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11회차] (주)우주
“참으로 이상하군. 내 백성들로부터 침입자가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거늘. 배신자가 있다는 뜻인가? 뭐, 좋다.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될 문제. 악취가 진동하는 그 검은 분명히 성검일 터. 그렇다면 너는 가증스러운 신의 하수인인 용사겠구나.”
망령왕 섹스피어.
그는 서대륙에 몰려 사는 흡혈귀들의 지배자다.
햇빛이 들지 않는 서대륙은 흡혈귀가 살기에 최적의 환경이고, 원래는 대륙 중부에 몰려있는 흡혈귀 도시들을 방문해서 토벌 협조를 얻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 협조를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신뢰를 쌓기 위해 도시에 산재한 잡다한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망령왕 섹스피어가 미모 순서로 뽑은 아름다운 흡혈귀 시장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지배자를 두려워하기에.
너무나 강한 1인 군단의 폭군.
그것이 5대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다.
물론,
“신의 하수인이라니, 굉장히 불쾌한 표현이네. 판타지 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꿈 많은 청년인데.”
나는 흡혈귀 일족의 협조를 받지 않았다. 설득하기도 귀찮고, 그렇게 해서 얻어내는 효과는 망령왕이 소환해내는 군단의 숫자를 줄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 시간에 성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둘러서 군단의 숫자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게 훨씬 이득이다.
1회차 때, 망령왕을 토벌하고 느낀 후회다.
“...웃기는 용사로군.”
망령왕 섹스피어의 원래 종족과 외모는 불명이다.
먼 과거에 어느 용사에게 당한 상처 때문에 육체를 옮겼고, 그것이 지금의 흡혈귀 남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혼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어서 세계정복은 보류하고 치유에 전념하고 있다.
...요런 설정이다.
그러나 이건 진실이랑 다르다.
망령왕 섹스피어는 전성기의 힘을 진즉 회복했다. 이건 이 흡혈귀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종족: 뱀파이어 로드
▷레벨: 9999+
▷직업: 폭군(폭력→지배↑)
▷스킬: 사령G 요술ZZZ 불멸ZZZ 빙의ZZZ 면역ZZ…
▷상태: 양호
지극히 양호했다.
아프거나 봉인된 곳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모든 5대 재앙은 여러 이유로 세계정복 혹은 세계파멸의 야욕을 보류하고 있는데, 그 진실은 중앙에 사는 1마리 고룡(古龍)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망룡왕 뇌비우스.
나머지 5대 재앙이 태어나기 전부터 악명을 날렸던 전설적인 악룡의 존재감이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다.
아무튼,
섹스피어의 스킬에는 ‘G등급’이 있었다.
ZZZ급에서 고작 한 등급 차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저거 하나를 만들려면 ZZZ급 스킬을 최소 10개는 제물로 갈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투력의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그러는 너는 악당 주제에 용사를 무기로 쓰냐?”
1회차 때, 망령왕 섹스피어의 사령은 SS급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죽음의 지배자’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여기서는 일개 시장이 ZZ급 경지에 오른 실정이다.
그만큼 5대 재앙도 강해졌다.
신(God)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만큼.
“기억소생이라고 불리는 궁극의 사령술이다. 죽은 자의 영혼이나 시체는 필요 없다. 대지에 남은 정보를 구현해내는 신의 기술이니. 현시대의 용사여. 증명하고 싶지 않은가? 이미 전설로 불리는 선배보다 자신이 더 강하고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입증해보도록 하여라. 물론,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지. 하하핫!”
사령G 효과는 기억소생. 메모해두자.
그리고 눈앞의 선배님 능력치도.
▶종족: 저스티스 휴먼 고스트
▷레벨: 9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용자G 신성ZZ 마기ZZ 무공ZZ 마법ZZ…
▶상태: 성검, 성녀, 성물, 성좌, 성수…
종족과 취향을 가리지 않는 용사님의 하렘만큼이나 스킬 구성도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높았다.
신성함으로 가득한 상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
템빨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네가 용사라고? 말도 안 돼! 용사는 나야!”
하지만 첫마디부터 확 깼다.
기억소생으로 소환된 ‘최초의 용사’에게서는 지금 같은 연륜이 느껴지지 않았다. 힘센 애송이란 느낌이 짙었다.
그러나 저 힘은 진짜다.
휘이이이잉~!
짝퉁 선배가 소환한 성검에 온갖 속성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여기에는 땅, 불, 바람, 물, 마음도 섞여 있었다.
머리 위에서 최초의 정령이 말했다.
“가짜 엘브하임의 어깨에 앉아있는 내 가짜 때문에 아이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모든 아이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아이들 교육을 잘못했네.”
“우웃!? 마약 용사에게 핀잔을 듣다니…!”
하지만 짝퉁 선배는 바로 공격해오지 않고 나를 주시했다.
그건 짝퉁 용사의 동료와 하렘도 마찬가지.
그 태도를 본 내 입에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전투태세를 마치길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용사니까.
기습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쩝. 이 용사는 예전에도 이처럼 느긋했었지.”
짝퉁 용사의 파티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던 망령왕 섹스피어가 양팔을 번쩍 들었다.
저 동작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다.
스르르….
스르륵….
섹스피어의 전매특허인 망령의 군대가 소환됐다.
하지만 그 규모는 내가 본 1회차 때랑 차원이 달랐다.
인간, 거인, 요정, 난쟁이, 고블린, 오크, 트롤, 오우거, 용, 인어, 흡혈귀, 히드라, 비룡….
온갖 시체가 땅에서 솟아났다.
내 시야에 닿는 모든 지평선을 가득 메운 그 규모는 세상을 정말로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양만 늘어난 게 아니다.
알몸으로 겁도 없이 달려들던 시체들이 더는 아니었다.
▷종족: 드워프 언데드
▷레벨: 543
▷직업: 파수꾼(방어→오감↑)
▷스킬: 둔기SS 체력S 맷집S 근성S 철벽S…
▷상태: 광기, 부활, 복종, 불감
그럭저럭 괜찮은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능력치도 준수한 시체들이 개미처럼 바글바글했다.
좀 더 까놓고 말해서, 만두 왕국의 근위병보다 강한 시체들이 여기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조금은 드물지만,
▷종족: 레드 드래곤 스켈레톤
▷레벨: 8983
▷직업: 학살자(학살=몰살↑)
▷스킬: 화염ZZ 화산Z 숨결Z 몰살Z 비행Z…
▷상태: 광기, 부활, 복종, 불감
양심과 상식을 포기한 놈들도 있었다.
저딴 용을 평범한 판타지아 대륙에 1마리만 풀어놔도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사실은?
이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소환한 5대 재앙은 아직 본격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오연하게 말했다.
“젊은 용사여! 동료랑 힘을 합쳐서 막아보아라! 망령왕 섹스피어가 죽음의 공포를 가르쳐주마!”
“동료? 하!”
“...그 비웃음은 무슨 뜻이지?”
판타지아 대륙의 원주민 사고방식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모든 용사가 비열한 우정의 힘을 쓰는 줄 안다.
“섹스피어, 잘 듣도록. 우정의 힘은 약자들의 전유물이야.”
나는 약자가 되려고 지금까지 노력한 게 아니다. 동료를 모으고 사교를 다질 시간에 수련하면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지금부터 입증해 보이겠다.
“하핫! 이 군단을 보고도 네가 강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냐? 용사여.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도착했다.”
“뭣…?”
“용사에게 필요한 건 동료가 아닌 대기업의 협찬이다. 두개골에 잘 새겨두도록. 아! 새길 시간이 있다면 말이지.”
쾅! 콰앙! 쾅! 쾅!
하늘에서 운석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
우주의 관점에서는 슈퍼맨이든 일반인이든 똑같다.
중심부 온도가 1500만K에 달하는 태양에 던지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는 건 마찬가지니까.
빛마저 빨아들이는 블랙홀도 그렇다. 그 중력에 휘말리면 행성조차 미세먼지 수준으로 압축된다.
지금의 상황도 비슷했다.
“찔끔찔끔 공격하는 마법이랑 수준이 다르네.”
아무리 큰 도시도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는 ‘운석소환 마법’은 금단의 마법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광경을 현자나 학자가 본다면, 마법은 참 소박하게 파괴하는 장난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대륙 서부가 유리로 뒤덮였다.
운석이 떨어지면서 군단을 먼지처럼 쓸어버리고, 기껏 살아남은 패잔병을 지진과 마그마가 집어삼켰다.
하늘도 안전하지 못했다. 작은 운석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와중에 회오리바람과 태풍이 몰아치며 비행을 방해했다. 심지어 땅의 균열에서 솟구친 가벼운 메탄가스가 상승기류를 타면서 비행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 마무리는 지각에 가장 풍부한 원소인 산소와 규소로 이루어진 광물 ‘석영’이었다.
석영은 판타지아 대륙에서 마법을 담는 그릇인 수정의 주성분이고, 지구에서는 유리 재료로 많이 쓰인다.
자연재해로 녹아내린 석영이 지표면에 깔리고, 열기에 강한 잡것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들이닥친 해일이 예쁘게 식혀줬다.
▶감탄: 무척 아름다운 보석의 세계가 됐네요!
교생 아가씨는 보석을 좋아하는 모양이네.
▶당당: 당연하죠! 저도 여자인걸요!
보석을 좋아하기 때문에 교생 아가씨는 여자라는 것은 굉장히 비과학적인 논리야.
아무튼,
“보리스. 마무리해.”
영명하신 우주 회장님께서는 내가 마무리하도록 교묘하게 판을 깔아줬지만, 여기에 넘어갈 만큼 나는 어리숙하지 않다.
유리를 포함한 보석은 기운의 전도율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마법의 촉매나 도구 재료로 항상 이용된다.
이 바닥처럼 말이다.
“네, 주인님.”
내 부름에 소환된 ZZZ급 퇴마사가 유리로 된 바닥에 손을 댔다. 그리고 퇴마의 기운을 퍼부었다.
그 기운이 유리로 변한 지표면을 타고 전도체처럼 사방으로 순식간에 뻗어 나간다.
“꺄아아아~~?!”
“아아앜~~?!”
“Reeee~~?!”
망령은 죽음을 거부한 비틀린 존재.
그렇기에 퇴마의 기운에 대단히 취약하다.
끔찍한 자연재해마저 견디고 간신히 살아남은 강력한 망령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그리고 남은 적은?
“콜록콜록! 이, 이게 대체 무슨…!”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흡혈귀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5대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
그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빈사 상태에 빠졌다.
▷종족: 뱀파이어 로드
▷레벨: 1
▷직업: 폭군(폭력→지배↑)
▷스킬: 사령G 요술ZZZ 불멸ZZZ 빙의ZZZ 면역ZZ…
▷상태: 약화, 퇴마, 출혈, 혼란, 정화…
눈여겨볼 점은 레벨이었다.
아무리 스킬 등급이 높아도 그걸 받쳐줄 레벨이 저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시체를 소환하는 땅에는 ‘ZZZ급 퇴마의 기운’이 가득한 상태. 완전히 무력화됐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레벨은 내 소행이 아니다.
“악당 주제에 감히 용사와 그 동료들을 지배하려고 해? 너는 저 사칭범을 처리한 후에 끝내주마!”
짝퉁 선배의 짓이었다.
그는 서대륙 30%가 파괴된 자연재해 속에서도 무사했다.
그의 보호를 받은 짝퉁 동료와 하렘도 마찬가지. 낙오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최초의 정령이 해설해줬다.
“저 녀석도 자연의 관심을 받는 존재거든. 우주의 분노를 살짝 비껴가는 정도는 간단해. 쉽게 말해서, 높은 행운 수치로 불행을 중화한 거야. 그리고 정(情)이 많아서 동료와 연인들이 죽지 않도록 끊임없이 수련하고 연구했어. 그 결과, 남을 지키는 능력만큼은 젊은 시절부터 신의 경지에 도달했지. 싸울 때 참고해.”
“그래?”
이거 참 우연이다.
나는 남의 동료와 연인을 죽여서 멘탈(mental)을 깨는 게 특기인데.
“용사님! 저 사칭범은 라누벨이 혼내줄게요!”
“하하! 귀여운 너의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아. 고마워, 라누벨.”
...첫 번째 사냥감은 너로 정했다.
귀여운 척은 죄악이다.
“진짜 선배님. 팝콘 드시면서 잘 지켜보십시오. 이 후배랑 적대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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