴 거면서.
지시를 받은 왕관 쓴 정령들도 꼼짝하지 않았다.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들러붙은 채 고개만 까딱거리며 주위의 정령들에게 요새 건설을 시켰다.
정령이 순수하다고?
여긴 지독한 계급사회로 굴러간다.
쿠구구구구-
가파른 천연산맥 한복판에 찰흙을 구운 도자기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요새가 뚝딱 건설됐다.
그 직후, 나는 쑥떡을 소환했다.
“Greee?”
그새 덩치가 더 커진 것 같다. 얘는 뭘 먹어서 이리 잘 크는 걸까?
“쑥떡아. 눈치가 그리 없어서 어떡하냐?”
하지만 정신상태는 여전히 어린애였다.
“G, Greeee….”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잘 들어. 저 요새로 이 둘을 옮겨. 납치를 생활화하지 못하면 훌륭한 악룡이 될 수 없어. 명심해.”
“Gree!”
“어리바리하긴 해도 대답은 잘하네.”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이는 남성 용사는 구석에 처박아두고, 나는 부끄러운 알몸을 가릴 나뭇잎 3장을 여성 용사에게 친절히 건네며 대화를 유도했다.
“하다못해 제 예전 장비라도….”
“그건 내 전리품. 나도 먹고 살아야지.”
아무리 동향이라도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맨가슴으로 빅 고블린을 처치한 용사 아가씨. 판타지아 서대륙의 상황을 아는 대로 설명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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