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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187화 (187/430)

 187화

[11회차] 서대륙을 부탁해!

“굴욕적인 죽음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얼음장처럼 으스스한 목소리로 내게 대꾸한 암흑기사가 잽싸게 활시위를 당겼다.

온몸을 빈틈없이 보호하는 무거운 중장갑 차림으로 원거리 공격을 선택하는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는 페널티를 고려하면 저 선택은 당연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해라, 바람이여.”

나는 내 겨드랑이에 얼굴을 박고 코를 킁킁거리는 바람의 정령을 고상하게 불렀다.

그러자 정령은 삐뚤어진 왕관을 고쳐 쓰고는 좌우에서 시중드는 아이들에게 고개만 까딱거리며 지시했다.

지독한 계급사회의 현장!

솔선수범이란 미덕은 찾아볼 수 없었다.

히이이이~~ 툭.

암흑기사가 쏜 화살이 힘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화살이 빠르고 강력해도 상관없다.

바람의 정령들이 작정하고 방해하면 공기저항에 막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뽀각.

나는 우주의 기운으로 보호받고 있는 몸이시다.

매우 작은 소리였지만,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도 듣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한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꺄으읔…!”

위풍당당했던 암흑기사가 투구 안쪽에서 가냘픈 비명을 질렀다.

궁술을 기반으로 한 높은 능력치도 무의미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허리를 다치면 걷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암흑기사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절대로 손에서 내려놓지 않을 것 같았던 고급 활대마저 허무하게 버려지듯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날름!

땅에 떨어진 활대는, 내 오른쪽 사타구니를 독점한 채 매일 왼쪽에 사는 불의 정령이랑 영토전을 벌이는 땅의 정령이 빼돌렸다.

칭찬이나 보상을 바라는 모양이로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불의 정령을 하루쯤 쫓아내면-

화르륵!

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불의 정령이 일했다.

서대륙에 햇빛이 들지 않아서 굉장히 귀한 나무로 만든 화살들이 홀라당 불탔다.

그 불은 암흑기사의 망토에 옮겨붙었다.

“마약 용사. 자연은 위대하다!”

내 머리 위에 권태롭게 누운 채 아무것도 안 한 최초의 정령이 전부 자신의 공인 것처럼 우쭐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

판타지아 대륙의 정령들이 누구를 닮아서 부조리가 심한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죽음의 기사님?!”

“헉! 서대륙 최강의 기사가…!”

“이게 대체 무슨 조화야?!”

암탉을 졸졸 쫓아다니는 병아리처럼 암흑기사를 따라온 용사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아직은 오크랑 싸워야 할 레벨이니까.

밭일하는 시체면 몰라도, 흡혈귀는 그들에게 아직 허들이 높았다. 하물며 여긴 흡혈귀가 잔뜩 있는 마을.

암흑기사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3년 동안 간만 커진 모양이네.”

하지만 나는 자비심 넘치는 MAX급 용사님이다.

소중한 목숨을 쉽게 죽이지 않는다.

나는 벌벌 떠는 그들에게 안심하라는 의미로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커억-”

“윽-”

“젠장! 큭-”

하지만 내가 그들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다.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독약으로 추측되는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고는 차례차례 쓰러졌다.

“거참, 웃기는 녀석들일세. 사약(死藥)을 수면제처럼 먹네.”

저들의 괄약근을 늘려줄 예정이었던 나는, 느긋하게 접근하던 걸음을 멈추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에는 찬사를 보냈다.

이 입학시험장에서는 죽어도 부활한다. 그렇기에 용사들은 과감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실패하면 자살!

저들이 3년 동안 쌓은 건 능력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울: 롤플레잉 게임처럼 자기 목숨을 경시하라고 준 특혜가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정책이 어려운 거야, 교생 아가씨.

아무리 그 의도와 취지가 좋아도,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악용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성불을 거부하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시체 앞에서 너무하네.”

나는 여전히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암흑기사에게 다가갔다.

내가 척추를 꽤 만져봤기에 이젠 그 소리만 들어도 상태를 바로 진단할 수 있다.

암흑기사의 허리는 살짝 삐끗하긴 했어도 전혀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엄살이냐?

그건 아니었다.

물컹물컹~

내 겨드랑이에 사는 물의 정령이 암흑기사의 발목을 끈적한 진흙으로 붙잡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무거운 갑주를 입고 있었던 암흑기사는 늪에 빠진 물소처럼 야금야금 땅속으로 묻히고 있었다.

“요즘 너무 날로 먹는 기분인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긴다.

이 판타지 세상에는 가만히 숨만 쉬어도 다치는 불행한 존재가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원수를 대신 처치해준 나를 어째서 공격했는지 묻고 싶지도 않네.”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겠지!

암흑기사가 나랑 대등하거나 우위의 상대였다면 탐색전을 겸해서 대화를 붙여봤겠지만, 이미 다 끝난 상황이었다.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정말로 그 약한 용사가 원수 섹스피어를 처치했는지를…!”

“...그래. 잘 확인했지? 이만 성불해.”

본의 아니게 이유를 들은 나는, 어느새 어깨까지 땅에 묻힌 암흑기사의 머리통을 힘껏 걷어찼다.

퍽-!

요정은 인간 사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자 긴 귀를 감출 때를 제외하고는 얼굴을 가리는 법이 없다.

하지만 암흑기사는 요정답지 않게 단단한 투구를 깊숙이 눌러 썼다.

그 덕분에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지지 않았다.

대신,

내 엄지발가락에 걸린 암흑기사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가 분리되며 가녀린 목이 뜯겨나갔다.

그 상태로 투구를 쓴 머리통이 골프공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용사님, 나이스 샷~! 뭐해? 박수 안쳐?”

“...네? 네!”

짝짝!

짝짝짝!

사업과 운동을 하나로 합친 종합스포츠 골프를 모르는 흡혈귀들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괜히 어른 흉내 내는 것 같아서 쑥스러웠지만, 지구의 주민등록상에는 20대 중반이고 판타지아 대륙에선 환갑을 넘은 할아버지다.

이렇게 보니, 나도 꽤 나이를 먹었잖아?

“망할 자식.”

나는 이래서 1회차 동료들이 싫다.

내가 아직 파릇파릇한 청소년이었던 당시, 초면에 그 유명한 용사님의 실력 좀 보자면서 무턱대고 칼질, 주먹질하는 연놈들이 많았다.

그 야만적인 행동원리에 너무 놀란 내 여린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렸고, 때로는 심하게 다치기까지 했다.

그래놓고는 선심 쓰듯 동료로 들어온다.

내가 거절해도 사양하지 말라면서 뻔뻔하게 자리를 잡는다.

이건 범죄다.

엄연한 살인미수!

생각보다 용사가 약하면 죽이고, 강하면 용사의 동료로 편승해서 이득을 취해보겠다는 간사한 속셈이다.

그리고 끼리끼리 논다고 했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기존의 동료들이 살인미수범의 합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멋대로 용서한다.

자기도 예전에 그랬다면서.

▶우울: 싸우면서 우정과 사랑도 쌓이는 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네요. 강한수 생도님. 정말 고생 많으셨군요….

교생 아가씨. 처음부터 보고 있었지?

▶긍정: 네. 강한수 생도님이 사회복지라고 주장하는 행동 때문에 밤새 잠도 못 자고 전부 지켜봤어요.

말에 가시가 있는데?!

교생 아가씨. 그렇게 세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아무튼, 살인미수범을 응징한 이 상황이 내 평판이나 인성에 악영향을 미치나?

▶고민: 글쎄요. 초등교육과정은 사랑과 우정이 제1 덕목이기 때문에 그 역방향인 동료 살해는 그 아무리 타당한 이유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어요. 하지만 여기는 중등교육과정으로 넘어가는 입학시험장이라서 그 평가 기준이 달라요.

교생 아가씨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줬다.

초등, 중등, 고등….

교육과정마다 평가 기준이 다르단다.

초등학생이 ‘너는 어떻게 태어났니?’라는 물음에 ‘사랑’ 대신 ‘부모님의 교미’라고 대답하면 오답으로 처리되는 거랑 같다.

일찍 머리가 트인 학생을 바보로 만든달까!

▶사과: 미안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초등교육과정을 전문으로 공부했거든요. 중등교육과정은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요. 입학시험은 아무 생각 없이 보냈고요. 그때는 아직 제게 훌륭한 선생이 되겠다는 꿈도 없었거든요.

교생 아가씨, 힘내! 강한 친구, MAX급 용사가 응원할게!

“쩝. 망할 시체 때문에 흥이 깨졌네. 암흑공주님. 지금부터 서대륙을 부탁해.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둘 중 하나는 괄약근이랑 영원히 작별하게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별 시답지 않은 옛 동료의 시비 때문에 외로운 미망인을 위로해주다가 뛰쳐 나왔다.

다시 들어가서 2차전을 하는 건 모양새가 안 좋았다.

펄럭!

그 어떤 흡혈귀보다 아름다운 멋을 뽐내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활짝 펼친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곳은 서대륙 중부.

거리로 따지면 북대륙과 남대륙이 비슷했다.

“중앙대륙은 아직 이르지.”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랑 싸우는 건 아직 불안했다.

그 용은 나머지 5대 재앙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 그런데 여기에 ‘용자’의 봉인을 풀고 ‘드래고니안’으로 변신하면 어떻게 될까?

그 전투력을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뇌비우스의 주먹 한 방에 판타지아 행성이 파괴된다고 해도 놀랍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중앙대륙은 가장 마지막.

지금 선택이 매우 중요했다.

서대륙을 기점으로 시계방향으로 대륙들을 돌아서 최종적으로 중앙대륙에 갈지, 아니면 반시계방향으로 갈지를.

시계방향이면 북대륙.

반시계방향이면 남대륙.

▷동대륙의 재앙: 저주왕 말파르트 토벌(0/1)

▷북대륙의 재앙: 서리여왕 엘쉬 토벌(0/1)

▷남대륙의 재앙: 불꽃왕 페닉스 토벌(0/1)

▷서대륙의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 토벌(1/1)

▷중앙대륙의 재앙: 망룡왕 뇌비우스 토벌(0/1)

북대륙으로 가면 얼음공주랑 비슷한 실력의 남정네들로 하렘을 차린 반인반조(半人半鳥)랑 싸워야 하고, 남대륙은 용암을 온천쯤으로 여기는 초대형 거인이 상대다.

결국에는 전부 돌아야 하지만….

▶제안: 북대륙이 어떠세요? 대선배님이 귀띔해주셔서 살짝 조사해볼 수 있었는데요. 강한수 생도님의 아들은 북대륙에서 무사히 태어난 것으로 확인됐어요. 검희의 가문에 그 정체를 꽁꽁 감춰둔 탓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르지만요. 제가 부차적으로 담당하는 지크와 루크 생도는 각자 동대륙과 남대륙에 있거든요.

내가 3살 때, 검희랑 낳은 아들.

정신은 칠순(七旬)을 넘어서서 팔순(八旬)을 바라보고 있지만, 육체의 나이로는 아들이랑 3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갈등에 빠졌다.

“아들이라….”

북쪽과 남쪽.

비행을 멈추고, 이정표 하나 없는 하늘에서 마음속 갈림길에 선 나는 차분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미세먼지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고향별에선 보기 힘든 별이라도 세면서 생각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RuRu~♩”

“RuRu~♪”

“RuRu~♬”

서대륙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초대형 파리 ‘루시퍼’가 하늘을 뒤덮고 있어서 별은커녕 달이나 태양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 벌레들이 나와 우주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번쩍!

내 푸념이 끝나기 무섭게 우주에서 신호가 왔다.

마스터 몰랑의 옥체(玉體)랑 비슷한 무지갯빛 오로라를 동반한 특수한 빛이 서대륙 전역을 자외선 살균기처럼 내리쬈다.

“RuRu~?!”

“RuRu~?!”

햇빛을 먹고 사는 루시퍼가 시끄럽게 울면서 줄줄이 추락했다. 대지를 완전히 뒤덮을 때까지.

그리고 루시퍼가 없는 서대륙 하늘이 드러났다.

밤인데도 은하수의 별빛으로 무척 밝았다.

흡혈귀들은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지 말자.

“어흠! 남대륙부터 가보실까! 가즈아~!”

이대로 대책 없이 아들을 만나면, 누군가의 질투로 북대륙이 사라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탓이 절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무튼, 나는 아니다.

살 곳을 잃은 흡혈귀들에게 그분의 가호가 함께하길. 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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