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86화 (186/430)

 186화

[11회차] 암흑, 암흑, 암흑….

나는 암흑공주랑 온종일 함께 지냈다.

성녀의 힘으로 후딱 치유하는 방법도 있지만, 과정이 너무 쉬우면 친해질 수 없는 법.

이건 내 추측이 아니다.

1회차부터 내가 쭉 판타지 원주민들을 살펴보고 내린 결론이다.

아픈 사람을 후딱 치료하면 감사하다는 한마디로 끝이지만, 치유약을 구하려고 개고생하면 밥 한 끼라도 대접한다.

나는 그 논리를 암흑공주에게 그대로 적용했다.

식사, 목욕, 수면, 뒷간, 산책….

굉장히 번거로웠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정성스러운 내 간호에 감명받은 암흑공주는 척추가 붙은 이틀 뒤부터 내게 절대복종하기 시작했다.

혼이 증발한 것 같은 얼굴로.

“고생했어, 암흑공주님.”

꼭두새벽에 허리디스크로 응급차에 실려 가셨다가 일주일 만에 퇴원하신 아버지도 저런 얼굴을 하셨었지.

“공주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저는 아버지보다 위대한 당신을 따르는 일개 흡혈귀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암흑공주는 여기에 겸손의 미덕이 추가됐다.

나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숙녀가 된 공주님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로 했다.

물론, 그 기본 정책은 내가 수립할 생각이다.

“망령왕 섹스피어가 죽으면서 이 땅은 무법지대가 된 상황이야. 그를 쓰러트린 나는 곧 다른 대륙으로 떠나야 해서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어?”

“곧 떠나신다고 이해했습니다.”

암흑공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호구처럼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없는 살림에 쥐어짜서 식사 접대를 했는데, 개념 없는 동료들이랑 달리 밥값을 알아서 낸 용사님을 본 집주인이랑 비슷했다.

“서대륙은 내 전문이 아니야. 이 땅에 태어나서 576년 동안 지낸-”

“어머니 외에는 모르는 제 나이를 어떻게?!”

“설명 끊지 마.”

“죄, 죄송합니다! 부디 자비를…!”

“조용히 들어. 토박이인 암흑공주님이 나보다 서대륙에 대해선 훨씬 잘 알지. 서대륙에 사는 그 어떤 흡혈귀보다 강하기도 하고. 명심할 건 딱 하나. 흡혈귀보다 고등한 종족인 인간을 핍박하지 말 것. 그것만 지킨다면 내가 서대륙으로 다시 돌아오는 번거로운 유혈사태는 없을 거야. 이해했어?”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위대한 군주는 잘 싸우는 명장이 아니다.

판타지 소설에서는 영주나 영주의 아들인 주인공이 군주를 힘으로 고꾸라트리고 왕이 된다.

역사를 돌아봐도, 힘이 강한 자가 쿠데타에 혁명이나 개혁의 감투를 씌우고 왕좌를 빼앗는다.

하지만 군주의 덕목은 무력이 아니다.

사람의 능력을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됨됨이까지 파악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덤으로,

“네가 잘하는지 감시자가 지켜볼 거야.”

“누군가요?”

“내가 가르쳐줄 것 같아? 아! 참고로 네 모친은 아니야. 너랑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객관적으로 볼 리 없거든.”

“.......”

“질문 없지?”

“네.”

땅, 불, 바람, 물, 마음.

5가지 힘이 존재하는 땅이라면 어김없이 정령도 산다.

당연히 서대륙에도 잔뜩 있다.

정령들은 내 몸에 한 뺨이라도 달라붙어서 성희롱하기 위해 고자질은 기본, 허드렛일, 정보 수집 등을 한다.

감시자?

그런 번거로운 감투는 없다.

감시자를 만들면, 그 감시자를 감시할 또 다른 감시자를 임명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암흑공주는 스스로 억제할 것이다.

세 명의 통치자가 서로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삼두정치(三頭政治)도 좋지만, 셋이 단합해서 내 눈과 귀를 속일 수도 있다.

그럴 바에 정령이 낫다.

마약에 찌든 이 녀석들은 배신할 가능성이 없고, 내 몸에 달라붙으려고 벌이는 치열한 암투와 경쟁은 무시무시하다.

즉, 감시자로서 제격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대청소에 들어간다.”

폭군이긴 했지만, 망령왕 섹스피어에게도 추종자가 있었다. 모든 아내가 콜로니A의 시장처럼 남편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들에게 따지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들이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정에 서는 일도 없었다.

“어찌 용사란 자가…!”

“사, 살려줘!”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요?!”

“용사가 어째서 이런 만행을…!”

나는 서대륙 흡혈귀들에게 호구처럼 무료봉사했던 1회차의 경험을 토대로 배신의 가능성이 있는 흡혈귀를 솎아냈다.

그 과정에서 “들켰구나!”라고 외치면서 덤비는 무리도 있었지만, 대항을 포기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연놈도 많았다.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머릿속에 그럴싸한 계획만 짜두고 실천하진 않았는데, 용사님이 머릿속의 계획을 빌미로 처벌한다고 하니까.

진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 것이다.

이런 그들이 내 앞에서 꺼내든 카드는 ‘용사’였다.

내가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운 용사란 걸 단번에 알아보고, 양심과 자비에 호소한 것이다.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처형하는 판결은 잘못됐다고.

이때마다 나는 그들의 피를 쥐어짜며 성실하게 답해줬다.

“내게 미래를 보여준 판타지 신을 원망하도록.”

1회차의 기억이 없었다면 나도 이처럼 과감하게 못 했을 것이다.

내 자비심을 끄집어내려고 없는 가족도 만들어내서 불쌍한 척하는 흡혈귀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살생부가 들어있다.

물론, 이들 중에 정말로 억울한 자가 한둘쯤 섞였을 수도 있다. 망령왕 섹스피어가 무서워서 억지로 따르던 겁쟁이도 있었을 테고.

그러나 나는 신(神)이 아니다.

정말 세세하게 시시비비를 가린다면?

남을 처벌하기에 앞서서, 내가 가장 먼저 자결해야 할 것이다. 지난 전투의 여파로 죽은 무고한 풀벌레가 얼마나 많은데.

“암흑공주님. 불만 있어?”

“없어요! 벼룩의 피만큼도!”

청소는 반나절 만에 끝났다.

흡혈귀가 서대륙 전역에 흩어져 살았다면 힘들었겠지만, 빛을 먹는 루시퍼가 가장 많이 사는 내륙인 중부에 흡혈귀 도시들이 몰려있어서 이동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수많은 흡혈귀가 내 손에 죽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으로 더욱 많은 인간과 흡혈귀가 행복해질 것이다.

이건 자기만족이 아니다.

정말로 내가 이기적으로 판단을 내렸다면, 하늘을 가득 메운 루시퍼부터 몰살시켜서 서대륙에 광명을 선물했을 테니까.

루시퍼 덕분에 득을 보는 건, 햇빛을 두려워하는 흡혈귀뿐이다.

나는 정의롭고 공명정대한 용사로서, 흡혈귀들도 야만적인 판타지아 대륙에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남겨둔 것이다.

그런데도 고마운 줄 모르고 저리 짹짹거리니….

▶훌쩍: 아무도 안 알아줘서 무척 답답하시겠지만, 강한수 생도님의 깊은 뜻을 모두가 모르는 건 아니에요. 훌쩍! 당신의 숭고한 마음씨는 제 눈물샘을 자극했답니다.

말뿐이긴 해도 고마워, 교생 아가씨!

모든 흡혈귀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는 지하에 인간을 가두고 정말 가축처럼 사육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함께 피를 빨릴 자식을 끊임없이 낳고, 짐승처럼 씨를 뿌린 남자들은 함께 피를 빨릴 미래의 자식들이 살 공간을 만들고자 매일 조금씩 땅을 팠다.

대를 이어가면서 끊임없이.

수세식 변기가 없는 판타지 세계 자체가 지옥인데, 이들은 그 지옥 속에서도 더욱 지옥에 있었다.

이 지하의 인간들은 흡혈귀가 던져주는 루시퍼를 먹으며 생활했다.

대가는 인간의 피.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옷은커녕 그 개념조차 모르는 인간들이 지하수로 몸을 씻고 번갈아 가면서 피를 바친다.

자유를 얻은 그들의 표정은?

“아아….”

“어떻게, 어떻게….”

“루시퍼가 하늘에 가득….”

언제나 늘 배고픔에 시달리며 루시퍼의 딱딱한 다리와 잔털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먹으며 생활해온 인간들.

그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천장 대신 보게 된 광활한 하늘에 한번 놀라고, 또 그것을 천장처럼 뒤덮을 정도로 많은 루시퍼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일반인의 감성으로 해석하자면?

10년 동안 돈을 모아서 파리똥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사고 좋아하던 중, 우주에는 행성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잔뜩 있다는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본 기분이다.

의문: 이번에는 공감이 잘 안 되는데요. 다이아몬드의 반짝임이 좋은 건 이해하지만, 원래 흔한 광물 아니었나요? 어째서 10년이나 돈을 모아야 하죠?

우주인의 감성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교생 아가씨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시를 바꿔줄게.

나 대신 싸워줄 호구 같은 용사님을 50,000년 만에 발견해서 좋아하던 중, 야만적인 판타지아 차원에는 이런 호구 같은 용사가 500명이나 산다는 소식을 접한 기분이다.

▶웃음: 하지만 진정한 용사는 처음에 발견한 한 명뿐이었죠. 그래서 그 절세미녀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답니다.

그 절세미녀 아가씨는 운이 참 좋은 모양이네!

“용사님? 갑자기 멈추시면 소녀는 기다리기 괴롭답니다.”

“아아, 실례.”

내게 자신(自身)의 모든 걸 맡긴 채 침대에 누워있던 콜로니A의 시장이 새침한 어조로 내게 속삭였다.

여자랑 몸으로 대화하면서 다른 여자랑 영혼으로 대화하다니….

미녀의 엉덩이랑 충돌하며 부싯돌처럼 불꽃이 튀는 내 육체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무의식적인 행동들이 야만적인 판타지 원주민들에게 물든 것 같아서 마음이 찹찹해졌다.

오늘은 서대륙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사악한 흡혈귀들의 척추를 꺾고, 그 뒤에는 이처럼 서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흡혈귀의 척추를 괴롭히고 있었다.

유종의 미(美)로 괜찮지 않은가?

굉장히 낭만적인 하루였다고 자찬해본다.

그때,

콰당!

시장님의 애타는 요구를 받아들인 내가 다시 부싯돌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하려는데, 침실문이 거칠게 열렸다.

뜨거운 열기로 훈훈한 내실에 밖의 찬바람이 쌩쌩 들어왔다.

그 불청객의 표정도 얼음 같았다.

“암흑공주님. 무슨 일이지?”

“용사들이 죽음의 기사를 대동한 채 도시로 침공했습니다. 아니, 그 반대라고 할까요? 죽음의 기사가 용사들을 병사처럼 진두지휘하며 이끌고 있습니다.”

“거참….”

나는 붉게 달아오른 하얀 부싯돌을 내려놨다.

서대륙에서 가장 강한 종족인 흡혈귀만 굴복시키면 서대륙 안정화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내 오판이었다.

서대륙은 넓다.

그만큼 강자도 많다.

5대 재앙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수호자도 있고, 암흑공주처럼 1회차 동료로 영입했었던 실력자도 6명이나 된다.

암흑공주, 암흑도적, 암흑사제, 암흑기사, 암흑영주C, 암흑영주D.

▶핀잔: 이름이 참 애처롭네요….

내가 편의상 붙인 별명이지만, 이들은 서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는 강자들로서 각자가 거품 가득한 허명을 달고 있다.

죽음의 기사.

그것은 암흑기사의 다른 이름이다.

서대륙 정찰 임무를 맡은 ‘바람의 기사’가 망령왕 섹스피어에게 살해된 후에 노예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높은 정신력으로 망령왕의 지배를 극복하고 탈출한다.

완고한 기사처럼 두꺼운 갑옷을 벗기고 보면 평범한 요정이지만, 엄연한 시체다.

비실비실한 몸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갑옷을 입는 이유는, 상처를 스스로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강하다.

“이상한 일이군. 녀석에게 나는 원수를 갚아준 은인일 텐데.”

내가 망령왕 섹스피어를 처치했다는 소식은 서대륙 깊숙한 곳까지 퍼졌다.

그런데 내가 머무는 흡혈귀 도시로 침공을?

나는 모친이랑 눈싸움 중인 암흑공주를 불렀다.

“침공이 확실해?”

“네? 네. 확실합니다. 죽음의 기사가 쏜 화살에 경비병 다섯이 쓰러졌고, 밭을 돌보던 시체 중 다수가 용사들에게 손상됐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암흑기사는 일부 흡혈귀의 만행에도 굉장히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요정에게 인간의 불행은 남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침공해오다니?

1회차 때는 없었던 일이다.

그 둘이 동행한 시간이 짧긴 했지만, 암흑공주와 암흑기사의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직접 가보면 알겠지.”

침대에서 일어선 나는 팔을 좌우로 벌렸다.

원래는 하녀가 해줬고, 내일 아침에는 시장이 해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으니 어쩌겠는가?

급한 대로 정령의 팔이라도 빌려야지.

“나는 네 하녀가 아니다! 최초의 정령님을 어떻게 알고….”

“싫으면 방 빼든가.”

“...안 한다고는 안 했다! 이 비열한 마약 용사야!”

나는 정령들이 입혀주는 천사의 옷을 입고, 시청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밖에는 이미 흡혈귀들에게 둘러싸인 기사가 보였다.

덤으로 낯익은 용사들까지.

“콜로니A에 오신 걸 거짓으로 환영합니다, 죽음의 기사님. 두 번 죽으러 오셨습니까?”

처녀만 편애하지 않고 과부도 위로해주는 MAX급 용사님의 공명정대한 사회복지 활동을 방해한 대가는 매우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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