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11회차] 어쨌든 우리는 약혼한 사이!
▶정답: 일리단이 아니라, 일리나에요.
일리나!
겨우 한 음절 차이네!
사람이 만난 지 오래되면 조금은 틀릴 수도 있지!
교생 아가씨 덕분에 도적E의 본명도 기억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대화해보기로 했다.
나는 그녀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일리나가 미친놈 바라보듯 나를 경계했지만, 이해심 넘치는 용사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맑은 미소로 보답했다.
그리고 말했다.
“일리나. 내가 네 약혼자다.”
“푸웁-?! 콜록콜록!”
두 눈을 부릅뜬 일리나가 먹던 것을 정면의 내게 뿜고는 급히 메두사 발효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높은 행운 덕분인지, 우주의 가호인지 그녀의 입에 들어갔던 음식물 파편이 내 몸까지 튀진 않았지만,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이후의 패턴은 이전이랑 비슷했다.
어떻게 이름을 알았느냐는 추궁으로 시작된 대화는, 내가 위대한 용사이자 그녀의 약혼자란 사실로 결론 났다.
그녀에게 진짜 이름은 보증수표처럼 중요했다.
“으으…. 어머니가 숨겨둔 약혼자라니….”
집 밖에서 자기 이름을 밝힌 적 없는 일리나는 내가 하는 말들을 큰 의심 없이 믿었다.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혼돈의 유물은 얼마나 모았어?”
“둘이다.”
중요한 비밀도 순순히 가르쳐준 일리나가 호주머니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저것은 일전에 암시장에서 보았다.
유감스러운 3대 요정왕의 후손들만 사용할 수 있다. 그 효과는 신성처럼 착용자를 보호하는 것.
하지만 지금은 장식품 신세였다.
능력치가 너무 올라가서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아이템의 보호 기능이 별 도움이 안 된 탓이다.
그다음, 작은 여행용 가방을 뒤적거린 일리나는 내가 보지 못한 혼돈의 유물을 꺼냈다.
그건 외눈 안경이었다.
노안으로 시력이 떨어진 귀족들이 독서와 서류작업 등을 위해 항상 소지하고 다니기도 하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서 외눈 안경이라고 하면 보통은 마법 도구를 떠올린다.
전투력을 측정하는 마법 안경!
하지만 그 아이템은 이 입학시험장에선 무용지물이다.
능력치가 너무 뻥튀기되는 바람에 마법 안경으로 측정할 수 있는 한계치를 가볍게 넘어선 탓이다.
기존의 판타지아 대륙에는 Z등급이 없었다.
마스터 몰랑처럼 자신의 실력을 완벽하게 감춘 존재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용사의 모험에선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런데 여긴 어떠한가?
일개 영주가 초월영역에 진입했다.
레벨도 예전에는 300레벨만 돼도 강자로 평가됐었는데, 현재는 병사A, B, C 수준이다.
“별거 아니란 눈으로 보지 마라. 북대륙까지 가서 구하느라 정말 고생했다. 이 안경은 정말 대단한 마법 도구다. 전투력 측정의 한계치가 없다. 그리고 다른 도구랑 다르게 숫자로 전투력을 표시한다.”
“숫자로? 호오….”
내가 아는 마법 안경은, 기처럼 몸에 두른 녹색 기운의 농도로 전투력을 지레짐작했다.
싸구려는 레벨만으로 전투력을 측정하고, 고급은 스킬 등급이 레벨이랑 합쳐져서 반영된다.
유일한 단점은?
생산계열과 보조계열 스킬 등급도 전투력에 반영된다.
요리A든 검술A든 똑같이 취급한다고 할까!
나는 혼돈의 유물에 깃든 기억을 읽기에 앞서서, 내 전투력을 측정해보고 싶었다.
우선은 다른 사람부터.
“저 인간의 전투력은?”
식당 바닥을 닦는 부족민F를 가리켰다.
▷종족: 휴먼
▷레벨: 96
▷직업: 요리사(경력→요리↑)
▷스킬: 요리S 화로A 직화A 도축A 발효B…
▷상태: 경계
누추한 부족의 일개 요리사 능력치가 아니었다.
원래 판타지아 대륙이었다면 내 동료였던 ‘요리왕’을 제치고 그 이름을 가져갔을 것이다.
일리나가 안경을 썼다.
그리고 말했다.
“저 인간은 1053이다.”
“정말로 숫자로 측정하는 모양이네.”
하지만 표본이 부족했다. 저 숫자가 높은 건지, 낮은 건지 파악하려면 비교할 대상이 필요했다.
“참고로, 나는 5160000이다.”
“...비교하기엔 차이가 너무 크군.”
그러나 일리나의 급변한 능력치를 보고는 수긍했다.
▷종족: 아크 엘프
▷레벨: 4985
▷직업: 도적(약자→행운↑)
▷스킬: 은신Z 잠복Z 변장MAX 단검SSS 기력SSS…
▷상태: 긴장, 흥미
부족장F가 요리왕이라면, 일리나는 ‘도적의 신’이었다.
이대로 평범한 판타지아 대륙에 던져놓는다면 그녀가 못 죽이는 대상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듣고 놀라지 마라. 이건 모든 마법 안경의 원조다. 제작자는 최초의 용사의 동료였던 발명의 여신. 그분은 내 조상님의 방계친척으로 요정이셨다. 그러니 이건 훔친 게 아니라 정당한….”
“직업이 도적인데 무슨.”
“웃….”
반박하지 못한 일리나가 출렁 가슴을 떨었다. 저게 가짜라는 사실이 참으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차례.
“내 전투력은 몇이지?”
“안 그래도 측정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한다. 지난 3년 동안 무수히 많은 용사를 만나봤는데, 1만을 넘는 자조차 드물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너무 실망하지 마라. 도구는 도구일 뿐, 숫자로 우위를 가릴 순 없다.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 여행자금이 필요할 때, 투기장에서 매우 유용하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만.”
“사족이 길다.”
“그러는 너는 처음 만난 약혼녀에게 너무 매정하다! 이상하게 낯가림도 전혀 없고. 정말로 내 약혼자가 맞는 거냐?”
일리나가 안경 너머로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툭 던지듯 말했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다면 너의 그 가슴이 가짜란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겠어?”
“헉?!”
내 전투력 측정은, 자존심이 걸린 중대한 비밀을 들켜서 혼란에 빠진 일리나가 서서히 제정신을 차린 후에 진행됐다.
“그래서 몇?”
“재촉하지 마라. 이 유물은 전투력에 전투계열 스킬만 반영되고, 정확히 숫자로 표기된다는 독보적인 장점이 있지만, 너무 오래된 물건이라서 측정에 시간이 좀 걸린다. 1천 돌파…. 5천 돌파….”
나는 숫자를 부르는 일리나의 생중계를 들었다.
체중계처럼 한 번에 나오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처럼 1부터 서서히 올라가는 듯했다.
“음? 10만에서 멈췄어?”
계속 숫자를 부르던 일리나가 10만을 넘고부터 말이 없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내 물음에 부정했다.
“...아니다. 계속 올라가고 있다. 이젠 소소한 자릿수는 무시하면서 부르는 간격이 커진 것뿐이다. 12만 돌파. 이럴 수가…. 내가 지금까지 봐온 용사 중에서 독보적으로 강했던 그조차 9만이었는데.”
“그?”
어떤 새끼야?
“이름은 모른다. 용사 중에선 강한 편이었지만, 전체로 따지면 용병단 간부 수준으로 나보다 약하다. 무엇보다도, 북대륙의 유명인사인 얼음공주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한심한 인간 사내였기에 관심 두진 않았…. 15만 돌파.”
“그렇군.”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전투력 측정이 끝나길 기다렸다.
슬슬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때쯤, 나는 그녀가 꽁꽁 감춰온 본가(本家)까지 자연스럽게 편승하는 데 성공했다.
내 전투력 측정이 끝나면 바로 출발할 것이다.
“100만 돌파…. 이 무슨…?”
일리나가 안경 너머로 내 얼굴을 보면서 경악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장단에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전투력 측정이 끝날 기미가 안 보였던 탓이다.
“저건 속도가 안 빨라지나?”
자릿수가 커지면 그만큼 빨라지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거 아니야?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능은 없다. 아니, 문언에 따르면 과거에는 있긴 했었던 모양인데, 현재는 고장 나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110만 돌파.”
저 구닥다리 안경의 전투력 측정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다행히도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
“둘의 대화가 금방 끝날 줄 알고 조용히 기다렸는데, 더는 안 되겠소. 식당 문을 닫아야 하니, 이만 나가주시오.”
부족민F가 우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용사님을 쫓아내는 불친절한 원주민’이라고 막 욕해줬겠지만, 지금은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주인장. 이 식당은 여관도 운영하잖는가? 그리고 나는 방을 예약할 예정이다.”
눈치 없는 일리나가 축객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부족민F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플로리아, 네가 저 낯선 남자랑 시시덕거리는 사이에 모든 방이 손님들로 꽉 찼다.”
“그럴 리가…. 이 식당에는 아까부터 쭉 나밖에….”
“아무튼, 꽉 찼다. 그게 아니면, 푸른 늑대 부족의 혀인 내 말을 의심하는 건가!”
“큭!”
남대륙에는 재미난 풍습이 있다.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이곳에서는 자신이 소속된 부족 내의 지위에 따라서 ‘신체 부위’를 호칭으로 받는다.
심장=족장
오른팔=최강의 전사
왼팔=족장의 반려자
눈=최고의 사냥꾼
귀=원로
혀=최고의 요리사
코=제사장
오른발=가장 멋진 남성
왼발=가장 아름다운 여성
...
부족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리고 미각을 담당하는 ‘혀’를 이름으로 허락받은 부족민F는, 부족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간부다.
하지만 조그마한 부족에서 직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심장을 맡은 족장 외의 나머지는 뭔가 있어 보이려고 붙인 별명에 가까운 명예직이다.
하지만 그 별거 아닌 감투와 명예에 집착하는 것이 또 남대륙 원주민들이었다.
누구의 오른팔이 가장 강한가?
누구의 발이 가장 넓은가?
누구의 콧대가 가장 높은가?
누구의 눈이 가장 밝은가?
...
그리고 부족민F는 이 근방에서 가장 훌륭한 혀로 유명하다. 그래서 족장의 딸이랑 결혼할 수 있었던 거고.
요리 잘해서 팔자 폈다고 할까?
그래서 ‘혀’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아내의 비밀로 우정을 견고히 다진 혀 친구. 바로 나가줄 테니, 메두사 1마리만 구해줬으면 좋겠는데.”
“손님. 어디까지 갈 것이오? 아시겠지만, 탈것으로 훈련받은 메두사는 비싸오. 가까운 거리라면 늙은 뱀을 추천하겠소.”
“남부까지.”
내 목적지는 남부보다 더 아래인 극지방이었지만, 거기까지 갈 수 있는 튼튼한 메두사는 좀처럼 찾기 힘들기에 허들을 낮췄다. 있더라도 족장 전용이라서 사거나 임대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내 목적은 남대륙에 온 기분을 내려는 것이다.
정복자 칭기즈칸으로 유명한 지구의 몽고로 여행 가면, 마유주를 맛보고 말을 꼭 타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
중부의 사막만 메두사를 타고 가로지를 계획이다.
물론, 중간에 일리나의 집도 들르고.
“허! 그 죽음의 사막을 가로지르겠다는 건가? 그 정도로 우수한 메두사는 다 주인이 있어서 판매를….”
“부인께서-”
“하하! 성급한 손님이시구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라고 하지 않소이까? 잘 생각해보니, 구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시오!”
여행을 만끽할 메두사 문제는 해결.
말 나온 김에 다른 질문도 하기로 했다.
“용사들은 어디 있습니까?”
남대륙에도 서대륙처럼 101명의 용사가 소환됐을 터.
하지만 식당 내내 죽치고 있었던 나는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용사’라는 단어조차 듣질 못했다.
▶사과: 죄송해요. 말은 안 했지만, 저는 강한수 생도님이 1회차 원한을 복리로 계산해서 식당 주인에게 꼬장 부리려고 이곳에 죽치고 계신 줄 알았거든요.
교생 아가씨. 나는 오지랖과 호구 정신으로 무장한 정의로운 용사야.
사소한 원한은 이름처럼 금방 잊는다.
▶질문: 이름을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오! 맹한 줄 알았던 교생 아가씨의 질문이 예리한걸?
하지만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겠다. 내가 알렉스와 라누벨의 이름을 절대 잊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다고 보니까.
“도적E.”
“......”
“너 말이야, 너. 눈치 없는 약혼녀 아가씨.”
“...그대가 정말로 내 약혼자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따질- 흠흠. 여쭤볼 생각이긴 하지만, 결혼하면 매우 피곤해질 것 같다.”
“아직도 전투력 측정 중이야?”
“그렇다. 현재…. 1억 돌파…? 그대는 정녕 사람인가?”
“사람이냐고? 대단히 실례되는 질문이네. 네가 정말로 내 약혼녀인지 의심스러워졌어.”
“미, 미안하다.”
도적E에게 사과도 받았고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주의의 나는, 그녀의 실수를 대범하게 용서해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듣는 정령 기분 나쁘니까.”
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정령’이다.
이 둘 사이에는, 말랑말랑한 보통의 슬라임과 몰랑몰랑한 마스터 몰랑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
▶당혹: 무슨 차이인지 더욱 모르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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