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11회차] 내가 보증한
최초의 용사.
그는 10대 후반의 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소녀가장처럼 어딘가 지치고 삭은 것 같은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복장은 왕보다는 모험가 같았다. 하지만 상의에 빼곡하게 달린 훈장이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우주선 함장을 연상시켰다.
그 주위도 평범하지 않았다.
소파처럼 넓고 큰 의자에 앉은 그와 마주 보는 나의 좌우에는 수많은 남녀가 ‘11’자로 평행하게 서 있었다.
신하 같은 게 아니었다.
세상에 어느 왕이 신하들을 알몸으로 놔둔단 말인가?
그들의 목에는 이름표 같은 게 걸려 있었고, 깜빡거리는 눈꺼풀과 굴러가는 눈알 외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무척 기괴한 광경.
최초의 용사가 담담한 얼굴로 설명했다.
“내게 저항하거나 도전한 용사와 영웅들이지. 출중한 자들은 설득해서 등용했지만, 이처럼 어정쩡한 자들은 손님 접대용으로 쓴다네. 취향에 맞게 고르는 재미가 있어서 평가가 좋은 편이지. 후배에게도 권하고 싶지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다음으로 미루세.”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완전한 소환이 아니라는 의미.
그걸 증명하듯, 내 육체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일단, 스킬 용자의 창시자로서 후배의 성장을 순수하게 축하하네. 나는 용자의 기운을 계승한 자들을 전부 파악할 수 있지. 물론, 집중적으로 지켜보는 대상은 후배처럼 일정 경지를 넘어선 자들로 제한되어 있지만.”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가끔. 후배의 모험을 보고 있으면, 아내와 동료들에게 물렀던 내 과거가 너무 후회스러워서 견디기 힘들었거든. 이건 솔직한 마음이야. 아! 존엄한 여신 같았던 최초의 정령이 내숭쟁이였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이었어. 하하!”
“......”
아무래도 정말인 모양이다.
사생활 침해로 이 선배를 고소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호탕한 웃음을 멈춘 최초의 용사가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쭉 관찰하면서 내린 결론은, 후배는 남의 밑에서 일할 성격이 아니란 거야.”
“대가만 충분하면 할 용의가 있습니다만?”
손이 미끄러져서 왕족과 귀족을 죽인 적은 몇 번 있지만, 오해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아는 용사다.
“하하! 불충분하면 바로 목을 꺾을 셈이잖아?”
“......”
“후배. 이미 나는 한 차례 부하를 보내서 스카우트했어.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부하의 죽음. 그래도 나는 후배에게 관대함을 넘어서서 호의적으로 접근하고 있어. 그 점을 긍정적으로 봐줬으면 좋겠군.”
“인재가 주위에 없는 모양입니다?”
“맞아.”
“......”
최초의 용사가 시원하게 긍정하는 바람에 역으로 내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용자는 능력치를 무시하는 스킬이지. 하지만 이걸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 군대? 의미 없어. 능력치를 관리하는 신(神)에게 능력치로 대적할 순 없는 법. 오만했던 페도나르는 1대1로 나를 상대했다가 용자에 패배했지만, 그런 요행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아.”
“목표는 판타지 신?”
내 물음에 선배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올라갔다. 꼭 배우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용사의 미소였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가?”
“당연히.”
현재로선 무엇 하나 결정할 수 없었다.
비정상적인 능력치만큼이나 선배의 속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족: 휴먼
▷레벨: 362
▷직업: 군왕(군대=능력↑)
▷스킬: 용자SS 검술S 마법S 불굴S 면역S…
▷상태: 평온, 기대
최초의 용사란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낮아도 너무 낮았다.
이곳에 장식품처럼 서 있는 남녀보다도 떨어진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당장 내 옆에서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는 인어만 해도,
▷종족: 레전드 머메이드
▷레벨: 999+
▷직업: 마녀(미녀→마력↑)
▷스킬: 마력Z 마법MAX 마술MAX 현혹MAX 내성SSS…
▷상태: 석화, 망각
인어 여왕님이라고 소개해도 믿어질 정도로 완벽한 몸매와 얼굴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능력치가 상당히 준수했다.
이런 남녀가 이 자리에 수만 명이나 됐다.
지구 중국의 진시황릉 병마용을 보는 기분이다. 벌거벗겨진 채 멀쩡히 살아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평범한 척하는 영재ZZZ 효과가 틀림없다.
꿈속에서 최초의 용사가 영재ZZ 효과로 스킬 ‘용자’를 만들었다고 했으니, 그 뒤에 영재ZZZ에 올랐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시간이 다 됐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질문했다.
“까마득한 선배님. 마음대로 또 소환할 수 있습니까?”
“내가 옛 연인들에게 선물한 물건들을 찾아낸다면 가능하겠지. 혼돈의 유물이라? 참으로 불쾌한 명칭이긴 하지만, 그 세상에 혼돈을 부르긴 했지. 나중에 또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해보자고, 새로운 용자님.”
*
서늘한 기운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덕분에 내가 차가운 대지에 누워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돌아온 걸까?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전처럼 밝은 햇살이 나를 깨워주진 않았다. 이곳은 루시퍼 때문에 햇빛이 지상에 들지 않는 서대륙이었으니까.
“...내 손가락으로 뭐하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약 용사의 손가락이 우연히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뭐냐, 그 의심의 눈빛은?! 불쾌하다!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최초의 정령을 어떻게 보고!”
나는 분개하는 최초의 정령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몸에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능력치는?
▷종족: 휴먼
▷레벨: 3467
▷직업: 도적(약자→행운↑)
▷스킬: 행운B 신성C 정령D 날조D 요리D…
▷상태: 양호
아주 소박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이건 남들에게 보이는 ‘평범한 척하는 능력치’일 뿐, 실제 능력치는 그 뒤편에 따로 있었다.
▶종족: 유니버설 휴먼 플러스
▷레벨: 3467
▶직업: 용자(전원=1레벨)
▶스킬: 영재ZZZ 신성Z 편애MAX 날조MAX 요리MAX 오감MAX 공예MAX 창술MAX 산책MAX 광기MAX 기품MAX 비행MAX 불굴MAX 희롱MAX 권투MAX 조합MAX 검기MAX 학살MAX 무용MAX 심판MAX 불사MAX 연금MAX 격투MAX 체술MAX 불로MAX 건축MAX 영생MAX 근성MAX 토목MAX 탐색MAX 조화MAX 저축MAX 체력MAX 협상MAX 청소MAX 색적MAX 망각MAX 회복MAX 대장MAX 예절MAX 계산MAX 인내MAX 활력MAX 선동MAX 악령MAX 패기MAX 도축MAX 축복MAX 재봉MAX 빨래MAX 혼돈MAX 그림MAX 해체MAX 파괴MAX 내성MAX 근력MAX 맷집MAX 민첩MAX 저항MAX 조각MAX 야영MAX 사랑MAX 심력MAX 재생MAX 교화MAX 면역MAX 냉정MAX 철벽MAX 금강MAX 통솔MAX 지력MAX 도발MAX 감정MAX 투시MAX 지진MAX 겁화MAX 냉기MAX 태풍MAX 화기MAX 홍수MAX 관리MAX 평정MAX 수집MAX 채광MAX 농사MAX 지기MAX 수기MAX 제련MAX 예언MAX 토기MAX 채집MAX 낚시MAX 심기MAX 귀품MAX 수영MAX 사육MAX 교감MAX 예지MAX 살인MAX 설득MAX···
▷상태: 양호
오지선다형 질문에 성실히 답변한 성과가 있었다. 내 바람대로 레벨만 빼고 감추는 데 성공했다.
직업은 내가 여태까지 블랙박스라고 불렀던 스킬 용자. 모두가 공평하게 능력치를 낮추는 직업특성이었다. 최초의 용사는 그 창시자의 권한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는 듯했다.
종족특성도 살짝 강화됐다.
▷종류: 종족
▶명칭: 유니버설 휴먼 플러스
▶등급: 태초
▶태초1: 우주를 티끌만큼 제어한다.
▷특성1: 우주의 집착을 받는다.
▷종족1: 아무튼 정령이다.
특성이 아주 미묘하게 바뀌었다.
편애에서 집착으로.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니야…?”
기분 탓이 아니다.
내 영혼이 어딘가로 빨려드는 감각이 이전보다 심해졌다. 아직은 심각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언제 납치돼도 이상하지 않다는 위기의식이 내 척추를 타고 슬금슬금 올라왔다.
회피작업을 서두를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마약 용사. 갑자기 일어나서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중독 증세보다 위험한 건 세상에 없어. 영원히 책임진다고 얼른 약속해라.”
“약속은 됐고, 최초의 용사가 내숭쟁이라고 전해달래.”
“뭣이-?!”
예고도 없이 학교 선배에게 취업면접을 봐서 당혹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이 바뀌는 건 아니다.
쇼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Z급에 이어서 MAX급 스킬들을 갈기 시작했다.
날조MAX→날조Z
미리 올려두면 한계돌파에 필요한 숙련도만 올라가기 때문에 여태까지 보류해뒀던 스킬 날조.
마침내 그 봉인을 풀고 초월영역에 진입했다!
▷종류: 스킬
▷명칭: 날조
▷등급: Z(54%)
▶ZZ: 신으로 둔갑한다.
▶Z: 신의 호소를 이긴다.
▷SSS: 가족으로 둔갑한다.
▷SS: 애인으로 둔갑한다.
▷S: 친구로 둔갑한다.
▷A: 증인으로 둔갑한다.
▷B: 가족의 호소를 이긴다.
▷C: 애인의 호소를 이긴다.
▷D: 친구의 호소를 이긴다.
▷E: 증인의 호소를 이긴다.
▷F: 거짓이 그럴싸해진다.
날조의 ZZ급 효과가 탐스럽게 손짓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쌓아둔 제물을 전부 소진했기에 그건 다음 기회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신(神)에게 필수적인 ‘신성’을 갈 순 없잖아?
영재ZZZ라는 큰 고비는 넘겼으니, 지금부터는 시간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며칠이나 지났어?”
“진짜 멍청한 질문이다, 마약 용사. 마약에 취한 정령이 그런 사소한 날짜를 신경 쓸 리 없잖- 히익?! 농담이니 날개는 뜯지 마라! 3개월쯤 지난 것 같다!”
▶빼꼼: 3년 됐어요.
오! 교생 아가씨, 정확히 가르쳐줘서 고마워.
▶인사: 안녕히 주무셨나요, 강한수 생도님. 묻고 싶은 게 많지만, 3년 동안 너무나 보고 싶었다는 말부터 해둘게요.
교생 아가씨가 참 적극적으로 변했네! 예전에는 학생과 선생의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더니?
▶당황: 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답니다! 강한수 생도님께서 잠드신 동안, 선배님의 호출로 지크 생도를 또 담당하게 된 탓이에요. 여기에 루크 생도까지…. 지옥 같은 3년이었어요.
평소에 불평불만을 잘 하지 않는 교생 아가씨가 지옥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정말 고생하긴 한 모양이네.
그리고 내 판타지 경력은 만 60세를 맞이했다.
“환갑(還甲)이라니….”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나는 교생 아가씨에게 지난 3년 동안 이 입학시험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해설: 소환된 용사는 강한수 생도님까지 포함해서 총 1001명. 대륙마다 200명씩 소환됐다고 보시면 돼요.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동료를 영입하는 데 성공한 생도는 한 명도 없었어요. 그 대신, 용사가 역으로 동료를 따르는 추종자란 개념이 등장했어요.
추종자라….
이 흐름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잠든 3년 사이에 ZZZ급 영역에 도달한 천재적인 용사가 없다면 말이다.
▶긍정: ZZZ급은커녕 초월영역에 진입한 생도조차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현재는 추종자와 낙오자,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었어요. 제 동기와 후배 교생들이 대거 투입돼서 그들을 간접적으로 이끄는 중이에요. 특히, 낙오자들의 심리치료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랍니다.
5대 재앙은 전부 생존한 상태란 거군?
우정의 힘으로 한두 마리쯤은 정리됐길 기대했는데, 내가 고향별 친구들을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그 외의 특이사항은?
▶희망: 조금씩 진전이 있었답니다. 동료에게 업혀 가는 모양새지만, 추종자들의 활약으로 5대 재앙에 접근하고 있어요. 토벌하는 날도 머지않았다는 선배님의 희망적인 분석도 있었어요!
교생 아가씨의 말대로라면 나는 서대륙만 맡으면 될 것 같다.
사람과 몬스터의 목소리가 들린 탓이다.
“우측의 오크를 맡으세요!”
“하하! 이불 밖으로 나온 내 힘을 보여주지!”
“HuHu~?!”
“Juuu~?!”
꽤 먼 거리였지만, 내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예전에 고블린에게 당했던 여자 용사와 이불 속에서 쫓겨난 남자 용사가 팀을 짜고 다수의 오크를 수월하게 처치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성장이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245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마법Z 마술SSS 체력SSS 내성SS 마력SS…
▷상태: 고양, 피로, 긴장
고블린들에게 욕보였던 용사 아가씨는 오크들을 몰살시킬 만큼 강해져 있었다.
그 옆의 남자는 초월영역 스킬은 없었지만, 능력치를 MAX급 스킬로 도배하며 한계돌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용사가 1000명.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펄럭!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친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시커먼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5대 재앙 토벌.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1마리쯤은 토벌해주는 게 예의겠지.
“이거, 너무 쉬운걸?”
5대 재앙을 만나려면 여러 관문과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우주의 사랑을 독차지한 내게는 무의미했다.
관문과 시련이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그런 내 앞을 처음으로 가로막은 건?
“라누벨은 섹스피어 님을 위해 싸울 거예요!”
“내 이름은 알렉스. 망령왕의 검이다.”
“당신도 꽤 멋진 사내지만, 제 달링의 적이라 유감이에요♡”
“도적 따위가 성검을?! 이건 명백한 신성모독입니다!”
꿈속에서 보았던 동료와 하렘의 시체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미친.”
5대 재앙과 ‘그’가 서 있었다.
이 입학시험은 깨라고 만든 게 아니다. 내가 보증한다.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