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11회차] 이것이 정치다!
▶걱정: 강한수 생도님. 정신이 드셨나요?
...그런 것 같아, 교생 아가씨.
이대로 강한수의 모험과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내 명줄이 생각보다 길었던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최초의 정령과 정령들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휴!”
내 입에서 깊은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마스터 몰랑.
우주의 편애를 받으면서 나도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위대한 존재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패배했다.
사람으로 표현하면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린 수준!
상대가 아예 되질 않았다.
마스터 몰랑의 능력이면 은하계쯤은 한두 번 몰랑거림으로 가볍게 제패할 텐데, 누추한 인간 암컷의 품에서 평범한 슬라임처럼 살아가고 계신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심오한 이유가 있을 터.
미미하게 강해졌다고 오만하게 굴지 말고, 나도 앞으로 더 검소하고 겸손하게 태도와 생활을 바꿔봐야겠다.
“마약 용사. 네가 쓰러지자마자 우리가 5대 재앙을 처치해서 모든 망령을 공허로 돌려보냈다. 네 스승도.”
“그랬군.”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 성녀H와 떨거지들이 기민하게 대처한 덕분으로 해석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고맙다고 하자.
지금은 새로운 힘을 갈무리할 때다.
“자, 그러면...”
나는 피시험자부터 골랐다.
아! 네가 좋겠네!
▷종족: 퍼스트 스피릿
▷레벨: 1
▷직업: 대모(자식=존엄↑)
▷스킬: 존엄ZZ 망각Z 수면Z 매력Z
▷상태: 중독, 집착
최초의 정령이란 이름값을 못 하는 굉장히 유감스러운 능력치. 뒤에서 명령만 하는 무능한 지도자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당연히 내 동료로는 손색이 많았다.
그래서,
▷종족: 퍼스트 스피릿
▷레벨: 1000
▷직업: 대모(자식=존엄↑)
▷스킬: 존엄ZZ 환각Z 최면Z 매혹Z
▷상태: 중독, 집착
가볍게 만져줬다.
오랫동안 감금당하면서 최초의 정령은 ‘그릇’이 작아졌다. 하지만 나는 그걸 억지로 확장하고, 경험치로 꽉 채웠다.
그 한계치는 약 1000레벨.
1레벨이든 500레벨이든 상관없다.
내가 만지면 누구든 1000레벨로 단숨에 뻥튀기된다.
하지만 이 힘의 진짜 묘미는 스킬이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정령이다. 그리고 우주로부터 그 가능성을 건드릴 권한을 얻었다.
아주 약간.
“마약 용사?!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고유의 정입자를 만진 것뿐이야. 아주 훌륭해! 쓸모없는 초월영역 스킬들이 훌륭한 보조계열 스킬로 바뀌었어.”
“이게 어딜 봐서 훌륭하다는 거지?! 사악한 요부와 마녀가 쓸 법한 스킬들이잖아!”
“일해라, 마약에 찌든 정령.”
“우웃! 이건 횡포다!”
완전히 다른 스킬로는 바꾸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비슷한 계열의 스킬로 바꿀 뿐. 그리고 한 번밖에 바꾸지 못한다.
이 밖에도 제약이 있다.
종족이나 직업이랑 연관된 스킬은 건드릴 수 없다. 영혼이랑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탓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런 조건과 제약이 있더라도 ‘새로운 힘’이 유용하다는 건 틀림없었다.
성녀H, 쑥떡, 보리스.
셋의 레벨은 이미 1000레벨을 한참 넘어섰기에 무의미. 스킬도 균형이 잡힌 편이라서 내가 건드릴 게 없었다.
단 하나 빼고.
“안마 스킬이 신경 쓰이는데...”
“효도에 꼭 필요해요, 아버지!”
“흠...”
쑥떡이 스킬 ‘안마’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열심히 설명했다.
안마 같은 보조계열 스킬을 초월영역까지 올린 이유가 효도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헤츨링.
이러면 나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경악: 능력치를 수정할 수 있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리가 날 거예요!
교생 아가씨. 너희도 할 수 있지 않아?
▶부정: 그게 가능했다면 이런 교육시설을 만들지 않았어요. 교육은 어디까지나 성장 효율을 올릴 뿐이에요. 교육용 직업 용사가 그 대표적인 예랍니다.
이해가 되는 설명이었다.
능력치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었다면 학생을 선별하고 교육하는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신: 스킬과 경험치를 남에게 이양하거나 빼앗는 건 가능해요. 방법은 다양하죠. 강한수 생도님도 경험해봐서 아시죠? 하지만 이 기능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진 않아요. 스킬을 한 명에게 몰아주는 것보다 여럿이 보유하는 쪽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죠. 우정의 힘을 괜히 강조하는 게 아니랍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불필요한 스킬을 유용한 스킬로 바꿀 수 있다.
평소에 자기 스킬이 마음에 안 들었던 존재라면 십중팔구 내게 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성형외과를 찾는 아가씨들처럼!
능력치를 성형해줄지는 면담 후에 결정하겠다.
아! 교생 아가씨는 공짜야.
▶뿌잉: 강한수 생도님의 마음만 받을게요. 저는 현재 제 모습과 스킬 구성에 불만 없답니다.
이 아가씨가 은근히 철벽이네!
아저씨일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버럭: 아니에요!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되나요?! 교직원 방침상 특별한 사유 없이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지만, 제가 학창시절에 얼마나 인기 많았는데요! 당연히 지금도요! 저를 잊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결혼했냐고 묻는 동기들이 많답니다!
말로는 우주도 살 수 있다구, 친구.
하지만 이대로면 온종일 시달릴 것 같으니, 일단은 인기 절정의 예쁜 아가씨인 걸로 해두자.
“확실히 처리됐는지 볼까?”
망령왕 섹스피어는 잘 죽지 않는다. 남의 육체를 빼앗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를 빼앗는다고 했지만, 따져보면 스킬과 레벨도 고스란히 가져가는 셈. 이 능력으로 무한정 강해지지 못한 걸 보면, 남들이 모르는 어떤 제약이 있는 듯하지만.
내가 기절해 있던 동안에 입학시험도 갱신됐다.
▷동대륙의 재앙: 저주왕 말파르트 토벌(0/1)
▷북대륙의 재앙: 서리여왕 엘쉬 토벌(0/1)
▷남대륙의 재앙: 불꽃왕 페닉스 토벌(0/1)
▷서대륙의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 토벌(1/1)
▷중앙대륙의 재앙: 망룡왕 뇌비우스 토벌(0/1)
망령왕 섹스피어의 죽음은 확실한 것 같았다.
나는 기절해서 보지 못했지만, 상극이자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G급 성녀와 ZZZ급 퇴마사에게 협공당했으니 어련할까.
“흠... 이대로 떠나기엔 찜찜한데...”
나는 뒷정리까지 깔끔히 하는 MAX급 용사님이다.
자기가 구하고 싶은 몇 명만 도와주고 자기만족에 취한 채 새로운 민폐를 끼치러 떠나는 FFF급 용사들이랑 다르다.
흡혈귀 지배자의 죽음.
서대륙 서부와 중부 초토화.
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다.
후자는 내가 아닌 우주 회장님이 싼 똥이지만, 나는 그걸 따질 만큼 만용이 넘치지 못하는 소시민이다.
...좋은 어감이다, 소시민.
누추한 재야(가슴골)에 묻혀 사는 마스터 몰랑에게 참교육 당한 내가 소시민이 아니면 누가 소시민이란 말인가?
이건 겸손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다.
나는 너무나 약한 약자다.
▶당혹: 자기비하가 너무 심하신 것 같은데요? 강한수 생도님이 소시민이면 거의 모든 생도를 플랑크톤으로 분류해야 할 거예요.
교생 아가씨의 응원은 언제나 힘이 된다.
담임선생님이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너는 근성만 생기면 성공할 수 있어!”라고 위로하는 척하면서 어려운 일을 제시하듯이.
“새로운 지배자부터 옹립해볼까?”
1회차 때, 망령왕 섹스피어를 쓰러트리고 나와 동료들은 무려 10일 동안 흡혈귀들이랑 축제를 벌였다.
내가 새로운 지도자를 빠르게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찬물을 끼얹지 않았다면 더 오랫동안 놀고 마셨을 것이다.
물론, 내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그리고 약 1년 뒤, 망령왕 섹스피어의 딸이자 용사의 동료였던 ‘암흑공주’의 유품을 고향에 돌려주기 위해 서대륙을 방문했다.
그곳은 아수라장이었다.
폭군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은 흡혈귀들은 인간을 사냥하고 가축처럼 사육했다.
인간이랑 평등하게 공생?
그것을 거부하고 인간을 흡혈하며 빠르게 강해지는 극소수 흡혈귀들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흡혈귀들도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실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마약 용사는 모험 도중에 뒤를 돌아보았구나?”
“그런 셈이지.”
“최초 녀석도 그랬다면 지금처럼 삐뚤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 녀석은 생각이 단순했거든. 모든 나라와 세력의 여자랑 결혼하면 전부 가족이란 울타리로 묶이면서 세상이 반영구적으로 평화로워질 거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현실은 그 반대였고?”
“그렇다. 겉보기에는 평화로웠지만, 최초 녀석의 눈과 귀를 피하거나 속이면서 지독한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내가 몇 차례 조언하긴 했지만, 암컷들의 눈물을 이길 순 없었다.”
우리는 선배를 욕하면서 흡혈귀 도시로 향했다.
비굴하게 협조를 구걸하지 않고 5대 재앙을 먼저 처치했으니, 찾아가는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셈.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전쟁도 그렇다.
이기든 지든 전쟁 후에 수많은 과부와 고아가 양산된다. 그들을 방관하는 군주는 전쟁광과 머저리뿐이다.
인구는 힘이다.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는 강력한 영웅 한두 명이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하지만, 그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지극히 낮은 확률로 여성의 자궁에서 태어난다.
태교를 잘해서 이 확률을 올릴 수 있다.
왕족과 귀족이 대표적인 예.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확률을 올리기보다는 ‘경우의 수’를 늘리는 방법을 선택한다.
즉, 출산을 장려해서 인구를 늘리는 것이다.
과부에게는 재혼을 권장하고, 부모 잃은 아이들은 생식기능이 활성화되는 성인이 될 때까지 국가에서 책임지고 키워준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안 좋은 추억이 자꾸 떠오르네...”
“말해봐라, 마약 용사.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최초의 정령님께서 조언해줄지도 모른다.”
“인간의 정치와 경영도 좀 알아?”
알면 좀 맡기고 싶어서 그렇다.
“그런 사소한 문제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정령님께서 신경 쓰리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말을 말자.”
사람은 물만 먹으면서 살 수 없다.
아이를 낳는 건 정말 쉽다.
출산 가능한 여성이 전체 인구의 20%라고 가정했을 때, 매년 아이를 낳는다면 자연사를 고려하더라도 평균 5년마다 인구가 2배씩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오니까.
심지어 복리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이론일 뿐.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건 절대로 쉽지 않다.
주거, 환경, 교육, 식량, 복지, 여가, 노동, 범죄, 사고, 전쟁...
한 인간이 성장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과정과 변수가 있다. 그렇기에 이것을 총괄하는 정치와 경영도 어려운 것이다.
나는 1회차 때,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고등학생이 무슨 정치를 알겠는가? 조금 배우긴 했지만, 그건 극소수 지배층과 몽상가들의 이론으로 가득한 개소리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물론, 지금의 나는 정답을 도출해냈다.
쾅!
나는 서대륙에 몰려있는 흡혈귀 도시 중에서 가장 큰 콜로니A의 굳게 닫혀있는 정문을 가볍게 걷어찼다.
루시퍼 때문에 낮이 없는 서대륙이기에 햇빛에 약한 흡혈귀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지만, 벽으로 도시를 둘러싸고 정문은 거의 항상 닫혀있다.
흡혈귀의 날개는 장식이 아니니까.
몬스터가 이용할지도 모를 문은 폐쇄하다시피 하고, 등의 날개로 비행하며 벽을 넘는다.
도시의 정문은 개선식 같은 행사 때만 열린다.
바로 지금처럼.
내 개선식을 축하해줄 환영인파가 날파리처럼 몰려들었다.
“침입자다!”
“인간이 감히?!”
“넌 누구냐!”
서대륙에서 가장 강한 종족이란 자부심 때문에 경계는 매우 허술했지만, 콜로니A에 사는 흡혈귀들이 모여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모두가 군인이며 민간인.
예쁜 이끼를 파는 꼬마조차 흡혈귀면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찰떡.”
“저주받은 불쌍한 종들이여. 소녀의 친애하는 주인님 앞에 무릎을 꿇으세요.”
흡혈귀에게 햇빛보다 치명적인 G급 성녀님의 말씀.
그것은 ‘신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커억?!”
“꺅?!”
“아앜!?”
성녀H를 중심으로 흡혈귀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비행 중이던 흡혈귀들도 예외 없이 지상에 추락했다.
나는 복종할 준비를 마친 그들을 향해 연설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는 망령왕을 사냥한 용사님이다. 몰살당하기 싫으면 암흑공주를 내 앞에 데려- 아! 거기 있었구나? 진즉 말했어야지, 왜 사람 민망하게 만들어. 아무튼, 오늘부터 이 도시는 내가 접수한다. 불만 있으면 일광욕하고 싶은 머리를 들고 발언하도록.”
흡혈귀 제군들. 지금부터 60년 묵은 용사님의 노하우가 담긴 궁극의 정치를 감상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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