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95화 (195/430)

 195화

[11회차] 이 용사님은 정상인입니다!

도적E의 가족이 사는 은거지는 빙룡왕 슬레이아스의 둥지에서 멀지 않았다.

메두사를 타고 1시간쯤 이동할 거리.

끔찍한 모래바람과 지평선 너머까지 모래만 펼쳐져 있는 사막이라고 생각했던 곳의 실체는 전혀 달랐다.

“신기루도 판타지로군….”

신기루(mirage).

실제로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현상.

지표면과 대기의 온도 차로 빛이 굴절하면서 발생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오아시스.

가까이 있는 줄 알고 달려가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면서도 절대 도착하지 못하는 오아시스의 희망 고문을 떠올리면 알기 쉽다.

그런데 판타지는 여기서 한술 더 떴다.

보통의 신기루는 아지랑이처럼 사물이 뿌옇게 출렁이지만, 판타지아의 신기루는 감쪽같이 속였다.

MAX급 용사님의 예리한 감각마저도.

이건 빛의 자연적인 굴절을 넘어선 마법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실제로 마법일지도 모른다.

“용사. 진정한 요정 왕궁에 온 걸 환영한다!”

도적E가 오아시스 옆에 지어진 통나무집을 가리키며 자랑했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장난이 아님을 읽고 답했다.

“저걸 왕궁이라고 표현하는 건, 우주의 모든 왕궁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만….”

이마저도 제대로 된 통나무집이 아니다. 주위의 야자수를 잘라서 대충 만든 탓에 모양새부터 대단히 엉성했다.

그 안에 사는 요정도.

“어머! 일리나, 어서 오렴!”

야자수 잎으로 아래를 가린 여성이 방정맞게 뛰어나오며 외쳤다. 그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야자수 잎을 엮어서 만든 양산으로 사막의 뜨거운 햇살을 막고 있었다.

이봐. 그걸로 몸부터 가리라고….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녹색 생머리, 그런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얼굴은 아마존 여왕님을 연상케 하는 도도한 미녀였다.

그 밑으로 가녀린 목과 예쁜 경추(頸椎)가 보이고, 더 아래로는…. 참으로 요정다운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저 요정이 도적E의 친모(親母).

그녀의 직업은 판타지아 대륙에서 가장 흔한 과부(寡婦)였다.

이전 회차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도적E의 부친은 유물을 모으러 떠나서 못 돌아왔다고 한다.

즉, 도적E에게 가족은 어머니 하나뿐인 셈.

내게는 일시적이나마 장모(丈母) 되는 요정이랑 눈이 마주쳤다. 지금부터는 굳이 약혼자 행세할 필요가 없으니….

“어서 오세요, 사위님. 금방 또 만났네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저쪽에서 먼저 선수 치는 바람에 나는 조용히 장단을 맞췄다.

“저, 정말로 내 약혼자였단 말인가…!”

도적E가 경악했다.

정의로운 용사님의 말을 끝까지 안 믿었던 모양이다.

용사님이 마검을 성검이라고 우겨도 믿어야 하는 약혼녀로서 실격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장모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리나. 얼른 씻으렴. 그동안 엄마는 멋진 사위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있을 테니.”

“으으…. 네.”

얼굴이 새빨개진 도적E가 오아시스 쪽으로 달려갔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기에 가림막 같은 건 없었다. 벗어둔 옷이 모래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넣어두는 바구니 딸랑 하나뿐.

남자도 아닌 여자가 참으로 무방비하게 살고 있었다. 그만큼 이 장소가 은밀하고 안전하다는 뜻이겠지만.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종족: 올드 엘프

▷레벨: 9999+

▷직업: 암살자(야간→잠복↑)

▷스킬: 암살ZZZ 항마ZZZ 도술ZZZ 은신ZZ 변용ZZ…

▷상태: 마검, 마수, 유물

이 여자는 자기 능력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능력치를 보유했다.

당장 5대 재앙이나 수호자로 취업해도 될 능력.

과부라는 설정이 우스웠다.

“사위님? 딸이 목욕하는 모습을 구경하실 게 아니라면 집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시원한 코코넛 주스를 대접할게요.”

“...좋습니다.”

나는 경계 없이 등을 보인 채 앞장서서 걷는 장모를 따라갔다.

여기서 갈 곳은 눈앞의 엉성한 통나무집뿐. 열린 문을 통해서 드러난 내부도 외견만큼 변변찮았다.

뚝.

하지만 나는 그녀를 뒤따라 들어가기 직전에 걸음을 멈췄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류를 느낀 탓이다.

그런 나를 돌아본 장모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사위님. 저는 당신 편이랍니다.”

굉장히 함축적인 의미의 발언이었다.

“이게 만약 함정이라면…. 편안히 죽을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장모님?”

경고한 후, 나는 멈췄던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모든 게 바뀌었다.

*

누추한 통나무집이 아니었다.

도적E가 소개했던 ‘왕궁’이란 표현마저 겸손하게 들리는 호화로운 내부가 펼쳐졌다.

반짝이는 금은보화와 섬세한 예술품으로 한가득. 판타지 대륙 곳곳에서 수집한 보물들을 모아놓은 보물창고 같았다.

내부면적 또한 달랐다. 통나무집 안에 그만한 집이 수백 개는 들어갈 공간이 있었다.

공간이동 혹은 왜곡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간왜곡이랍니다, 사위님.”

“너도 내 생각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군? 교사들처럼.”

“직급은 같으니까요.”

판타지아 대륙에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냉장고에서 음료 두 잔을 따르며 거침없이 대답하는 장모.

주위를 둘러보다가 황금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의자에 앉은 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에 이어서 질문했다.

“북대륙의 대사제도 같은 직급인가?”

그곳에도 비슷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남편이 가출하는 바람에 기나긴 시간 동안 외롭게 홀로 사는 요부가.

장모가 내게 코코넛 주스를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추측이 맞아요. 우리는 교사의 권한으로 학생인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거리에 상관없이 언제든 관찰할 수도 있죠. 하지만 복사기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건 아니랍니다, 사위님.”

“그런 것 같네.”

나를 속이고 꼭두각시 남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북대륙의 대사제는 이런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배1에게 버림받은 가련한 아내처럼 행동했다.

내게 역으로 몸과 마음이 지배된 순간에도 ‘진짜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그건 잘못 짚었어요. 그 친구는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편안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시스템의 정신간섭을 피할 수 있는 이 장소 덕분이랍니다. 이곳은 소녀의 전부이신 엘브하임 폐하께서 요정들을 통치했던 황금기에 모은 보물을 보관해둔 창고. 판타지아 대륙에서 가장 보안이 뛰어난 장소라고 할 수 있죠.”

“역시….”

내 추측대로 그 유감스러운 요정왕의 아내가 맞았다.

나는 그녀를 서대륙에서 보았다.

5대 재앙 섹스피어가 부활시킨 짝퉁 용사 파티에 남편이랑 함께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더….

스르륵~

장모의 척박한 사막이 풍요로운 산맥으로 변했다.

“후후! 남편에게 계속 사랑받으려면 노력은 필수죠. 사위님도 한 번 당하셨죠? 딸에게 물려준 뽕으로 속여서 결혼한 게 미안해서 변용술을 열심히 익혔답니다. 그는 가짜라고 투덜대면서도 불을 끄면 아기처럼 매달렸죠. 아아, 그때가 정말 그립네요….”

나는 멋대로 추억에 잠기려는 장모를 끄집어내기 위해 말을 걸었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내 원래 목적은 이 은신처에 보관된 혼돈의 유물에 깃든 기억을 읽고 양질의 정보를 얻어내는 거였다.

전부 지켜보고 있었던 장모라면 내 의도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거래하기 위해서죠.”

“거래?”

“저에게 주어진 원래 역할은, 이 사막에서 길을 잃은 용사가 탈진해서 쓰러졌을 때, 기적처럼 나타나서 구해주고 사막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신비로운 요정이랍니다. 물론, 이 공간은 당연히 비공개고, 조금 전에 보셨던 허름한 집으로 초대하죠.”

“사족이 길어.”

목욕을 마친 도적E가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러니 불필요한 내용을 빼줬으면 좋겠다.

“어머! 제 딸의 난입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보물창고. 보물이 변질하지 않도록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러간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야기해도 밖에서는 1초도 흐르지 않았어요.”

“그래도 본론만.”

“지켜본 대로 성급하신 분이네요.”

“실리적이라고 해줘.”

음료를 내려놓은 장모가 자기 가슴을 양손으로 꽉 쥐며 말했다.

“제 목표는 엘브하임 폐하의 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죽은 줄 알았던 그분이 살아계신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 지금의 삶이 지옥처럼 느껴졌어요.”

“살아있는 걸 몰랐나?”

“이전…. 이전 회차라고 할까요? 그때 사위님이 일리나에게, 네 유감스러운 조상님은 멀쩡히 살아있다고 말하는 걸 듣고 알게 됐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소녀의 폐하께선 취향이 여전하신 듯해서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불안해졌어요. 어떤 개뼈다귀 같은 년이- 어머! 실례, 그분을 유혹할지 모르니까요. 사위님도 아시다시피, 모든 면에서 완벽하신 폐하의 유일한 약점이 이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가슴을 주물럭대는 장모.

동족 혐오에 찌든 그 유감스러운 요정왕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내란 생각이 들었다. 천생연분이란 이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교사랑 같은 직급이라면서 몰랐다는 게 이상한걸?”

내용의 앞뒤가 맞질 않는다.

“조금 전에 사위님이 사족이라고 말을 자르셔서 그걸 설명하지 못했어요. 온전한 힘을 갖춘 최초의 마왕을 쓰러트린 후, 용사의 동료 전원이 명예의 전당에…. 영구적인 교사의 지위가 내려졌습니다.”

그 뒤에도 주절주절.

최초의 정령은 지루함에 패배해서 자고 있었다.

장모의 기나긴 설명을 요약하자면, 선배1이 가출한 직후에 내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엘브하임 파벌’은 그녀처럼 용사의 도우미 역할을 맡은 잡역으로 전락했다.

교사의 지위 덕분에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지만, 똑같은 시간과 기억을 되풀이하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아까부터 쭉 느끼던 의문인데, 하찮은 가정싸움의 진실과 아줌마의 정체를 알아서 내게 무슨 득이 있는데?”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에 집중한 시간이 아까워서 미치겠다!

“어머! 장모에서 아줌마로 호칭이 내려갔네요? 뭐, 좋아요. 당신은 용사답지 않게 실리를 따지는 용사였죠. 제가 엘브하임 폐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그날까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섬기겠습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요. 저의 암살 스킬이 ZZZ등급에 또 도달할 날이 올 것 같지 않으니까요.”

암살ZZZ 효과가 그림자로 변하는 능력인 모양이다. 메모, 메모.

“그래서 내게 이득은?”

“...예? 당신의 그림자가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림자라고 뭔가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임자 있는 아줌마를 부양하라는 소리잖아.”

“에…. 그렇게 되나요?”

“우주의 기운을 받아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MAX급 용사님의 말씀이니 맞아.”

하찮은 반론과 이견은 받지 않겠다.

“엘브하임 폐하와 저의 사랑의 결실인 일리나를….”

“정중히 사양하지.”

약혼자는 약혼자일 뿐, 결혼이 확정된 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졸업을 포기한 대가로 구해낸 아들까지 있는 몸이다.

아줌마. 나를 여자에 굶주린 수컷으로 보면 곤란하다구?

“일리나를 평범한 여자처럼 취급하면 섭섭한데요. 가슴은 좁아도 마음만은 넓은 아이라고요.”

“그 대사를 예전에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유감스러운 요정왕이 딸인 요정K를 내게 떠넘기듯 소개하며 했던 말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이 우주에 엘브하임 폐하만큼 완벽한 남편감은 없겠지만, 그건 일리나가 해결할 문제. 요정은 1000살이 넘으면 부모와 자식도 친구랍니다! 저는 할 도리를 다했어요…. 어머! 또 사족이었나요?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저를 그림자로 받아주세요. 소녀가 가진 모든 정보와 능력을 다하여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엘브하임 폐하께 그러했듯이.”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그림자라면 평상시에 걸리적거리지 않을 테고.

“좋아, 약속하지.”

“소녀가 엘브하임 폐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한, 당신의 그림자가 될 것을 맹세합니다.”

변화는 바로 찾아왔다.

스르륵….

아줌마의 그림자가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독립적으로 이동이더니, 내 그림자 옆에 팔짱 끼듯 바짝 붙었다.

“...호오?”

이건 내 기대 이상인데?

그녀의 그림자와 함께 관리자의 권한도 딸려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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