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0회차] 엘브하임 (외전2)
열등한 요정 종족도 용사로 선별된 적이 있었다.
그 증거가 요정 종족의 탄생.
판타지아 신(神)의 부름으로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최초의 요정’이 판타지아 남대륙에 정착하여 자손을 번창시켰다.
최초의 요정을 닮은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요정 왕족’이 되었고, 원주민을 닮은 둘째는 평범한 ‘요정’이 되었다.
요정 종족의 몰락은 이때 결정된 걸지도 모른다.
지금의 요정이랑 달리, 성욕이 왕성했던 최초의 요정은 수많은 원주민 아내로부터 자식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까닭에 인간처럼 우수한 자식에게 무언가를 물려줘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그의 목적은, 동족들로 이루어진 나라의 왕이 되는 것.
그걸 위해 자식을 낳았고 백성을 늘렸다. 순수혈통에 가까운 자들끼리의 근친혼을 장려하면서 요정의 유전자를 보존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결실을 보았다.
최초의 요정이 원했던 군주국가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아래 단계인 부족국가가 탄생했다.
모든 요정의 시조 격인 최초의 요정은 명예직에 가까운 1대 요정왕으로 불리게 됐고, 그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첫 번째 자손인 장녀는 2대 요정왕이 됐다.
하지만 그 뒤에는?
“이건 내가 원했던 나라가 아니야.”
왕보다는 한 부족의 추장에 가까웠던 최초의 요정은, 이젠 몇 번째인지 관심 없는 자기 자식을 낳은 2대 요정왕에게 말했다.
당시에 20살이었던 나는 어머니가 갓 낳은 여동생을 보면서 그 대화를 자연스럽게 엿들을 수 있었다.
“마왕에게 맞서신 위대한 영웅이시여. 나의 영원한 왕이시여. 당신은 모든 요정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이 일궈낸 것들을 부정하시옵니까?”
출산으로 힘겨운 와중에도 여동생에게 젖을 물리던 어머니가 아버지이자 남편인 존재에게 물었다.
이에 최초의 요정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하!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 자식들 말이더냐? 왕을 따르지 않는 백성은 또 어떻고? 인간도 안 먹는 벌레와 잡초로 연명하는 이것들을 요정이라고 칭하기 부끄럽다!”
“그건….”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당신을 따라서 잘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판타지아 대륙을 지배하는 인간 종족 전체랑 적대적이고, 고향별에서 가져온 선진문물과 기술을 베풀 줄 모르는 옹졸한 이기심으로 동족들에게 실망과 질투만 불러들였습니다. 왕으로서 싸움과 교미 외에 당신이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습니까?”
“네놈은 뭐냐?”
“엘브하임입니다.”
“이름 말고, 어디서 굴러들어온 쓰레기냐고 물었다.”
“당신을 닮은 쓰레기입니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20살이긴 했지만, 요정은 인간보다 성장이 매우 느린 종족이다. 그리고 왕족은 더욱 느리다.
나는 인간의 육체적인 나이로 치면 1살 미만.
성인의 폭력을, 그것도 영웅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 끔찍한 폭군에게 올바른 소리를 했다가 죽은 형과 누나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20년 동안 막내였던 내게 처음으로 친동생이 생긴 날이었다. 새로운 자식의 탄생을 축복해주지 못할망정 막말을 내뱉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결말은 예상대로 좋지 못했지만.
“사, 살았나…? 콜록콜록!”
하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면 지독한 고통이 몰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익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유목 생활하는 내 부족은 터를 옮기고 없었다.
나는 부족에서 추방되어 쓰레기처럼 버려진 것이다.
그때, 대지가 미미하게 진동하며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들의 목소리도.
“쳇! 늦었나.”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 터를 보아하니, 이번에는 제법 큰 부족인걸!”
“서두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우리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여성들은 하룻밤 노리개로 쓴 후에 죽이고, 남성들은 잡아다가 노예시장에 파는 흉악한 놈들이었다.
그들이 우리 부족을 노리고 추적하는 듯했다.
전직 영웅답게 싸움질 하나는 잘하는 그 폭군이 지키는 한, 내 어머니와 형, 누나, 여동생이 끔찍한 꼴을 당하진 않겠지만, 버려진 나는 아니었다.
“오! 여기에 요정 아기가 있는데?”
“정말이네? 하지만 신기한 일이군. 요정은 출산율이 낮아서 아이를 소중히 하는 종족이 아니었나?”
“봐. 피투성이야. 죽은 줄 알고 버린 거겠지.”
“자기 아이를 묻어주지도 않고 버리다니. 역시, 벌레나 먹는 야만족들은 어쩔 수 없구먼.”
말에서 내린 인간 사냥꾼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리고 품평하기 시작했다.
“수컷이야. 치료비는 충분히 건질 수 있겠어.”
“하지만 너무 어려서 수요가 있을지….”
“있어. 요정을 애완동물처럼 길들이길 원하는 귀족들을 알거든. 그리고 이 녀석, 객관적으로 귀여운 얼굴이야. 귀족 아가씨들에게 잘만 어필하면 성체 이상의 가격을 받아낼 수 있어.”
“그렇다면 결론이 났군.”
“안 팔리면 키워서 팔지 뭐.”
“하하! 네가 먼저 늙어 죽을 것 같은데?”
“아, 그렇겠네. 젠장!”
...그렇게 나는 인간들의 손에 살아났다.
요정 부족을 공격할 만큼 규모가 큰 사냥꾼 집단이 아니었다. 부족 주위에 잠복해 있다가 야밤에 혼자 볼일을 보러 나온 요정을 납치하는 얍삽한 수법을 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나 하나로 만족하고 인간들의 도시로 귀환했다.
치료받은 나는 자력으로 두 발로 섰다.
평범한 요정은 이 나이 때 걸음마를 시작하지만, 나는 왕족 중에서도 꽤 특별한 축에 속했다.
그건 인간 기준에서도 놀라운 일인 듯했다.
“헉?! 뭐야, 이 아기.”
“자기 발로 섰어!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요정 아기들은 전부 이런가?!”
내가 인간의 언어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은 완전히 까무러쳤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일치했다.
“나를 인간의 고위 귀족에게 팔아주세요.”
“이 아기, 아주 비싸게 팔 수 있겠어.”
금방 팔려갈 줄 알았다.
인간은 특이하거나 희귀한 것에 환장하는 종족이니까.
하지만 볼일 보는 요정을 습격하는 좀도둑치고 발이 넓었던 사냥꾼의 리더는, 나를 바다 건너 중앙대륙의 최강대국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방계황족에게 팔렸다.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귀가 뾰족하군. 남대륙에서는 너희를 요정이라고 부른다지? 그 사냥꾼의 설명처럼 내 말을 알아듣나?”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정말이로군. 모든 요정이 너처럼 아기일 때부터 말하고 걸을 수 있나?”
“아니요.”
“그건 다행이로군. 위험한 싹은 미리 밟아두자는 주의라서.”
“......”
이 인간 사내는 아버지랑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육체적인 힘은 약하지만,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지식과 경험, 부와 명성을 쌓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나는 그가 무서웠다.
신의 선택을 받은 영웅인 아버지보다 훨씬.
5,000년을 넘게 살았음에도 가족 하나 돌보지 못하는 아버지랑 달리, 이 인간은 50살도 안 되는 젊은 나이에 무력 빼고 모든 걸 갖추고 있었으니까. 부족한 무력도 우수한 부하와 병사들로 충당했다.
이것이 인간의 저력.
요정의 1,000년을 10년 만에 따라잡는 괴물들.
젖을 뗀 이후부터 벌레와 곤충을 잡아먹으며 살아온 내게 인간들의 요리 또한 문화충격이었다.
하물며 황족이 먹는 요리.
인간 사회에서도 최고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험과 지식이 일천했던 나는, 대부분 인간이 이 정도 수준으로 먹는다고 착각했다.
그 당시엔 그랬다.
“요정이 이길 수 없어….”
아버지는 언젠가 판타지아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되겠다고 날이면 날마다 떠들었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남대륙의 인간들도 강력한 편이었지만, 4개 대륙과 인접한 교역의 중심지나 다름없는 중앙대륙은 훨씬 그 편차가 심했다.
그리고 내가 팔려온 곳은 중앙대륙의 최강국.
“이 땅은 신(神)의 자손이 다스리는 신성제국이다. 나는 그 위대한 황제 폐하의 친동생인 카일 드 라누베르크. 라누베르크 대공이다. 이쪽은 내 반려인 레아 라누베르크.”
“반가워요….”
살짝 여윈 미녀가 식탁에 앉으면서 힘없는 어조로 인사했다.
“최근에 난산으로 아들이 죽어서 상심이 크다. 네 이름은?”
“엘브하임입니다.”
“그래, 엘브하임. 나는 갓난아기의 몸이면서도 총명한 네가 레아의 슬픔을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실패하거나 거부하면 죽음. 질문 있나?”
“아, 아니요.”
형제자매들이랑 사이좋게 벌레를 먹고 살던 나는, 졸지에 중앙대륙 이인자의 양자 비슷한 신분이 됐다.
“엘브하임은 젖을 뗐나요?”
“네. 꽤 오래전에….”
공무가 바쁜 라누베르크 대공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비우고, 나는 혼자 걸을 수 있음에도 그의 아내, 레아의 품에 안긴 채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다.
나는 난생처음 진정한 부드러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머니와 누나들의 딱딱한 가슴이 아니다.
이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그이는 제게 다정한 남편이지만, 남들에게는 좀 어려운 사람이죠. 그리고 한다고 한 일은 반드시 하는 고집불통이기도 하고요. 그 점이 개구쟁이 같아서 귀엽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아, 네. 하하….”
죽인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실천하는 개구쟁이라….
“엘브하임은 모르겠지만, 귀부인 사회에서 난산(難産)은 굉장히 부끄러운 불명예에 속해요. 그래서 집 밖으로 못 나가는 형편이죠.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쫙 나버린 제 아들 흉내를 내달라고는 안 할게요. 그저, 말동무나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 여성이 무슨 대화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차차 맞춰가면 될 것이다.
“그러면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밥은 조금 전에….”
“그 밥 말고요.”
레아가 드레스 상의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드러난 아름다운 열매.
옷으로 꽉 조였을 때도 무심코 크다고 느끼긴 했는데, 봉인을 풀고 무방비하게 내놓은 지금은 더욱 대단했다.
“에…. 저는 젖을 진즉 뗐는데요?”
“갑자기 슬퍼지려고….”
“뗐다고 못 먹으란 법은 없지요!”
중앙대륙에 팔려오기 전까지, 인간과 요정의 차이는 귀의 모양과 수명뿐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인간은 요정 따위랑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종족이었다.
*
나는 라누베르크 대공 가문에서 200년을 보냈다.
가문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하녀들은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녀들의 가슴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짧았다.
내 아버지가 2,000년 동안 한 일보다 더 많은 위업을 20년 만에 달성한 라누베르크 대공은 자식들과 영지들을 차례차례 둘러본 후, 만족한 얼굴로 생을 마감했다.
내게 인간 여성의 위대함을 가르쳐준 귀부인 레아도 무사히 4남 2녀를 출산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남편을 뒤따라갔다.
그 뒤에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엘브하임 형!”
“엘 오빠!”
라누베르크의 자녀들은 나를 친형, 친오빠처럼 따랐고, 그들의 아이들도 나를 백부(伯父)처럼 의지하고 존경했다.
수명이 짧은 인간들은 세습할 때마다 진통을 겪는데, 영원히 늙지 않으면서도 가솔과 영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통한 나를 중심으로 뭉친 라누베르크 가문은 예외였다.
그 저력을 바탕으로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나 또한 인간 황제 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손만 뻗으면 부드러운 가슴이 닿는 멋진 삶이었다.
하지만 동족들은?
중앙대륙으로 수많은 요정이 팔려왔다.
라누베르크의 찬란한 영광을 본 왕족과 귀족들이 어린 요정을 사서 충견처럼 길들이기 시작한 탓이다.
내게도 간접적인 잘못이 있는 셈.
“돌아가야 해.”
200년이 흐르며 인간 기준으로 소년의 육체가 된 나는, 혼자서도 장기여행이 가능해졌다.
라누베르크 가문의 기사들에게 배운 검술과 호신술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의 왕이시여. 꼭 가셔야 하나요?”
내가 100년 전에 암시장에서 직접 고른 후임이 떠나려는 내 소매를 붙잡으며 질문했다.
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답했다.
“내 동족이 아무리 열등하고 못났더라도, 나는 아버지처럼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왕이 아니야. 남들보다 조금 일찍 넓은 세상을 보게 된 조숙한 요정일 뿐.”
“아니요. 당신은 저희의 진정한 왕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훗날,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될 거고요. 여자의 감이니 믿으셔도 좋아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걸 믿으라는군.
“내기할까?”
“왕이 되시면 저랑 결혼해주세요.”
“내가 이기면?”
“왕비는 단념하고 평범한 아내가 될게요.”
“잠깐! 그러면 이기든 지든 무조건 내가 손해 보는 구조이지 않은가?!”
“엘브하임 폐하가 바라시는 아름다운 요정이 되도록 노력하며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어머! 배가 출항하려고 하는군요. 서두르지 않으시면 놓치시겠어요! 폐하, 어서!”
“거참….”
후임이랑 불공정거래를 한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정말로 왕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명예직이 아닌 진정한 요정왕이.
3대 요정왕.
엘브하임 칸 라누베르크.
이것은, 인간을 동경한 어떤 요정의 소싯적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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