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11회차] 소멸
쿠우우우우-
황금으로 된 월계관을 쓴 초대형 아기가 소환됐다. 모델은 판타지아 대륙에서 환생한 내 어릴 적 모습이다.
통통한 팔다리와 커다란 머리, 태양처럼 반짝이는 두 눈은 정의감과 귀여움을 동시에 타고난 완벽한 영재였다.
근육질 미남 놔두고 어째서 아기냐고 묻는다면?
이때가 인간이 가능성을 가장 많이 품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정령’이다. 인간의 종족특성이 가장 뚜렷한 화신을 소환할 수밖에 없다.
▷종족: 로열 스피릿
▷레벨: 9999+
▷직업: 황제(징수=경험치↑)
▷스킬: 정화ZZZ 검술ZZZ 항마ZZZ 신성ZZ 침투ZZ…
▷상태: 복합
종족도 계승했다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고유’라서 다른 종족특성으로 대체됐다.
직업은 세금을 거두면 경험치가 저절로 쌓이는 황제.
꼭 세금일 필요는 없다.
공물, 뇌물, 신하, 보물, 미녀, 영토….
무언가의 소유권이나 지배권을 획득할 때마다 경험치가 오른다. 가치가 높을수록 더욱 많은 경험치를 얻는 건 당연지사.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직업 중 하나다.
스킬은 보리스의 것을 계승했다.
모델은 나지만, 캡틴 판타지의 심장이자 동력원인 코어(Core)는 보리스인 까닭이다.
아기의 배꼽 부근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다.
거길 단전(丹田)이라고 부르던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Chaoooo~!”
“응애애애~!”
음성서비스도 지원한다!
포효를 내지르며 무력시위를 한 차례 주고받은 망룡왕 뇌비우스와 캡틴 판타지가 격돌했다.
콰앙! 쿠웅!
맹독에 모든 게 녹아버리고 시커먼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공간에서 두 초대형 존재는 막싸움을 벌였다.
물론, 그냥 싸우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다.
능력치로 보면 똑같이 9999레벨 돌파지만, 판타지아 세계의 모든 생명체로부터 협찬을 받은 망룡왕 뇌비우스의 실질적인 레벨은 터무니없이 높기 때문이다.
“이걸 요긴하게 쓸 날이 올 줄이야.”
나는 영재ZZZ로 감춰둔 직업 ‘용자’의 직업특성을 활성화했다.
그 효과는 모두가 공평하게 1레벨!
안 통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뛰던 칠흑빛 용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굼떠지는 게 보였다.
우리도 느려지긴 했지만, 망룡왕 뇌비우스보다는 덜했다.
“Choooo!”
서비스 차원에서 조금쯤은 당황해도 좋을 텐데, 판타지 능력치를 애초부터 싫어했던 망룡왕 뇌비우스는 1레벨로 급감했음에도 멈칫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러긴커녕 스킬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타고난 육체와 숨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에 대항하는 캡틴 판타지는?
“응애!”
한 방, 한 방이 묵직한 박치기로 상대했다.
팔다리가 짧은 3등신이라서 고상한 무술에 부적합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비중이 높은 머리가 크고 단단했다.
운석도 무시하는 뇌비우스의 비늘을 뭉개버릴 만큼.
▶황당: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네요….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걸까요…?
교생 아가씨, 영양가 없는 철학적인 고찰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응원이나 해줘.
초대형 괴수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나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망룡왕 뇌비우스의 거구에 올라탄 후, 성검 뉴클리온으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온종일 해도 티가 안 날 것 같지만, 지금의 나는 캡틴 판타지를 보조하는 역할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Chaooo!”
“응애애!”
둘의 덩치만 비교해서 본다면, 코모도도마뱀(Komodo Dragon)과 인간 갓난아기의 싸움.
체급과 능력치는 여전히 망룡왕 뇌비우스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Chaooo…!?”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귀여운 아기를 공격하던 망룡왕 뇌비우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야 당연했다.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으로 부지런히 찌르고 할퀴었음에도 캡틴 판타지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후후!”
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캡틴 판타지의 진가는 덩치가 아닌 통통한 육체에 있다.
위대한 존재처럼 몰랑몰랑한 아기 피부는 간단히 찢어지지 않았다.
흉내에 지나지 않아서 모든 공격을 100% 막아내진 못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방어하기 충분했다.
능력치는 거들뿐.
“C, Chaooo….”
그건 망룡왕 뇌비우스도 마찬가지였다.
판타지아 대륙을 순식간에 멸망시킬 만큼 압도적인 능력치를 보유했지만, 늙은 육체가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캡틴 판타지랑 육탄전을 벌이면서 원기와 수명이 극단적으로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이길 수 있을 터.
위이이잉-!
부우우웅-!
나는 캡틴 판타지를 ‘비행 모드’로 전환했다.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처럼 멋진 디자인을 원했지만, 최초의 정령 같은 잠자리 날개가 생성됐다.
비행속도도 영….
앞으로는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비행은 포기해야겠다.
“Chaooo.”
“응애!”
“Chaooo.”
“응애…?”
콰앙!
공중에 멈춰선 망룡왕 뇌비우스에게 접근하던 캡틴 판타지가 정체불명의 공격에 격추되어 맥없이 추락했다.
몰랑몰랑한 아기 피부가 전혀 방어해내질 못했다.
그만큼 압도적인 공격력이었다는 의미.
“아아, 그런가.”
방금까지 망룡왕 뇌비우스의 칠흑빛 비늘을 밟고 있던 내 발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 거대한 용이 사라진 탓이다.
죽은 건 아니다. 죽기는커녕-
쾅!
정신이 아늑해질 만큼 아찔한 물리력에 걷어차인 나는 지상에 수직으로 곤두박질쳤다.
고통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성검 뉴클리온의 칼날을 세워서 머리를 보호했다.
드드드륵-!
불꽃이 튀겼다.
내 육체도 베어버릴 수 있을 만큼 날카롭고 단단한 성검 뉴클리온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가다간 부러진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주 많이 얕보인 모양이네.”
우주의 집착 때문에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경험치를 엔진의 휘발유처럼 갈아 넣었다.
촤악! 촤악!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창처럼 정면을 찔렀다.
유효한 타격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압박을 풀기엔 충분했다.
“후읍!”
간신히 호흡을 돌릴 만큼의 여유를 확보한 나는, 질질 끌지 않고 망룡왕 뇌비우스를 향해 돌격했다.
체급은 여전히 차이 났다.
하지만 이전처럼 압도적이진 않았다.
다만,
▷종족: 카오스 드래고니안
▷레벨: 1
▷직업: 패왕(정벌→패기↑)
▷스킬: 태권G 검술ZZZ 혼돈ZZZ 파괴ZZZ 망각ZZZ…
▷상태: 황혼, 변신
소형전투용 용인(龍人)으로 변신한 전우는 약해지긴커녕 더욱 위협적으로 바뀌었다.
초월영역을 넘어서서 ‘신(神)의 경지’에 입문했다.
그 탓에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쾅!
퍼억!
무기는 서로가 불필요했다.
육체가 무기의 성능을 상회한 까닭이다.
내 야심 찬 걸작인 캡틴 판타지가 공중분해 된 것도 이해됐다.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주먹, 발길질 하나하나가 묵직했다.
이걸 정통으로 맞으면 장기가 남아나질 않으리라.
“혼돈의 전사도 아닌데, 실로 제법이구나. 나를 이렇게까지 애먹이다니.”
판타지아 중앙대륙을 깔끔히 부수고 동대륙도 절반쯤 바다에 가라앉혔을 때, 살짝 거리를 벌린 뇌비우스가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나는 금이 간 뼈를 붙이며 답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지 마, 뇌비우스. 용자의 힘으로 스킬들을 숨기고 있잖아.”
“...거기까지 알고 있나?”
“물론! 우리는 이번에 처음 만난 게 아니거든.”
망룡왕 뇌비우스가 수명의 한계에 가까워졌다면, 나는 경험치를 다 소진하고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주위의 원조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보리스는 캡틴 판타지가 파괴된 충격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림자A와 성녀H, 쑥떡은 이 싸움에 어울릴 레벨이 안 됐다.
그러니 대화로 시간을 끌어서 나쁠 건 없었다.
“분리된 또 다른 나는 그대를 꽤 높이 평가한 듯하구나. 하지만 우리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내게는 이제 시간이 없고, 그대는 나를 쓰러트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안 그런가?”
“뭐…. 그렇지.”
이 친애하는 전우는 대화로 평화롭게 끝낼 마음이 없는 듯했다.
흉흉한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저주스러운 용자의 힘. 죽을 때까지 사용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었다만…. 분리된 내가 그대에게 보여줬었다면 거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터. 그렇기에 나 또한 감추지 않겠다.”
독백처럼 선언한 망룡왕 뇌비우스의 기세가 바뀌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짙은 분노와 원한. 그리고 이 부정적인 감정들을 덮고도 남는 투쟁심이었다.
능력치의 변화는 사소한 문제였다.
...사소한 게 맞나?
▷종족: 카오스 드래고니안
▷레벨: 1
▷직업: 패왕(정벌→패기↑)
▷스킬: 몰살GG 패기GG 태권G 변신G 맹독G…
▷상태: 냉정, 변신, 황혼
“이게 약간 회복한 거라고…?”
분리된 영혼이 하나로 합쳐지면 얼마나 강해지는 걸까?
“잔말이 많구나, 인간을 닮은 정령이여. 간다.”
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방어가 무의미했으니까.
망룡왕 뇌비우스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에 스치자마자 내 몸의 절반이 분쇄됐고, 그 직후에 판타지아 행성이 으깬 감자처럼 뭉개지며 소멸했다.
이게 정녕 1레벨이란 말인가?
이런 친구를 무슨 수로 쓰러트리란 거야?
천만다행이게도, 우주의 기운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동대륙의 재앙: 저주왕 말파르트 토벌(1/1)
▷북대륙의 재앙: 서리여왕 엘쉬 토벌(1/1)
▷남대륙의 재앙: 불꽃왕 페닉스 토벌(1/1)
▷서대륙의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 토벌(1/1)
▷중앙대륙의 재앙: 망룡왕 뇌비우스 토벌(1/1)
“산 건가…?”
“......”
망룡왕 뇌비우스의 수명이 먼저 다했다.
내 오른쪽 날개뼈부터 골반까지 수직으로 척추가 보일 만큼 찢어발긴 용인의 오른팔이 뚝 멈췄다.
우주를 표류하는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조금 더 내려갔으면, 내 성스러운 공성추(攻城錐)가 파괴될 뻔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걱정: 강한수 생도님. 몸은 괜찮으세요?
교생 아가씨. 강한 척하기 힘든 상태야!
대동맥과 대정맥이 끊어지고 좌심방과 우심방이 찌그러졌음에도 심장이 아직 팔딱팔딱 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내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가 설명되질 않았다.
과학이 아닌 판타지로 접근해야 하는 걸까?
그런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르륵-
내 몸에 바짝 붙은 채로 생을 마감한 전우의 강인한 육체가 독극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몬스터가 죽으면 이런 식으로 자연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종족: 유니버설 휴먼 플러스
▷레벨: 381
▶직업: 용자(전원=1레벨)
▶스킬: 영재ZZZ 신성Z 날조Z 편애MAX 불사MAX···
▶상태: 성검, 성녀, 용린, 회복
새로운 상태가 추가됐다.
용린(龍鱗).
용의 비늘.
“...이 친구가 이번에는 빈손으로 떠나진 않았네.”
하지만 당분간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행성을 부수면 시험이 엉망진창이 돼버리니까.
지금이 딱 그러했다.
▷중등교육과정 입학시험이 종료됐습니다.
▷용사님. 모험은 즐거우셨나요?
어차피 늘 똑같은 시스템 안내메시지지만, 이번만큼은 꼭 묻고 싶다.
너는 우주를 표류 중인 용사님이 즐거워 보이니?
▷진정한 용사의 길은 실로 험난합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당신을 응원해준 수많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배우며 함께 성장한 당신은 마침내 우주를 표류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진심으로 유감을 표합니다!
...음? 어이, 잠깐! 방금 뭐라고….
▷지금부터 성적을 알아볼까요?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