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85화 (185/430)

 185화

[11회차] 뒷수

“섹스피어 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분이 인간에게 당했어…?”

“용사들은 매우 약했었는데…?”

5대 재앙 섹스피어를 토벌할 예정도 아니고, 이미 토벌 성공했다는 내 발언에 흡혈귀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아는 용사는 매우 약하니까.

지난 3년 동안 용사들은 오크를 혼자 쓰러트릴 만큼 강해졌지만, 야만적인 판타지 대륙 전체의 먹이사슬로 보자면 여전히 하위권이 틀림없었다.

흡혈귀들의 이런 생각은 당연하다.

무분별한 사냥으로 멸종한 것 같은 지구의 토종 흡혈귀는 어떨지 모르지만, 판타지아 대륙에 사는 흡혈귀는 흡혈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는 종족.

수명이 길다는 건 대단한 강점이다.

▷종족: 뱀파이어

▷레벨: 4374

▷직업: 재봉사(재료=재봉↑)

▷스킬: 재봉Z 집중SSS 흡혈SSS 정밀SSS 혈기SSS…

▷상태: 혼란, 긴장

직업에 상관없이 오래 산 흡혈귀는 기본적으로 레벨과 전투계열 스킬 등급이 높다.

지구처럼 수혈받는 게 아니고 피를 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흡혈하는 과정에서 전투를 피할 수 없는 탓이다.

즉, 본인이 좋든 싫든 흡혈귀는 숙명적으로 나이와 능력이 비례하게 되어있다.

물론,

“제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면 또래보다 우수하다는 건 흡혈귀도 다를 게 없었다.

불만을 토로하면 일광욕시킨다고 했는데, 여기에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흡혈귀 1마리가 있었다.

암흑공주.

짙게 화장한 것 같은 새하얀 피부와 보랏빛 입술. 하얀 피부랑 대조되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레이저 빔이 나올 것 같은 붉은색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공주님다운 청순미가 곁들어졌다.

망령왕 섹스피어가 외모만으로 뽑은 콜로니A의 시장이 낳은 딸이니 오죽할까.

하지만 흡혈귀 가정은 콩가루가 많다. 혈통과 태어난 순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흡혈을 부지런히 하면 부모가 자식보다 오래 살 수 있으니까. 그래서 대를 잇는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자식은 피임실패로 태어난 우연의 산물쯤으로 취급한다.

요정도 1000살쯤 먹으면 낳아준 부모랑 친구처럼 지내지만, 흡혈귀들은 부모와 자식을 완전히 남으로 취급한다.

경쟁, 결혼, 출산, 지배, 살해….

그래서 가정붕괴가 매우 빈번하게 벌어진다.

이 미모의 흡혈귀도 예외가 아니다.

“증거? 내 강함이 증거지. 서부와 중부 일대가 박살 난 사실은 알고 있을 텐데?”

“음….”

그녀는 망령왕 섹스피어를 증오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육체적인 치욕.

남의 육체로 살아가는 섹스피어에게 딸은 남의 자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콩가루의 선두주자였다.

그 원한과 재능을 원동력 삼은 그녀는 젊은 나이에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친부를 살해하기 위해.

“못 믿겠으면 덤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청순한 외모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암흑공주가 꿇었던 무릎을 펴며 내게 도약했다.

1회차 때도 그랬다.

서대륙을 방문한 용사 파티를 떠보기 위해 청순한 공주님인 척하던 그녀는, 용사 파티를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되자마자 흡혈귀다운 본색을 드러냈다.

비실비실한 요정에게 정령과 궁술이 있다면, 흡혈귀는 스킬 흡혈과 혈기를 갖고 태어난다.

암흑공주의 등에 돋아난 붉은색 날개도 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피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창백한 피부와 보라색 입술 외에는 인간이랑 육체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흡혈귀가 서대륙 최강의 종족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니까.

편의상 ‘흡혈귀의 날개’라고 부르지만, 날갯죽지가 아닌 피를 생성하는 기관인 골수에서 돋아난 저것은 스킬 혈기로 형성된 무기다.

형태의 구애를 안 받으며, 저것에 긁히거나 찔려서 생긴 상처는 자연적으로 아물지 않는다.

상처를 봉합하는 혈소판이 그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알기 쉽다니까.”

1회차 때도 저 자신감과 호전성이 암흑공주의 목숨을 빼앗았다. 내가 그녀를 말리지 않은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나는 히쭉 웃으며 맞상대해줬다.

스르륵….

내 무기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

흡혈귀의 날개처럼 자유롭게 형태를 바꿀 순 없지만, 육식식물 파리지옥의 잎처럼 생긴 이것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에 상관없다.

“용사가 아니라 전설의 마왕이었나…?”

“듣는 용사님께 실례잖아.”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에 가시처럼 돋아난 수많은 뿔을 세우며 가볍게 내질렀다.

“흥!”

이에 건방지게 코웃음 친 암흑공주는 오른쪽 날개를 촉수처럼 뾰족하게 변형하며 맞불을 놓았다. 그리고 왼쪽 날개는 연꽃잎처럼 넓게 펴서 몸을 보호했다.

흡혈귀의 기본적인 전투형태.

그러나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까다로운 전술이기도 하다.

스르르~

촉수처럼 흐느적거리는 오른쪽 날개가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내 가슴을 노리듯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후두둑….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내 몸에 닿기 직전, 암흑공주가 혈기로 생성한 오른쪽 날개가 평범한 피처럼 흩어지며 힘을 잃었다.

“어…?”

붉은색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는 암흑공주.

예기치 않은 상황에 넋을 놔버린 그녀의 얼굴은, 죽기 직전에 ‘내가 죽어? 이리도 허망하게?’라는 의문으로 가득했던 1회차의 그녀 표정이랑 매우 흡사했다.

“얼굴은 봐줄게.”

바보 같은 표정이 마음에 들었거든.

푹! 푹! 푹! 푹!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에 돋아난 무수히 많은 뿔이 그녀의 예쁜 몸통에 야무지게 박혔다.

붉은색 방패처럼 막아선 흡혈귀의 날개는 방어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평범한 피가 되어 안개처럼 뚫렸다.

“어, 어떻게…?”

“바보니? 망령을 대량으로 소환해서 고상하게 싸우지 못하는 돌격파인 너는 섹스피어보다 한참 약해. 그리고 나는 섹스피어보다 순수하게 강하지. 내가 이기는 게 당연하잖아?”

“바보 취급하지 마! 내 날개에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는 거잖- 콜록콜록!”

숙녀답지 못하게 하마처럼 보라색 입술을 쫙 벌리며 소리 지르던 암흑공주가 각혈했다.

“흥분하지 마. 안 그래도 빈혈이잖니.”

내게 ‘정입자를 다루는 능력’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징조에 지나지 않았다. 위대한 마스터 몰랑께 참교육을 받으며 깨달았다.

다음 단계의 원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스킬 무효화.

내 몸에 닿는 모든 종류의 스킬 효과를 제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우려하고 경계했던 판타지 능력이 나에게 생긴 셈이다.

혈기 효과가 사라진 흡혈귀의 날개는 평범한 피에 지나지 않는다.

피를 회수하지 못한 흡혈귀는 빈혈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나는 피부가 새파랗게 질리고 온몸을 덜덜 떨면서 힘겨워하는 암흑공주를 지혈해주기로 했다.

하아! 이놈의 오지랖은 대체….

“자칭 용사! 어떤 비열한 수를- 우읍?!”

그녀가 아까운 피를 더 토하지 않도록 입술을 틀어막았다.

역류한 위액과 피로 더러워진 그녀의 혀를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부족해진 수분을 보충하라고 내 타액을 아낌없이 그녀의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이것들이 전부 무료! 공짜다!

내게 덤빈 여자마저 도와주는 오지랖은, 60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한 탓에 생긴 직업병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암흑공주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각혈하는 그녀의 입은 응급조치해서 틀어막았지만, 몸통에 이미 너무나 많은 구멍이 뚫린 탓이었다.

나랑 온몸이 맞닿은 암흑공주의 스킬 ‘혈기’는 봉인됐다.

모든 스킬을 봉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능력치 자체가 무슨 가호를 받는지 단 하나의 스킬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흡혈귀의 최대 무기는 피니까.

피를 다룰 수 없는 암흑공주는, 단순히 레벨만 높은 인간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종족: 아크 뱀파이어

▷레벨: 7482

▷직업: 공주(국력=매력↑)

▷스킬: 혈기ZZZ 흡혈ZZ 어둠ZZ 매력ZZ 민첩ZZ…

▷상태: 출혈, 빈혈, 중상, 혼란, 제재…

초월영역 스킬로 도배된 스킬은 볼 것 없었다. 1회차 때 저것보다 훨씬 등급이 낮긴 해도 지겹도록 봐왔으니까.

내가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상태의 ‘제재’였다.

제재는 내 60년 경력을 통틀어서 처음 보는 상태 이상이었다.

제재(制裁)

법규를 위반한 자를 처벌한다는 뜻이다.

암흑공주의 스킬 혈기를 봉인하자마자 튀어나온 이 상태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었다.

능력치 회수.

그건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판타지 신은 그것까지 고려해서 능력치를 개발했다.

아무튼,

“꺄아아악?!”

내가 본능적으로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에 박은 날개를 뽑자마자 암흑공주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내 오랜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예쁜 척추가 완전히 절단됐다고.

푹!

나는 응급처치를 위해 구멍 난 그녀의 등허리에 왼손을 넣었다. 그리고 끊어진 요추 4번과 5번을 붙잡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죽었겠지만, 과다출혈만 아니면 심장을 잃어도 살 수 있는 흡혈귀니 괜찮을 것이다.

주르륵….

암흑공주의 아랫도리에서 피가 아닌 액체가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모른 척해줬다.

이래서 옛정이 무섭다는 것 같다.

나는 안심하라는 의도로 흡혈귀들을 향해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지난 전투 후에 갈아입은 천사의 옷이 암흑공주의 피에 젖어서 비주얼이 좀 그렇지만, 사람은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한 법이다.

나는 암흑공주의 척추를 정답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보셨죠? 이 용사님은 적대적인 흡혈귀조차 해치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자유의지를 존중합니다. 제가 마음에 안 든다면 친구들이랑 언제든 찾아오세요. 저는 중앙의 시청에서 공주님을 치료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찾아오는 친구들이 없었다.

도시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는 불평불만 접수만큼 좋은 게 없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염하게 생긴 미모의 시장마저 딸의 척추를 다정하게 쥐고 온 외간남자에게 핀잔조차 주지 않았다.

역시 흡혈귀란 걸까?

아름다운 시장의 관심사는 빈혈로 골골 앓는 딸이 아닌 남편의 생사였다.

“그 괴물이 정말로 죽었나요?”

하지만 결코 걱정하는 말투와 표정이 아니었다.

서대륙 최고의 콩가루 집안다웠다. 이 집안이랑 비교하면 선배의 하렘은 귀여운 축에 속할 것이다.

“확실하게.”

“아아! 감사합니다! 전설의 용사님께서 제 숙원을 풀어주셨군요! 원하시는 만큼 머물다가 가세요. 그리고 용사님께 말뿐만이 아닌 감사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온 시장이 까치발을 들더니, 내 목과 귀에 묻은 딸의 피를 요염하게 핥았다.

판타지아 차원의 유일한 신사인 나는 정중히 답했다.

“말뿐만이 아닌 감사라는 시장님의 아름다운 씀씀이가 제 심금을 울리는군요. 하지만 오늘은 마음만 받겠습니다. 힘들게 키우신 따님이랑 선약이 있어서.”

“용사님의 단단한 물건과 마음이 소녀를 더욱 애태우는군요. 씻으실 물과 하인을 대령해놓겠습니다. 고향처럼 편하게 지내세요.”

내게 살포시 미소를 지은 시장이 비서로 보이는 흡혈귀에게 지시한 후, 골반을 좌우로 흔들며 퇴장했다.

암흑공주의 매력적인 허리는 모친에게 물려받은 모양이다.

“마약 용사. 이 흡혈귀 가족은 정령인 내가 봐도 이상하다.”

“그 딸이 듣고 있는데 실례잖아. 눈치 없는 정령 같으니.”

“그거야말로 실례다. 듣고 있는 얼굴이 아니야.”

악(惡)을 심판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에 당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 까닭에, 내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암흑공주의 척추를 붙잡고 고정해줬음에도 붙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쩝. 힘 조절에 실패하다니. 나답지 않네.”

본의 아니게 덤볐다가 위대한 마스터 몰랑께 참교육 당한 후, 능력치에는 변동 없다고 방심한 게 화근이었다.

나는 육체개조도 그분께 배웠다.

당연히 거기서 파생된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도 진화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간과했다.

한 층 업그레이드된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는 강력했다.

예전 같으면 허리디스크로 끝났을 강도의 공격이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으니까.

아직은 성검 뉴클리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진화한다면 넘어설 날도 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보다 더한 악마…. 으으….”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지. 허리는 내가 책임지고 고쳐줄 테니, 잘 지내보자구.”

정신교육을 마친 암흑공주를 서대륙 총독으로 앉힐 계획이었다.

그런데 허리가 이렇게 안 좋으면, 필연적으로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야만 하는 사무직을 맡길 수 없다.

이러면 곤란하다.

“용사님. 씻으실 물이 준비됐습니다. 그…. 함께 들어가실 건가요?”

흡혈귀들이 식량 겸 노예 취급하는 인간 하녀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친근함의 표시로 암흑공주의 척추를 내 옆구리 쪽에 가깝게 끌어당기며 답했다.

“당연하지. 보면 몰라?”

내가 안 잡아주면 그녀의 척추는 한순간도 버티질 못한다.

“죄, 죄송합니다!”

약간의 착오가 있긴 했지만, 다행히도 콜로니A의 시장이 내게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치료하더라도 허리의 재활치료가 오래 걸릴 암흑공주는 깔끔히 포기하고, 그녀의 모친을 밀어보는 건 어떨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내 예상보다 서대륙 뒷수습이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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