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91화 (191/430)

 191화

[11회차] 용의 둥지

빙룡왕 슬레이아스.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는 판타지아 남대륙 중부 한복판에 얼어붙은 오아시스를 둥지로 삼은 얼음 속성의 용이다.

하지만 그 오아시스는 일종의 침대.

집은 남대륙 중부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용은 힘이 강할수록 지배하는 영역의 면적도 커진다.

용들은 남의 영역에 둥지를 만들 수 없다. 주인이 없는 땅을 찾거나 빼앗거나 둘 중 하나다.

그렇기에 영역이 넓은 용은 강하다는 공식이 생겼다.

“용사.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빙룡왕 슬레이아스 님은 판타지아 대륙에서 가장 강하신 용이다. 전투력이 300억을 돌파한 너라도 힘들 것이다.”

“가장 강하다고?”

“그, 그렇다. 노려보지 마라. 눈빛이 무섭다!”

도적E뿐만이 아니다.

판타지아 대륙의 원주민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남대륙의 광활한 사막을 영토로 삼은 빙룡왕 슬레이아스가 용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그 증거로, 빙룡왕을 제외한 남대륙의 용들은 전부 해안이랑 인접한 땅을 둥지로 삼고 있다.

“망룡왕 뇌비우스를 빼고 최강을 논하면 안 되지.”

친애하는 내 동료는 중앙대륙 전체가 영역이다.

그 탓에 나머지 5대 재앙들은 영토전쟁으로 마주칠 일이 없으며, 용들은 비옥한 평야가 많은 중앙대륙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한다.

...약 100년 전까지는 말이다.

망룡왕 뇌비우스가 500년 전부터 자취를 감추면서, 눈치를 보던 용들이 하나둘 중앙대륙에 찔끔찔끔 발을 들여놨다.

그래서 중앙대륙에는 둥지를 구하지 못하고 ‘인간 코스프레’를 하며 떠돌던 어린 용들이 은근히 많이 산다.

용을 사냥했다고 자랑하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99%가 중앙대륙에서 업적을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용만이 아니다.

강력한 몬스터도 중앙대륙에 거의 없다.

망룡왕 뇌비우스의 패기를 흠모하는 강자들이 알아서 영토를 포기하고 다른 대륙으로 떠난 탓이다.

식인 나무처럼 이동이 제한된 몬스터를 제외하고는 전부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중앙대륙은 인간을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레벨과 스킬이 다른 대륙보다 떨어진다.

망룡왕 뇌비우스.

단 하나의 용 때문에 대륙의 생태계가 바뀌었다!

“망룡왕은 악룡이지 않은가? 놈을 용으로 분류하는 것은 용족 전체를 모독하는 것이다.”

“일리나.”

“오! 제대로 불러주는-”

“그래서 네가 도적E인 거야.”

“그게 무슨 뜻이냐?!”

외모와 능력은 상관없다.

내가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경우는 2가지뿐이다.

청산이 불가능할 만큼 원한이 깊거나 사고가 열려있거나.

마왕 페도나르나 망룡왕 뇌비우스 같은 유명인사들은 너무 많이 들어서 머릿속에 박혔지만, 대부분은 위의 2가지에서 걸러진다.

즉, 신경 쓸 필요 없는 엑스트라.

돌아서면 잊힐 만큼 존재감 없는 인연이다.

“거의 다 왔군.”

내 머릿속에는 판타지아 대륙의 3D 지도가 저장되어 있지만, 모래뿐인 사막에서 GPS처럼 정확한 위치를 탐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Meeee...”

메두사가 앞으로 나아가길 꺼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예민한 초감각을 가진 몬스터의 생존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빙룡왕 슬레이아스의 둥지에 가까워졌다는 증거.

아직은 사막의 열기가 그대로였지만, 조금만 더 가면 날씨가 확 변할 것이다.

휘이잉~!

억지로 전진시킨 메두사를 타고 나아가길 잠시, 냉장고를 연 것처럼 시원한 냉기가 엄습했다.

“Meeee.”

메두사는 완전히 멈췄다.

녀석의 생사(生死)를 결정하는 고삐를 내가 쥐고 있지만, 이 앞으로 나아가도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을 거부하고 멈춘 것.

“어쩔 수 없지.”

나는 메두사의 고삐를 손에서 놓고 안장에서 내려왔다.

똑똑한 말들이 부르면 달려오듯, 메두사도 고삐를 묶지 않고 풀어놔도 도망치지 않는다.

눈을 잃은 시점에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축처럼 인간에게 길들었다고 할까?

“으으…. 정말로 오다니….”

도적E는 주춤주춤 뒤따라오면서 안절부절못했다.

반면,

“얼음 꼬마가 얼마나 컸는지 볼까나~”

최초의 정령은 느긋했다.

소파에 드러누워서 심야 영화를 감상하는 아저씨와 아줌마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이런 우리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드드득….

드득….

인간의 모습으로 깎아놓은 얼음이 움직였다.

얼음 골렘.

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망룡왕 뇌비우스는 이런 구차한 경비체계를 마련해두지 않지만, 대다수 용은 둥지를 지킬 무언가를 설치한다.

경비, 골렘, 함정, 미로, 환영, 마법….

용의 숨결이 워낙 압도적인 효율과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에 ‘강한 용’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지만, 용은 ‘마법의 선구자’라고 불릴 정도로 마법에 능숙하다.

북대륙에서 유행하는 골렘도 마찬가지.

인간이 만든 골렘이 걸음마 수준이라면, 용의 골렘은 육상선수다.

물론, 현자와 공학자A가 합심해서 개발한 깡통은 예외다. 합체 로봇이 아니라서 무척 유감스럽긴 했지만….

“아…. 이번 기회에 도전해봐야지.”

일전에 무참히 파괴됐지만, 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설계도 또한 무사하다.

캡틴 판타지!

입학시험장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현자라면 현재보다 더욱 훌륭한 골렘을 개발해낼 수 있을 터.

이래저래 북대륙에 갈 일이 많아졌다.

“방문객이여.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가 아니라면 암호나 통행증을 제시해주십시오.”

골렘 중 하나가 정중히 말했다.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처럼 호리호리하게 생긴 꽃미남.

빙룡왕 슬레이아스의 취향이 반영된 외형이다.

...그래서 이 도마뱀은 나에게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

“사막에도 눈은 내린다.”

“암호가 확인됐습니다. 남대륙의 패자이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용이신 빙룡왕 슬레이아스 님의 성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얼음 골렘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정면돌파도 상관없지만, 1회차 지식을 썩혀둘 이유도 없다. 비실비실하게 생긴 외형이랑 다르게 골렘의 능력치도 꽤 높고.

▷종족: 아이스 골렘

▷레벨: 3852

▷직업: 감시자(감시→오감↑)

▷스킬: 얼음MAX 복구MAX 내성SS 오감SS 민첩SS…

▷상태: 감시, 경계, 대기

이런 놈들이 최소 500개체.

입학시험장의 능력치 뻥튀기도 만능은 아닌 듯했다.

레벨과 스킬이 비례하게 성장해야 하는데, 초월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MAX급에서 멈췄다.

그 대신, 레벨이 더 오른 느낌?

“저 골렘들의 전투력을 측정해보고 싶은데, 용사의 전투력 측정이 아직 안 끝나서 아쉽다. 500억 돌파.”

해탈해버린 걸까?

불안에 떨던 얼굴이 어느새 호기심으로 바뀐 도적E가 얼음 골렘을 보면서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자…. 그러면….”

얼음 골렘만 지나가면 이후에는 경계할 게 전혀 없다.

사막의 모래를 꽁꽁 얼려서 만든 토성(土城)의 정문을 지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호화로운 온천 시설이다.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신들이 이용했을 법한 인테리어.

하얀 대리석 대신 부드러운 모래를 벽돌처럼 모양내서 꽁꽁 얼린 게 특징이다.

시설관리자도 당연히 있었다.

“용사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어 주세요. 이 열쇠에 적힌 번호랑 동일한 번호가 적힌 옷장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판타지아 남대륙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 요정이 내게 열쇠를 건네며 설명했다.

순금으로 된 목걸이와 귀걸이, 팔찌, 발찌를 착용한 알몸을 긴 새하얀 천으로 둘러서 아슬아슬하게 가린 복장.

전부 여성이었다.

“...그러지.”

나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꼈다.

이곳에 유흥지처럼 호화찬란한 온천 시설과 요정들이 있다는 건 1회차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용사란 사실을 일개 요정이 알고 있다?

이건 좀 이상했다.

“제 동족분도 계셨군요. 외람되오나, 여기서 용사님이랑 잠시 떨어져 주셔야 합니다. 용사님께서는 이미 이용해보셔서 아시겠지만, 남성과 여성 탈의실과 온천이 분리되어 있기에 그 점은 양해해주세요.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시길. 휴게실에서 만날 수 있고, 숙소도 붙여드리겠습니다.”

“아, 알겠다.”

살짝 넋을 놨던 도적E가 서둘러 답했다.

그녀는 빙룡왕 슬레이아스의 둥지에서 일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남대륙에서 요정은 멸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인간들의 부족에 섞여서 극소수 살긴 하지만, 그들은 전부 중앙대륙의 암시장에서 팔려온 노예가 대부분이다.

남대륙 토종(?)은 그녀의 가족뿐이다.

“일리단, 이따가 보자. 아! 그리고 여기서 지급해주는 옷은 혼자 입어보려고 애쓰지 말고 안내원에게 맡겨. 어설프게 흉내 내면 공공장소에서 훌러덩 벗겨지는 참사를 맞이할 수 있으니까.”

나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 요정들은 나를 ‘이미 온천을 이용해본 용사’로 착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여기에 장단을 맞춰서 연기할 필요가 있다.

일단은 말이다.

“마약 용사, 경험담이냐?”

최초의 정령이 물었다. 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서식하는 왕관 쓴 정령들도 귀를 쫑긋 세우며 경청할 태세를 갖췄다.

나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건 끔찍한 비극이었지. 하지만 동료들 뒤치다꺼리하면서 생긴 무수히 많은 흉터와 근육, 잘 벼려진 내 성창(聖槍)에 반한 이곳 요정들이랑 뜨거운 나날들을 보낼 수 있어서 나쁜 경험은 아니었어.”

물론, 들통나면서 내 평판은 곤두박질쳤다.

자기 부주의로 변변찮은 속옷을 보여주고 칼부림하는 여성 동료들은 내가 수도승이나 내시처럼 지내길 진심으로 바라는 듯했지만, 그런 부조리한 요구에 굴복해서야 어찌 용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음양의 이치에 순응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사회부적응자가 아니다.

“흠. 마약 용사. 좋아하는 수컷이 다른 암컷이랑 자면 신경질 내는 건, 사랑에 빠진 암컷으로서 당연한 태도라고 본다만?”

“그딴 건 없었어.”

벌레처럼 무시해온 용사가 이성들에게 인기 많은 걸 인정하지 못하고 배알이 꼴린 것뿐이다.

▶응원: 강한수 생도님, 힘내세요! 지나간 고통을 회상하는 건 즐거운 일이란 말도 있잖아요? 다만, 여성의 둔부(臀部)를 조금만 더 배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교생 아가씨, 아저씨만 아니면 사랑해! 알러뷰(I love you)~!

▶단호: 미안해요. 우리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 적어도…. 강한수 생도님이 졸업해서 어엿한 사회인이 될 때까지는 이 선을 절대로 넘으면 안 돼요.

그렇게 우리는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실례합니다, 용사님. 머리 위에 앉아있는 꽃의 정령은 여성체이기에 남성 탈의실에 들어갈 수 없어요.”

요정이 최초의 정령을 보며 말했다.

이건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귀여운 요정 아가씨. 이런 말을 하긴 살짝 부끄럽지만, 저는 여성이 아닌 중성이랍니다. 그리고 인간종의 문화를 정령에게 강요하는 건 억지예요. 제가 인간 수컷의 알몸을 봐서 뭐하겠어요?”

뭐하긴, 킁킁거리지.

가식이란 가면을 쓴 최초의 정령이 고귀한 여신님처럼 말했다. 내가 이 변태 정령을 만난 첫날에도 딱 이런 느낌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그녀는 내 개조로 막강했다.

▷종족: 퍼스트 스피릿

▷레벨: 1064

▷직업: 대모(자식=존엄↑)

▷스킬: 존엄ZZ 환각Z 최면Z 매혹Z

▷상태: 중독, 집착, 엄격, 근엄, 진지

보유한 초월영역 스킬들이 하나 같이 정신계열이다.

남성 탈의실 입구나 지키는 평범한 요정이 이 은밀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들어가세요.”

완전히 설득당한 요정이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깨에 힘을 주며 고귀한 척하는 자세를 푼 최초의 정령이 안도하는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휴! 천만다행이다, 죽는 줄 알았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다른 정령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선 기가 막혔다.

“잠깐 떨어진다고 안 죽어.”

“마약 용사. 너는 가해자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다. 너에게 중독된 피해자들의 마음을 전혀 몰라.”

“어, 그래.”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넓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옷장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스킬 창고에 전부 보관하고 온천에서 지급한 천을 몸에 둘렀다.

이 넓은 온천에서 유일하게 남성 요정을 만나볼 수 있는 탈의실에서 요정이 살짝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용사님. 옷을 입으시는 손이 능숙하시군요.”

“처음이 아니니까.”

나는 요정에게 건성으로 대답해준 후에 탈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드러나는 본격적인 온천.

“허…. 설마, 싶었는데….”

판타지아 남대륙에 소환된 용사들은 이곳에 다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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