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11회차] 직업병
식당을 나온 멋진 용사님과 변변찮은 약혼녀는, 서대륙과 남대륙을 가로지르는 큰 강 주변의 비옥한 땅에서 목축업으로 생활하는 ‘푸른 늑대 부족’의 친구 도움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부족민F.
서대륙에서 남대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식당을 차리고, 그곳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웃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바가지를 씌우는 초보 신랑이다.
“Meeeeee~”
“메두사. 즉, Me-頭蛇. 메~~~라고 우는 머리의 뱀이란 뜻이지.”
“.......”
“.......”
▶진지: 완벽한 줄 알았던 강한수 생도님도 전혀 못 하시는 게 있었네요. 농담하시면 안 될 것 같아요.
교생 아가씨! 이건 농담이 아니라구?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메두사는 염소처럼 그렇게 운다.
상반신은 아름다운 미녀, 하반신은 뱀.
메두사랑 외형이 흡사한 라미아(Lamia)라는 몬스터도 있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종족이다.
우선은 덩치.
성체 기준, 상반신 크기가 사람이랑 똑같은 라미아랑 달리, 메두사는 상반신만 2m에 달하는 ‘거인’에 속한다.
긴 하반신까지 합치면 그 길이가 약 20m!
그리고 라미아는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반면, 메두사는 전혀 하지 못하고 알아듣기만 한다.
그 이유는 구강구조에 있다.
멀리서 상반신만 보면 눈이 튀어나올 만큼 먹음직스럽게 생긴 메두사지만, 입을 벌리는 순간 확 깬다.
“Me~~~~”
혀가 뱀이다.
그리고 이 작은 것이 본체다.
가녀리면서도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외모를 한 상반신은 본체를 감싸는 소라껍데기랑 비슷하다.
덤으로 먹잇감을 유혹하는 역할까지.
어떻게?
사막에서 뱀의 하반신은 땅에 묻고. 인간의 상반신만 내놓은 채 기다린다. 그러다가 먹잇감이 다가오면 모래 속에 숨겨둔 하반신으로 습격하는 것이다.
상반신의 역할은 또 있다.
크고 단단한 이빨은 작은 본체의 주둥이로 먹잇감을 먹기 좋게 썰 수 있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평범한 뱀이랑 다르게 청력도 열려있다.
또한, 매력적인 상체는 인간 여성의 가슴처럼 부풀어 있지만, 여기에는 낙타 등의 혹처럼 기름이 저장되어 있다.
덤으로 영양소까지.
그래서 한 달 넘게 아무것도 안 마시고 먹어도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 있으며, 하반신을 모래 속에 묻어둔 채 가만히 잠복할 시에는 1년도 견딜 수 있다.
“이놈입니다, 손님. 아주 건강한 수컷이오.”
부족민F가 메두사의 수박처럼 크고 탱글탱글한 두 혹 중 하나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메두사의 젖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이며, 오랫동안 수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점점 쪼그라든다. 그래서 아주 드물긴 하지만, 굶어 죽은 메두사는 혹이 작아져서 상반신이 평평하다.
아름다운 인간 여성으로만 보이는 상반신은 위장용 껍데기일 뿐. 메두사의 알맹이는 수컷과 암컷이 따로 존재한다.
그래서 상반신만 봐서는 구분할 수 없다. 대다수 파충류가 그러하듯 밑을 까봐야 알 수 있다.
“건강해 보이긴 하네.”
전문가가 아닌 나는 출렁이는 혹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쉬지 않고 질주해도 오래 버틸 것 같다.
덤으로 비상식량까지.
사막을 여행하는 서대륙 원주민들은 물통 대신 ‘메두사의 젖’이라고 부르는 혹을 짜서 수분과 체력을 보충한다.
“용사는 정말로 이 흉측한 생명체를 타고 갈 셈인가?”
열등한 종족의 한계 탓에 아무리 먹어도 커지지 않는 일리나가 메두사의 우람한 혹을 부러운 얼굴로 보면서 내게 물었다.
나는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게 여행이잖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나를 빼고도 500명이 넘는 용사가 있으니까.
아직은 먼지처럼 약하지만, 나처럼 판타지아 대륙에서 10년만 굴러도 A급 용사님쯤은 되어있을 것이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이렇게 성장했으니까.
아들이 사는 북대륙은 맨 마지막이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내가 반시계방향으로 돌아서 동대륙의 5대 재앙을 토벌했을 때쯤에 북대륙이 용사들에게 정리되는 것이다.
▶의문: 먼지들만으로 그게 가능할까요?
교생 아가씨. 희망을 가져도 돼!
나는 그 성공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다.
흡혈귀들이 갑작스러운 자외선 공격으로 몰살당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하자면.
내 당부를 받은 암흑공주가 서대륙의 실직자 101명을 북대륙으로 보낼 것이다.
이건 내가 북대륙으로 가든 안 가든 결정된 사항이었다.
추운 북극에서 세계정복을 준비하는 5대 재앙은 202명의 용사에게 맡기고, 나는 검희가 낳은 아들을 만나서 휴식을 만끽할 예정이었으니까.
나는 우정의 힘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비열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앞으로 5년쯤 더 시간이 흐르고, 죽어도 바로 부활하는 용사들이 가상현실게임(VR) 하듯 끊임없이 도전하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용사가 ‘용사의 소양’을 공부하는 교실이나 다름없는 판타지아 대륙은 그런 시스템 구조로 되어있다.
“슬슬 가볼까.”
메두사가 빠르긴 하지만,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로 날아가는 편이 압도적으로 훨씬 빠르다.
그러나 나는 휴업 중.
6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505명의 지구 동포에게 맡기고 잠시 쉬기로 했다. 나는 떳떳하다. 내 몫으로 서대륙을 깔끔히 정리했잖아?
...지나치게 깔끔해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Me~~~~”
푸른 늑대 부족의 소유물임을 뜻하는 ‘푸른 늑대 머리가 그려진 안대’로 눈이 가려진 메두사가 구슬프게 울었다.
메두사의 약점은 아름다운 상반신 껍데기의 두 눈이다.
이 눈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처럼 눈이 마주친 상대를 돌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일명, 석화(石化).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잘린 꼬리는 1시간이면 원상복구 될 만큼 재생력이 뛰어난 메두사지만, 판타지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두 눈만은 예외인 탓.
한 번 적출되거나 손상된 눈은 시간이 흘러도 회복되지 않는다.
그리고 본체에 굉장히 긴 고삐를 채웠다.
미녀가 국수 한 가락을 입에 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저건 메두사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방아쇠다. 살짝만 강하게 당기면 연약한 본체가 뽑히기 때문이다.
이런 메두사는 굉장히 순종적으로 변한다. 똑똑하진 않지만,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 아는 탓이다.
여기까지 끝나면 ‘몬스터’가 아닌 ‘가축’으로 분류된다.
“나는 요정 종족의 신체적 특징을 비웃듯 부정하게 생긴 저 괴물을 절대로 타지 않는다! 내 발로 가겠다.”
“편한 대로 해.”
고집부리는 일리나가 마음대로 하게 놔뒀다.
사막 아래에 흐르는 지하수까지 닿을 만큼 긴 고삐를 동그랗게 말아서 내게 넘긴 부족민F가 메두사에게 안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메두사는 상체를 세우는 이종보행이나 다름없기에 당연히 그 안장의 형태도 달랐다.
쉽게 표현하면, 어부바 가방이다.
아기나 애완견을 등에 태우는 가정용품.
그리고 사막 여행에 필수적인 물통 역할을 해주는 두 혹을 보호하기 위해 브래지어처럼 생긴 강철 보호구도 착용시켰다.
여기를 다치면 메두사의 체력과 재생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꼭 필요한 조치다.
“손님. 비밀은···.”
“아내의 취향이 그렇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이 용사님은 계산이 철저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비싼 메두사를 공짜로 주고받을 만큼 돈독한 사이잖아?”
“주는 게 아니라 대여-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손님. 돈독한 사이지요!”
술김에 나온 음담패설에서 시작된 우리의 아름다운 우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Me~~~~!”
금방 준비를 마친 메두사가 나를 태우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놀이동산의 꼬마 기차처럼 긴 꼬리를 좌우로 부드럽게 유영하며, 부드러운 모래 위를 나아갔다.
산책하듯 가볍게 달릴 때는 말로 방향을 설명해도 되지만, 지금처럼 빠를 때는 메두사가 제대로 듣질 못한다.
이럴 때는 목을 건드려서 신호를 보낸다.
원리는 운전대랑 비슷하다. 그러나 단순히 좌우로 돌리는 핸들이랑 다르게 이건 상당한 숙련을 요구한다.
물론,
▶감탄: 강한수 생도님은 못 하시는 게 없네요! 농담 빼고.
농담 아니었다니깐, 교생 아가씨!
1회차 때, 나는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용사 페스티벌 때, 건방진 요정이 비룡 운전면허증을 물어서 당황하긴 했지만, 나는 비룡을 타고 싸우는 용기사(龍騎士)처럼 활약했던 전적도 있었다.
“...아! 도적E. 들를 곳이 있어.”
판타지아 남대륙에서 해야 할 일이 또 떠올랐다.
“아까부터 제 이름을 일리나랑 도적E를 섞어서 부르는데, 둘만 있을 때는 똑바로 불러줬으면 좋겠다.”
“그러지, 도적E.”
“어째서 그 이상한 명칭이 똑바로 부르는 게 되는 거냐?!”
“지금은 이름 같은 사소한 문제를 따질 때가 아니야. 너도 나를 이름 대신 용사라고 두루뭉술하게 부르잖아?”
“부끄러워서···. 에잇! 됐다! 마음대로 불러라! 그런데 들를 곳이란 게 어디냐?”
아주 좋은 질문이다.
“예전에 기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내게 모욕을 줬던 도마뱀W를 사냥하러 갈 거야. 아! 너무 걱정하지 마. 여기서 가깝거든.”
“도마뱀W는 또 뭐냐? 내가 아는 말로 설명해라.”
솔직히 말해, 알 것 없다.
정의로운 용사님의 모험 중에 수없이 스쳐 가는 동료들처럼 죽이고 지나쳐가는 무수히 많은 도마뱀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래도 알고 싶다고 하니 가르쳐주자.
“남대륙의 열기가 심해지지 않도록 억제하는 빙하와 시간의 수호룡(守護龍). 빙룡왕 슬레이아스.”
외국어 암기 못 하는 학생을 독촉하듯, 내가 이름을 자꾸 까먹는다고 교생 아가씨가 자주 핀잔 주는데, 그건 심각한 오해다.
나는 중요한 내용은 절대 잊지 않는다.
*
“수호룡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사냥한다는 거냐?! 위대한 존재를 사냥하는 게 가능할 리가···. 전투력 186억 돌파···? 너는 대체 뭐냐?”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내 전투력을 측정하고 있는 네 근성과 집착이 더 신기하다고 본다만.”
“이건 당연한 일이다. 나, 나, 나, 남편 될 인간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아두려는 게 이상한가?! 시, 시, 시, 신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마음가짐이다! 이상한 건 너다, 용사. 나에 대해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가-?”
“전혀.”
이전 회차들에서 내 손으로 직접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을 마쳤고, 대장내시경과 X레이검사보다 더 정밀하게 내장기관과 척추를 관측해봤다.
여기서 더 뭘 조사하란 말인가?
메두사 옆에서 질주하던 도적E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혼잣말하는 게 들렸다.
“뭐지, 이 짙은 패배감과 굴욕감은···?”
“괜찮아.”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잦은 회귀로 그녀에 관해서 속속들이 아는 내가 이상한 것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사랑의 힘인가? 고작 그 한마디에 내 몸과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건 비정상.”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이름을 빌미로 약혼자라고 주장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수컷에게 사랑을 느끼는 건 비정상이다.
단, 사랑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은 있다.
여전히 올라가고 있는 내 전투력을 본 도적E가 지극히 동물적인 감성으로 강한 수컷에게 이끌리는 것이다.
야만적인 판타지 대륙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이 세계에서 낭만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들을 뜯어보면 대부분 그렇다.
“바보 취급하지 마라! 나보다 어린- 하여간 용사! 질문이 있다. 빙룡왕 슬레이아스 님은 남대륙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존재다. 더위를 싫어하시는데도 작은 존재들을 위해 남대륙에 정착하신 그분이 사라지면, 이 대륙은 5대 재앙 페닉스가 발산하는 열기에 지금보다 더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냥하겠다는 거냐?”
“하핫! 그래,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지!”
“용사···?”
“가보면 알아.”
이놈의 직업병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휴가 중에도 정의구현이라니?
강한수란 이름의 지구 출신의 용사는 대체 얼마나 호구란 말인가···. 교생 아가씨. 학점 잘 매겨달라고 해줘.
▶의문: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
비밀 친구의 말을 믿지 못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우리의 비밀스러운 우정이 벌써 식은 것 같다.
교생 아가씨도 가보면 알아!
“수호룡? 뭐, 거짓을 수호하는 거지 같은 용이긴 하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훌륭한 용사와 일용직 약혼녀는 위선과 날조로 가득한 용의 둥지로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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