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11회차] 누구시더라?
그 뒤에는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됐다.
나는 도적E가 오아시스에서 씻고 들어오자마자 “다시 출발!”이라고 외치면서 통나무집을 나왔다.
당황한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림자A가 “사위님. 아무쪼록 제 딸을 잘 부탁합니다.”라고 호응하면서 상황이 간단히 정리됐다.
“내가 씻는 사이에 무슨 일이…?”
“유익한 거래를 했지.”
“Meeee~”
메두사를 탄 나와 도적E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온난화의 주범인 빙룡왕 슬레이아스를 처치하고 둥지를 파괴한 효과가 벌써 나오고 있었다.
사막의 끔찍한 열기가 주춤하면서 버틸 만한 수준이 됐다. 산산한 밤이 지나고 나면, 지열이 식으면서 내일쯤 더욱 살기 좋은 대륙으로 변모해있을 것이다.
“이런 남대륙 날씨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
도적E가 시원한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감상을 피력했다.
최초의 정령이 아저씨 같은 표정으로 호응했다.
“어린 요정 촌년. 옛날 남대륙은 이보다 훨씬 시원했다. 이 사막도 예전에는 지렁이로 가득한 비옥한 땅이었지. 요정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지렁이를 나눠 먹던 광경이 여전히 생생하네.”
“촌년이라니….”
나와 잡것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남하했다. 회색 연기가 피어나는 활화산이 보일 때까지.
“이 화산을 보는 건 두 번째로군.”
조금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60년 만에 죽마고우(竹馬故友)를 만나면 이럴까?
5대 재앙 페닉스.
비겁하게 용암을 끼고 싸우는 거인을 밖으로 유인한다고 이래저래 고생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페닉스는 거인족이다.
거인족은 그 왕성한 식욕 탓에 대형 몬스터나 용이 아니면 공복을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주로 강을 낀 해안가에 산다.
육지에선 대형종으로 분류되는 생명체가 용밖에 없지만, 범선처럼 거대한 몬스터가 바다에는 즐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닉스는 예외다.
“놈은 요정들의 시조인 1대 요정왕을 살해하고 그 비보와 육체를 삼켜서 불의 권능과 영생을 얻었다. 엘브하임과 내가 최초의 용사에게 협력하게 된 계기야. 불의 권능이 깃든 비보만이라도 회수하기 위해서.”
최초의 정령이 설명한 대로다.
불의 거인이 된 페닉스는 물이랑 상성이 좋지 못했다.
그 탓에 해안을 끼고 사는 다른 거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떨어져서 생활하게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
불의 거인이란 새로운 종족의 시조가 된 페닉스는 수많은 자식을 낳으며 일가를 꾸렸다.
불의 거인들은 남대륙 화산지대에 널리 분포해서 살고 있다.
화산활동이 멈추면 불을 섭취하기 힘들어지기에 하루 중 대부분은 땅을 자극하고 파헤치며 보낸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페닉스에게 도전하는 자.
페닉스에게 복종하는 자.
삼킨 비보 덕분에 스스로 불을 생성할 수 있게 된 페닉스는, 불의 거인에게 신(神)이나 다름없었다.
배고픈 자에게 빵과 포도주를 무한정 줄 수 있다고 할까!
그래서 이 불의 힘을 숭배하는 추종자도 있지만, 시기하고 빼앗으려는 도전자도 있다.
“1회차 때는 그 도전자들을 협박했지만….”
“마약 용사. 설득이 아니라 협박을 했다고?”
“웬 설득?”
정의로운 용사는 악당이랑 타협하지 않는다.
거인은 고블린만큼이나 흉악한 종족이다. 모든 거인이 그런 건 아니지만, 불의 거인만큼은 100%라고 단언할 수 있다.
“호전적인 불의 거인에게 협박이라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원리는 간단해. 힘에는 힘.”
그 당시에 이미 북대륙의 5대 재앙을 쓰러트리고, 서리여왕 엘쉬의 심장인 ‘얼음의 정수’라고 불리는 초대형 폭탄을 획득한 상태였다.
추위와 상극인 불의 거인들을 위협하는 건 쉬웠다.
그리고 불의 거인에게 아내와 딸, 누나, 여동생을 빼앗긴 사내들의 원한에도 불을 지폈다.
가족들을 구해주고 거인에게 복수해주면 변변찮은 보상을 준다는 원주민들의 감언이설을 단칼에 자르고, 함께 싸우도록 종용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잡음은 있었지만, 공명정대한 용사님이 겁쟁이로 매도- 판결을 내리면서 쏙 들어갔다.
여기에 메두사까지.
뱀의 왕이라고 불리는 네임드 몬스터의 모가지를 잡고, 그 석화 능력으로 약한 거인들을 돌로 만들었다.
하지만 식량과 물자를 준비하지 않은 주먹구구식 군단이었기에 장기전은 힘들었다. 약간 무리를 하더라도 하루 만에 끝을 봐야 했다.
여기서부터 용사님의 진가가 발휘됐다.
사랑과 우정 같은 허무맹랑한 감성팔이가 아니라, 용기와 희생으로 불꽃왕 페닉스 앞까지 도달했다.
이번에는 그 과정이 더 생략됐지만.
“...네놈은 뭐냐?”
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용암에 하반신을 담그고 있던 거인이 실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거인의 평균 신장이 건물 3층 높이라면, 놈은 족히 20층은 될 법한 비정상적인 덩치를 자랑했다.
그건 거인의 특성 탓이다.
거인은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인간 여성이랑 이종교배로 태어난 아이는 남성이면 거인, 여성이면 인간이 된다.
처음에는 아들이든 딸이든 별 차이 없다.
하지만 성년이 되는 20살쯤부터 차이가 생긴다. 딸은 인간답게 성장이 멈추지만, 아들은 계속 자란다.
고향별 지구에서는 거인병 걸린 사람은 오래 못 산다. 몸무게에 장기가 눌리고 뼈가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타지아 대륙의 거인들은 다르다.
성장하는 덩치에 비례하게 육체가 무한정 강해진다. 뼈가 단단해지고 근육이 발달한다.
생식기 빼고.
이건 인간 사이즈에서 더 커지지 않는다.
1대 요정왕을 잡아먹고 영원한 수명을 얻으면서, 무한히 성장하게 된 불꽃왕 페닉스도 예외는 아니다. 신장이 50층이든 100층이든 저 크기는 앞으로도 영원불변일지니…!
아무튼,
나는 놈의 질문에 짧게 대답해줬다.
“용사다.”
“용사? 용사가 동료도 없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1회차 때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다.
뭐라고 대답했더라?
“불꽃왕. 용사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잖아? 잘 들어. 정의의 화신인 진정한 용사는, 비열한 우정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마약 용사. 나를 빼놓으면 곤란하다.”
“흠흠! 약혼녀인 나도.”
“Meeee~”
최초의 정령과 도적E, 메두사가 은근슬쩍 발을 담갔다.
“...MAX급 용사님이 멋진 대사를 말씀하시는데 초 치지 말고 엑스트라들은 빠져 있어.”
우주의 협찬을 받는 내 앞길을 가로막는 불의 거인은 없었다.
이 화산에 처박힌 채 느티나무처럼 무한정 성장하며 시간을 축내는 불꽃왕 페닉스는 모르겠지만, 화산 아래는 뜬금없는 해일로 싹 쓸려버린 상태다.
강제로 거인의 아이를 낳던 불쌍한 포로들도 해일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에 돌아갔을 것이다.
▶난해: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교생 아가씨가 얼굴만 예쁘고 눈치가 없네!
나는 선배1처럼 허무맹랑한 이상론에 빠진 몽상가가 아니다. 현실을 바라볼 줄 아는 이성적인 용사다.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한 법.
모두를 구할 순 없다.
“...망할 정령아. 악당 보스랑 진지한 대화 중이잖아. 맥빠지게 겨드랑이털 당기지 마.”
여인들이 물에 빠져 익사하지 않고 가까운 마을까지 흘러가도록 물의 정령들이 축복해줬지만, 100% 전원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풀려난 포로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운이 나쁘면 돌부리에 넘어져서라도 죽겠지.
내가 고향까지 바래다줄 만큼 한가한 용사인 것도 아니고.
▶미소: 선배님들은 질색하시지만, 강한수 생도님은 제가 아는 생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용사님이세요.
교생 아가씨는 아부도 예쁘게 하네!
“용사라…. 너를 먹으면 무슨 힘이 생길지 기대되는군.”
불꽃왕 페닉스가 탐욕에 깃든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용암 속에 하반신을 묻어둔 채 앉아있을 때도 컸지만, 완전히 일어서니 더욱 거대했다.
저 몸에 걸맞은 무기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화르륵!
비보의 힘으로 만들어진 저 ‘불의 창’ 빼고.
순수한 물리력만으로 태산도 가를 만큼 길고 묵직한 창에 화염이 휘감겨 있었다.
“저건 1회차 때보다 크군.”
당연한 일이었다.
능력치가 최소 100배는 뻥튀기됐으니까.
1회차 때는 덩치만 큰 머저리였는데, 지금은 다른 불의 거인들이랑 마찬가지로 터무니없이 강해졌다.
▷종족: 헬파이어 자이언트
▷레벨: 9999+
▷직업: 은둔자(은거→경험치↑)
▷스킬: 괴력ZZZ 투기ZZZ 화염ZZ 폭발ZZ 화산ZZ…
▷상태: 성물, 영생, 성장
그러나 서대륙의 5대 재앙 섹스피어보다는 약했다.
1회차 때는 불꽃왕 페닉스가 더 강했었다. 하지만 그건 1대 요정왕의 비보 덕을 본 소위 ‘템빨’의 힘이었다.
그게 원인이었다.
능력치는 뻥튀기됐지만, 아이템 성능은 그대로다. 그래서 순수한 능력치만으로 강해진 섹스피어보다 페닉스의 전투력이 떨어진 것이다.
이 공식은 남은 5대 재앙에도 똑같이 적용될 터.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친애하는 전우, 망룡왕 뇌비우스 빼고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사는 곳까지 찾아가는 게 귀찮고 번거로울 따름이다.
스르륵, 스르륵.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생성했다.
위대한 마스터 몰랑의 참교육을 받고 더욱 강화된 날개. 흡혈귀에게는 효과가 좋았는데, 거인에게는 얼마나 통하는지 이번 기회에 시험해보자.
“용사가 아니라 마왕이었나…?”
내 늠름한 날개를 본 불꽃왕 페닉스가 중얼거렸다.
“불꽃왕. 그런 거짓말로 MAX급 용사님의 올곧은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야!”
“진심으로 묻는 거다만….”
나는 불꽃왕 페닉스의 헛소리에 더 어울려주지 않고 뛰어올랐다.
내 움직임을 읽은 불의 거인이 창을 휘둘렀다.
“인생은 원래 한 방이지.”
“뭣-?!”
불의 창이 빠르게 힘을 잃었다.
내 능력치 조작으로 제어가 힘들어진 탓이었다.
▷종족: 헬파이어 자이언트
▷레벨: 9999+
▷직업: 은둔자(은거→경험치↑)
▷스킬: 괴력ZZZ 냉기ZZZ 화염ZZ 폭주ZZ 설산ZZ…
▷상태: 성물, 영생, 혼란, 폭주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영혼의 성질을 결정하는 첫 번째 스킬 외에도 완전무결한 스킬은 건드릴 수 없었다.
스킬 화염(火焰)처럼.
발견할 때마다 메모해서 목록을 작성해둬야겠다.
푹! 푹! 푹! 찌익!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손쉽게 놈의 목에 박혔다.
갑작스럽게 생긴 스킬 ‘냉기’와 ‘설산’ 탓에 불의 힘이 중화되어 사라진 불꽃왕 페닉스는 단순히 덩치 큰 거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이게 대체…!”
서걱! 서걱! 푹!
녀석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능력치 조작도 만능은 아니기에 오래 끌 수 없었다.
나는 확실하게 처리하고자 보리스와 그림자A도 소환했다.
그 둘이 불꽃왕 페닉스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좌우에서 횡으로 베고, 나는 정면에서 성검 뉴클리온으로 놈의 커다란 목젖을 관통하며 깊숙이 찔렀다.
마무리로 턱주가리를 힘껏 걷어찼다.
빠각-!
위로 젖혀진 거인의 머리는 도중에 멈추지 않고 뒤로 넘어갔다.
몸통에서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풍덩!
억울하다는 듯이 표정이 일그러진 거인의 얼굴이 용암에 빠졌다. 그리고 머리를 잃은 몸도 뒤따라 허물어졌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참 쉽네!”
위대한 마스터 몰랑을 찬양하라!
그분의 몰랑몰랑한 참교육 아래에 세상의 모든 악(惡)의 무리가 평정될지니!
“방금, 어머니를 본 것 같았는데…?”
도적E는 엑스트라처럼 허무하게 쓰러진 5대 재앙 불꽃왕 페닉스보다, 깜짝 출현한 그림자A가 더 신경 쓰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맡은 임무만 빠르게 마치고 내 그림자 속으로 다시 숨어들었기에 딸에게 들키지 않았다.
이것으로 2마리째 토벌됐다.
“혹시 모르니.”
구질구질한 패자부활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표적의 상황을 확인해봤다.
▷동대륙의 재앙: 저주왕 말파르트 토벌(1/1)
▷북대륙의 재앙: 서리여왕 엘쉬 토벌(1/1)
▷남대륙의 재앙: 불꽃왕 페닉스 토벌(1/1)
▷서대륙의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 토벌(1/1)
▷중앙대륙의 재앙: 망룡왕 뇌비우스 토벌(0/1)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내가 아직 처리하지도 않았는데, 북대륙의 엘쉬와 동대륙의 말파르트가 토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강한수 씨.”
“어? 너는….”
표정과 눈빛으로 보아선 나를 매우 잘 아는 듯한데, 나는 똑똑한 척하는 이 여자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더라?
“후후! 3년 만에 여자친구랑 재회한 소감이 어떠세요?”
“내 여자친구라고…? 아! 몽둥이!”
“몽둥이가 아니거든요?! 당신이 멋대로 몽둥이처럼 휘두른 것뿐이잖아요!”
이제야 기억났다.
건방지게 내 여자친구를 ‘또’ 자칭한 중등교육과정 학생회장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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