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11회차] 서대륙을 부탁해!
“이 열기도 참 오랜만인걸?”
판타지아 서대륙에서 본의 아니게 별을 구경하며, 남대륙으로 넘어온 나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랑 마주하게 됐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여긴 그나마 북부라서 선선한 편이니까. 해안이랑도 닿지 않은 중부는 그야말로 무한한 사막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내가 처치해야 하는 5대 재앙은 극지방에 가까워지면서 극단적으로 추워지는 남극이랑 맞닿는 곳에 솟아난 화산에 산다.
즉, 중부의 사막을 가로질러야 한다.
“마약 용사. 곧바로 갈 거냐?”
더위를 전혀 타지 않는 최초의 정령이 물었다.
여기까지 비행해서 오는 내내 어떻게든 그녀를 자연스럽게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내 머리카락을 뜯을 기세로 고삐처럼 꽉 붙잡은 이 정령은 속도광처럼 즐겁게 웃기만 했다.
“흠….”
나는 그녀의 질문에 살짝 고민에 빠졌다.
판타지아 서대륙에서 너무나 오랜 시간을 허비했으니까. 깜빡 잠들었는데 3년이 흘러 있었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101명의 용사를 키운다고 지체했다.
북대륙 대신 남대륙을 먼저 온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명확한 계획까지 짜둔 건 아니었다.
남대륙에서도 많은 동료를 영입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들이랑 안 마주치는 방향으로 갈 예정이다.
“...일단은 먹고 생각하자구!”
옛말에, 식후경(食後景)이라고 했다.
남대륙은 북부의 황금빛 초원에서 자라난 야생동물과 사막에서만 자라는 진귀한 식재료가 어우러진 요리가 독특하다.
하지만 서대륙의 루시퍼처럼 부정적인 의미의 독특함이 아니다.
판타지아 60년 경력의 용사님이 나중에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썩 훌륭한 편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3D 지도를 그렸다.
50년도 더 된 1회차 경험을 토대로 작성하긴 했지만, 남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던전을 두루두루 정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암기한 지형은 위성사진처럼 생생했다.
무엇보다도 여긴 바뀐 게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하기 마련이지만, 매번 용사력 0년으로 돌아가는 나는 변화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약 용사는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
“당연하지. 내 1회차 이야기를 판타지 소설로 쓰면 30권은 가볍게 나올걸? 질투와 탐욕으로 가득한 동료들에게 시달리는 용사님의 모험 내용은 암울하기 짝이 없지만.”
그 소설은 틀림없이 망할 것이다.
프롤로그부터 약 3권 분량은 내가 알렉스에게 얻어맞으면서 만두 국왕이 지시하는 잔심부름을 군말 없이 따르는 내용이니까.
세상을 구할 용사님이 노인 대신 약초를 캐고, 어린 소녀가 잃어버린 고양이를 온종일 찾아다녔다.
한심함과 무능함의 극치였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서 착한 내가 노인네처럼 허허! 웃으며 넘어가지만, 동창A나 지크처럼 나쁜 용사였다면 전생의 일을 빌미로 원주민들을 고문하고 강간했을 것이다.
이런 내게 인성 F학점을 주는 판타지 신의 인성은 대체….
“푸른 늑대 부족에 온 걸 환영하네! 낯선 이여!”
남대륙 원주민들의 복장은 대체로 통일되어 있다.
온몸을 통풍이 잘되는 얇은 천으로 감싸서 강렬한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있는 까닭이다.
얼굴도 알아보기 어렵다. 중부의 사막에서 날아오는 황사(黃砂) 때문에 입과 코도 마스크처럼 천으로 가리고 있는 탓이다.
유일하게 내놓은 것은 두 눈.
하지만 나는 체형과 두 눈동자만 보고도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다.
가슴 뽕으로 평야를 산맥이라고 사기 친 요정 때문에 익힌 투시 같은 스킬도 필요 없다.
“만나서 반갑소, 푸른 늑대의 발톱이여!”
“오! 이색적인 복장과 외모 때문에 이방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우리의 인사법을 잘 알고 있구려.”
식당을 찾은 내 앞의 중년 사내는, 푸른 늑대란 명칭을 쓰는 부족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부족민F다.
전설의 용사님에게 자기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뻔뻔한 남자라서 기억하고 있다.
그런 남자를 내가 애써 만난 건 아니다.
머릿속 3D 지도로 ‘가장 가까운 맛집’을 검색했더니 이곳이 나왔을 뿐이다.
가뭄이 빈번해서 식량이 풍족하지 못한 남대륙에서 정상적인 식당을 운영하기란 쉽지 않다.
이건 그만큼 부족민F가 권력자고, 귀한 식량을 맡겨도 될 정도로 요리를 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리를 잘해서 권력도 생겼다고 보는 편이 나으려나?
인터넷과 게임, 만화, 텔레비전도 없는 판타지 대륙의 원주민들이 비좁은 집에서 할 수 있는 오락이 얼마나 되겠는가?
고대부터 바뀌지 않는 음양의 조화와 식도락(食道樂)이 전부다.
그 경향은 남대륙이 가장 심한데, 지옥 같은 열기를 피하고자 거의 온종일 실내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메두사의 발효유와 꼬리 훈제로.”
“하핫! 메뉴 추천도 필요 없구려. 그런데 손님. 새신랑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머리 위에 있는 꽃의 정령님이 참 부럽소. 내가 살면서 꽃의 정령님을 몇 번 보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이오. 덩치가 작아서 참 아쉬워.”
“괜찮습니다. 이건 들어가거든요.”
나는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최초의 정령이 발뒤꿈치로 내 정수리를 찍어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남대륙은 요리와 음양의 조화가 발달한 곳.
이 정도는 평범한 대화에 속한다. 이 자리에 여성이 있었더라도 우리의 장단에 맞춰줬을 것이다.
“혹시, 고향이 남대륙이십니까?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방인처럼 생기신 분 중에서 손님처럼 자연스러운 분은 정말 오랜만이라서 그렇습니다.”
“고향은 북대륙이지만, 남대륙에서 3년쯤 살았었습니다.”
1회차 때, 2년 6개월 조금 넘게 남대륙을 모험했지만, 원래 이럴 때는 반올림하는 것이다.
“오! 세계 끝에서 끝으로 오셨구려. 기다리시오. 내가 추운 고향 땅을 잊을 만큼 멋진 요리를 선보일 테니. 하하!”
부족민F는 호탕하게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꽤 자신하는 눈치.
먹는 행복을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대륙 원주민 중에서 요리 좀 한다는 사람은 저 식재료들을 특히 잘 다루기 때문이다.
메두사의 젖
메두사의 꼬리
서대륙에 루시퍼가 있다면, 남대륙에는 메두사가 있다.
메두사(Medusa).
상반신은 여자고, 하반신은 뱀인 몬스터다.
길면서도 유연한 뱀의 몸을 이용하여 사막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까닭에 ‘사막의 인어’라고도 불린다.
물을 구하기 힘든 사막 아래에 매장된 풍부한 지하수를 마음껏 이용 가능한 메두사는,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남대륙 생활에 필수적인 가축으로 취급된다.
지구의 유럽 대륙에서 석회질 때문에 유럽인들이 물보다 맥주를 선호하듯이, 판타지아 남대륙에서는 물보다 구하기 쉬운 메두사의 젖으로 갈증과 더위를 해소한다.
“저 털보 인간은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내 정수리에 가하던 발길질을 멈춘 최초의 정령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남대륙에서는 자주 듣게 될 거야.”
우주에서 가장 진보한 고등생물인 슬라임처럼 판타지아 대륙 곳곳에 ‘꽃의 정령’이 산다.
최초의 정령처럼 등에는 2쌍의 잠자리 날개가 달려 있고, 덩치는 인간 여성의 팔뚝이랑 비슷하다.
하지만 종족을 살펴보면, 정령이 아닌 ‘작은 요정’이다.
페어리(Fairy)
그런데도 ‘꽃의 정령’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내 머리 위에 있는 ‘최초의 정령’ 때문이다.
선배님(최초의 용사)의 서사시는 남대륙에서 유명하다.
더위를 피해서 집에 틀어박힌 노인들은 요리와 음양의 조화도 어렵다. 그들의 유일한 낙은, 자기가 어릴 적에 들은 옛날이야기를 다시 자신의 손자에게 전해주는 것.
일종의 가정교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방끈이 짧기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 100가지 이야기를 손자에게 100번 들려준다.
그때쯤이면 어린 손자는 사회활동이 가능한 어른이 되고, 100가지 이야기를 전부 암기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히 세뇌 교육인데….
“마약 용사. 그건 아주 훌륭한 교육방침인 것 같다! 내 업적이 잊히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니! 남대륙은 내게도 각별한 장소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함과 동족의 아쉬움을 토로하던 엘브하임을 만나서 친구가 됐지.”
“맞아. 그 이야기가 대대손손 전해졌어.”
물론, 그 위대한 요정왕이 LCD 모니터 같은 동족을 혐오하고, 인간 여성의 계곡을 사랑한다는 내용은 쏙 빠졌다.
아무튼, 유감스러운 요정왕과 최초의 정령이 남대륙에서 활약한 이야기는 용사 못지않게 유명했다.
그리고 그 명칭이 문제였다.
최초의 정령
다른 정령이랑 달리 실체를 가진 최초의 정령은, 작은 요정처럼 생겼다. 세세하게 살펴보면 엄연히 다른데 말이다.
가장 큰 차이는 생식기의 유무(有無).
하지만 3대 정령왕의 유감스러운 취향이 전해지지 않았듯, 여신처럼 아름다운 최초의 정령은 총배설강이란 진실은….
“총배설강이 아니야!”
“아무튼, 너 때문에 꽃의 정령이 꽃의 정령으로 불리게 됐고, 남대륙에서 신성시되고 있어. 포획은 족장이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중범죄로 취급되며, 하얀 정령 부족의 제사장을 맡은 성녀B가 꽃의 정령들을 보호하고 밀렵을 감시하고 있지.”
“새삼 느끼는 거지만, 마약 용사는 아는 게 많구나.”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에 요리가 나왔다.
그런데 주문하지도 않은 샐러드와 과일이 곁들여져 있었다. 둘 다 남대륙에선 대단히 귀한 식재료였다.
부족민F가 씩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마음에 들어서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정열적인 사랑과 전설로 가득한 남대륙으로 돌아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공짜입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나중에 아기를 돌봐달라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1회차 때 당했었다.
물론, 당시에는 샐러드와 과일이 아니었다. 멋모르고 시원한 물을 주문했다가 발목 잡혔다.
나중에 가격표를 본 나는 성수(聖水)라도 마신 줄 알았다.
남대륙에서 물이 원래 비싸기도 했지만, 부족민F가 나와 동료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거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부족민F’인 것이다.
인성이 F급.
과거의 나는 어찌 이리도 한심하단 말인가….
“아, 아기?! 손님!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시오! 족장님의 딸인 아내가 들으면 오해해서 절 죽일 겁니다! 얼마 전에 결혼해서 신혼생활을 만끽 중인 제게는 숨겨둔 아이 같은 게 없습니다!”
“아아, 그렇겠군요.”
벌써 용사력 3년이긴 했지만, 내 1회차 때보다는 남대륙 방문 시기가 훨씬 빨랐다.
아직 결실을 보기 전.
나는 날짜를 대충 계산해본 후에 말했다.
천기(天機)를 누설하여 역사가 바뀔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세세하게 배려할 만큼 나는 부족민F랑 친하지 않으니 괜찮다.
“자식이 언제 생기고, 딸인지 아들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헛?!”
용사에서 점쟁이로 둔갑한 나는 부족민F를 설득했다.
그가 1회차 때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아내의 비밀’을 폭로하면서 설득력을 올렸다. 조금도 협박하지 않았다.
“제 말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무조건 믿습니다! 위대한 점쟁이 손님! 그러니 그 사실을 제 아내에게만은 제발…!”
나는 1회차에 부족민F랑 나눈 우정을 이어갔다.
용사님의 우정에 감복한 부족민F는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한다면서 요리를 더 내놨다.
당연히 전부 무료다, 무료! 이 세상에 아직 정의가 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머리 위의 ‘꽃의 정령’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약 용사. 나는 저 인간 수컷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간악한 요정 암컷의 마수에서 풀려난 이후로, 내게 공물을 바친 인간은 그가 최초였다. 나를 파리 취급한 서대륙 야만인들이랑 달라! 히히!”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먹기 좋게 썰린 고기 부스러기를 이쑤시개로 찍어 입안에 넣으면서 최초의 정령이 말했다.
사람이 먹으면 한 입도 안되는 양의 고기로 저리 행복해하는 정령을 보고 있자니, 사고회로가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을 때라도 좀 내려와라. 내 머리에 유해한 동물성 기름이 떨어지면 어쩌려고.”
“걱정하지 마라. 내 아이들이 잘 닦아줄 거다.”
“내게 탈모가 오면 네 머리카락도 다 빠질 줄 알아. 대머리 정령으로 불리게 해주마.”
“흥! 나를 과소평가하는구나. 그런 부조리하고 야만적인 협박에 굴복할 만큼 나는 심약한 정령이 아니다. 내 육체라도 굴복시키고 싶다면 손가락쯤은 가져와라.”
“오냐. 이번에는 둘로 상대해주지.”
“두, 둘?! 그건 무리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너야말로 나를 과소평가하는군.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것이 용사다.”
“정말로 해낼 것 같아서 무서워…!”
우리는 한심한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에 열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아내의 비밀’과 함께 어서 떠나주길 바라는 부족민F랑 더 진득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 질질 끌면서 식당에 계속 머물렀다.
아예 하룻밤 머물다가 가도 괜찮을-
끼익-
늦은 밤, 나 혼자 남은 한적한 식당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그나마 더위가 가시는 밤이 남대륙 원주민들의 외부활동시간이기에 이처럼 역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어? 도적E잖아?”
가슴 뽕으로 순진한 용사님을 속인 간사한 요정.
하지만 그녀는 내가 기껏 아는 척했음에도 무시하고 옆으로 지나쳐가더니, 부족민F에게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매번 먹던 거로.”
“플로리아. 그렇게 성의 없이 주문해도 알아듣는 내게 감사하라고. 요정의 시간관념을 인간인 나에게 강요하면 난감해. 1년 만인가? 너는 여전히 바뀐 게…. 아! 가슴이 더 커진 것 같은데? 다른 요정이랑 다르게 메두사의 젖을 먹어서 그런가? 하하!”
“시답잖은 소리는 됐어.”
“밖의 물을 먹어서 농담에 민감하구먼.”
도적E와 부족민F의 대화가 소소하게 들렸다.
...망할 회귀 같으니.
이걸로 도적E랑은 벌써 3번째 만남인데, 매번 다시 자기소개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짜증 났다.
하지만 내게는 비책이 있다.
“일리단. 고향에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돌아왔어? 유물을 다 모으기 전까지는 절대 안 간다더니.”
하지만 도적E는 내 부름에도 응답이 없었다.
자기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더니, 나를 미친놈처럼 힐끔 보고는 식사에 다시 열중했다.
...뭐지?
능력치처럼 본명도 바뀐 건가?
▶황당: 그녀의 이름은 일리단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건 누가 봐도 남자 이름이잖아요….
아니라고?
진짜 이상하네! 분명 일리단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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