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11회차] 갈갈이 쇼
▶깜짝: 강한수 생도님. 저 많은 스킬을 전부 간다고요?!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번에 새롭게 올린 초월영역 스킬들도 제물로 쓸 예정이라서 불필요하거나 쉽게 올릴 수 있는 순서로 골랐다. 스킬 ‘날조’를 MAX급에서 보류한 것도 그런 이유.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ZZZ급은 미친 짓이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올리기가 너무 힘들다.
보리스처럼 다른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리고 이때 또 의문이 들었다.
판타지 신은 왜 용사를 육성하는 걸까?
이번 입학시험장의 폐해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시스템으로 초월영역의 강자를 대량생산할 수 있다.
굳이 사회부적응자를 납치할 필요가 없다.
▶설명: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어요! 판타지아 출신은 다른 차원에서 살 수 없답니다. 바닷고기가 민물에서 살 수 없듯이요. 그리고 오크와 요정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육신과 영혼이 불균형해서 모든 능력을 완벽하게 끌어낼 수 없어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자구, 교생 아가씨!
지금은 쇼를 즐길 시간이다.
영재ZZ(35%)→영재ZZ(96%)
초월영역 스킬과 MAX급을 아낌없이 갈았다.
처음부터 각오하긴 했었지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러고도 숙련도가 부족할 줄이야!
이젠 멈출 수 없었다.
제물로 바쳐서 초월영역 스킬 숫자를 줄여도 숙련도에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새롭게 Z급 제물을 만들기에는 내가 올릴 수 있는 스킬의 가짓수가 부족했다.
“...잘 가라.”
나는 고민 끝에 스킬 ‘마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마왕 페도나르를 처치하면 손쉽게 다시 올릴 수 있고, 이미 마기의 감각도 익혔으니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력으로 마기를 생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주의 편애가 나와 함께하기에.
영재ZZ(96%)→영재ZZ(99%)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젠 제물로 쓸 스킬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진 스킬은 여전히 많았지만, 나머지는 전부 중복이다.
유일한 예외가 ‘날조’인데….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될 말이지!”
스킬 ‘신성’을 포기할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남은 숙련도가 얼마 안 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때였다.
정령F→ 정령MAX
행운F→ 행운MAX
내 종족 ‘우주인’에 흡수돼서 습득할 수 없었던 스킬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종족특성이 바뀐 건 아니었다.
스킬을 중복해서 복사했다고 할까!
“이놈의 운빨은….”
우주의 가호가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두려울 게 없었다.
영재ZZ(99%)→영재ZZZ
마침내 ZZZ급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절대 평탄하지 않았다.
시간상으로 따지면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 할 수 없지만, 문제는 습득할 수 있는 스킬의 가짓수다.
제물이 없으면 한계돌파 숙련도를 올릴 수 없으니까.
ZZZ급 스킬을 완성하기 위해선 전투계열, 생산계열, 보조계열 대부분의 스킬을 한계까지 습득해야 한다.
반면, 나는 꽤 쉽게 올린 편이다.
영재의 효과 중에는 숙련도를 뻥튀기해주는 게 있어서, 제물로 소모한 스킬을 다시 올리기 수월하다.
그리고 Z급 효과는 한계돌파를 쉽게 해준다. 필요한 제물의 숫자를 줄여주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전투계열과 특수계열, 약간의 생산계열만으로 ZZZ급 스킬을 단시간에 만들 수 있었다.
보통은 절대 불가능하다.
▷종류: 스킬
▷명칭: 영재
▷등급: ZZZ
▶G: ???
▶ZZZ: 평범한 척한다.
▶ZZ: 뿌리부터 재구성한다.
▶Z: 한계돌파가 약간 쉬워진다.
...
ZZZ급이 끝인 줄 알았는데 위에 더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더는 공부할 필요가 없을 줄 알았는데, 취업을 위해 대학교에서 또 공부해야 하는 심정이 이럴까?
물론, 나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판타지 야만인들에게 납치당했기에 그 심정을 모른다.
“1회차 끝날 때가 딱 이런 기분이었지…!”
마왕을 쓰러트리고 집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편협한 판타지 신이 내 올곧은 인성을 걸고넘어지면서 회귀시켰다.
그때는 정말….
▶영재ZZZ: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던 당신은 종족이란 울타리마저 초월했습니다. 하지만 그 특별함을 시기하는 범재들 때문에 평탄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해설을 읽어본 나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시기하는 범재들 때문에 고통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평범한 척할 필요가 있을까?
내 마음속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힘이 전부인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서는 강자가 대우받기 때문이다. 약자로 오해받으면 온갖 시비가 따라다니며 피곤해질 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힘들게 올린 ZZZ급 스킬이니까. 그 스킬 효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사용하지 않고 봉인해둘 순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마냥 나쁜 건 아니다.
정령으로 환생하면 보복당하는 탓에 Z급 효과를 봉인해둘 수밖에 없었던 요정들의 처지랑은 다르니까.
▶질문1: 가장 감추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①종족
②레벨
③직업
④스킬
⑤상태
뿌리부터 재구성하는 ZZ급 효과가 발동했을 때처럼 오지선다형 문제가 또 튀어나왔다.
두 번째이기에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민하지 않고 선택했다.
①종족
내 전투력의 99%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종족특성. 이것만 감춰도 탐색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평범한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질문2: 가장 감추기 싫은 것이 무엇입니까?
①종족
②레벨
③직업
④스킬
⑤상태
이번에는 그 반대 질문이었다.
감추고 싶은 게 있으면 공개하고 싶은 것도 있는 법!
판타지 야만인들에게 약자로 오해받아서 무시당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나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이번에도 선택은 쉬웠다.
②레벨
레벨은 숫자만 적혀 있기에 전투 스타일을 읽힐 염려가 없다.
그리고 레벨이 높으면 무시당하지 않는다.
능력치를 볼 수 없는 원주민들도 마법도구나 예민한 감각으로 상대의 레벨을 어림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이 아직 더 남았니?
▶질문3: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①종족
②레벨
③직업
④스킬
⑤상태
이건 첫 번째 질문이랑 중복된 느낌이다. 비밀처럼 가장 감추고 싶은 항목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닐까?
①종족
하지만 이어진 네 번째 질문에서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질문4: 가장 하찮은 것이 무엇입니까?
①종족
②레벨
③직업
④스킬
⑤상태
감추기 싫다고 해서 하찮으란 법은 없다. 나는 레벨을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만,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살짝 고민스러웠다.
망설일 것 없이 5번 ‘상태’를 선택해야 옳지만, 내게 직업 ‘용사’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태는 1회차 때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출혈, 저주, 골절, 현혹, 현자, 약화….
주치의처럼 내 상태를 실시간으로 살펴주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아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③직업
그리고 오지선다형 질문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선택이 전부 끝났다는 뜻.
▶영재ZZZ: 수고하셨습니다. 질의응답에 성실히 답변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선택은 회귀와 전생을 포함한 그 어떠한 방법으로 되돌릴 수 없으며, 누구도 그 결과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내용을 이해하셨으면 동의해주십시오. (예/아니오)
...능력치를 감추는 효과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순히 감추기만 한다면, ZZZ급 효과로는 손색이 많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더부살이들. 나를 잘 지키도록.”
뿌리부터 재구성할 때처럼 안전한 장소를 물색할 수도 있지만, 우주의 편애를 받는 나를 해코지할 존재는 없을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다.
그렇기에 나는 강행하기로 했다.
“마약 용사. 또 변신하냐?”
눈치 빠른 최초의 정령이 잽싸게 질문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무척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또 변신이다.”
“벌레처럼 자주 허물을 벗는 것 같다.”
“불만 있으면 방 빼든가.”
“항상 정의로워야 할 용사가 비겁하다! 마약에 찌든 불우한 정령을 책임지고 보살펴주지는 못할망정 협박하다니! 너에게 양심이 있긴 한 거냐? 물론, 방 빼겠다는 말은 아니다. 몸은 우리에게 맡겨두고 실컷 자라. 영원히 자라.”
“너는 어디 가서 순수하다고 자기소개하지 마라.”
나는 최초의 정령에게 악담을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자려나?
*
...이건 무슨 상황일까?
나는 분명히 ZZZ급 효과가 발동하며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면 변화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춰서 재정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여기가 아직 ‘꿈속’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용사님. 스킬을 만들겠다고요?”
“어머! 그런 게 가능해요?”
“용사님은 매번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스킬을 만든다니! 이건 신성모독- 웁웁!”
“언니는 분위기 파악 좀 하세요.”
수많은 미소녀에게 둘러싸인 최초의 용사가 보였다.
그는 내가 혼돈의 유물이나 동상, 초상화 등으로 파악해둔 용모보다 훨씬 젊었다.
그리고 표정이 살아있었다.
고뇌와 회한으로 얼룩진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견디지 못하고 제3 세계로 가출할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과실이 커지는 스킬이면 좋겠네.”
유감스러운 3대 요정왕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용사님의 하렘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엘브하임. 저는 당신처럼 시커먼 사고방식의 수컷을 갱생해주는 스킬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런 요정 수컷의 왼쪽 어깨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최초의 정령이 고상한 목소리로 핀잔줬다.
여신이라고 소개해도 믿어질 아름다운 자태!
하지만 나는 저 ‘실체를 가진 정령’이 이미지 관리 중이란 걸 알고 있기에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여기까지면 나도 그러려니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용사님의 하렘과 친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라누벨도 너무너무 궁금해요!”
“용사가 스킬을 만든다고? 거참….”
“코피를 멈추는 마법이면 좋겠습니다.”
“달링의 한계를 모르겠어요♡”
라누벨, 알렉스, 현자, 아쿠아, 성녀A, 성녀B, 성녀C, 용병왕, 도적왕, 해적왕, 검희, 산적왕, 쏘시아, 요정B, 일리나, 실비아, 도박왕, 성룡왕, 선룡왕, 기사왕….
내가 익히 아는 동료들이 바글바글했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가 비슷할 뿐이고 전혀 다른 인물도 있었다.
일리나, 실비아, 검희.
이 셋이 대표적이었다. 그중에 두 요정 여성은 유감스러운 요정왕의 뒤통수를 뚫어버릴 기세로 째려보고 있었는데, 그의 취향이 반영된 탓인지 요정치고 가슴이 매우 컸다.
아무튼,
이 개성 넘치는 무리의 중심에 선 청년은 ‘최초의 악마’를 쓰러트리고 ‘최초의 용사’로 불리게 된다.
그가 호기롭게 외쳤다.
“내가 영재ZZ 효과로 만든 이 스킬을 습득하면 악마와 천사처럼 타고난 속성으로 대립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어! 대단하지? 여러분에게 최초로 공개합니다! 이 스킬의 이름은 용자(勇者)야…!”
이 선언을 듣는 순간, 내 블랙박스의 모자이크가 해제됐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이때,
최초의 용사가 정확히 나를 쳐다봤다.
이건 내 착각이 아니다. 유령처럼 살짝 허공에 뜬 상태의 내 뒤편에는 서대륙의 어두컴컴한 하늘밖에 없었으니까.
그가 웃는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새로운 용자는 언제나 환영이야.”
최초의 용사를 중심으로 꿈의 세계가 시공의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비틀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미친 멀미. 개꿈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네!”
“미안하군. 개꿈이라서.”
“어…?”
“만나서 정말 반가워, 까마득한 후배 동지.”
그리고 내 눈앞에 ‘진짜’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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