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12회차] [이것이 부심(夫心)이다.]
아주 간단한 원리다.
피부의 모공(毛孔)마저 비늘로 덮였다.
하지만 비늘은 갑옷이 아니다. 투구처럼 뒤집어쓰는 게 아니기에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을 싹 밀어낸 것이다.
머리카락만이 아니다. 내 남자다움의 상징인 가슴과 겨드랑이털도 싹 날아갔다.
나는 서둘러 바지를 들췄다.
“오! 신이시여!”
꼭 죽이고 싶은 신(神)마저 절로 찾게 됐다.
검은색 비늘로 뒤덮인 내 분신은 탱크를 연상시켜서 썩 마음에 들었지만, 수북했던 야전용 위장막이 사라졌다.
어찌하여 이런 비극이….
스르륵.
용린을 해제해도 잃어버린 모발은 바로 회복되지 않았다.
가늘게 뽑은 철사보다 단단한 단열재인 내 머리카락은 단시간에 쑥쑥 뽑아낼 수 없는 탓이다.
철, 인, 아미노산, 시스테인, 멜라닌 색소, 비오틴, 피나스테리드, 두타스테리드, 미녹시딜, 비타민B, 비타민C, 오메가-3….
종합비타민보다 훨씬 많은 재료가 들어간다!
“일단은 평범한 머리로….”
기억 구석에 짱박아둔 평범한 머리카락의 성분을 떠올리며, 빠른 속도로 대머리와 민둥산을 복구했다.
하지만 이것도 1분가량 소요됐다. 자연적인 발모가 아닌 인위적인 조작이라서 한 올, 한 올 장인정신으로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체감시간이 1시간!
정말 끔찍한 인고의 시간이었다.
이 자리에 나랑 그림자A만 있어서 다행이다.
“용사님. 안 웃었어요.”
“알아.”
“정말로 안 웃었어요.”
“...정말로?”
“네, 정말로! 그러니 제 목을 탐스럽게 쳐다보지 마세요! 그리고 용사님은 대머리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흉흉한 악신(惡神)도 벌벌 떨 남자 같은 분위기예요.”
그림자A가 아부했다.
요정은 인간이랑 심미안이 다른 건가?
▶초롱: 와아…. 강한수 생도님이 이렇게 잘생기셨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옛말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가 진정한 강자라고 했어요. 남자라면 자고로 난폭한 몬스터도 겁먹을 얼굴이 갑이죠! 머리를 민 강한수 생도님은 제가 아는 남자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미남이세요. 머리의 불끈불끈한 힘줄이 어쩜…. 어머! 생도님이 아무리 차갑게 대해도 여자들이 줄을 서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교생 아가씨의 아부는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뿌잉: 칭찬해줘도 안 믿으시네요. 눈이 높은 제가 인정한 미남이라서 용서해드릴게요. 흥흥!
아직 30살…. 100살도 안 된 내가 탈모라니?
이건 있을 수 없다.
“용린은 봉인.”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기로.
빠진 털들은 치울 필요가 없었다.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으로 유지해온 그것들은 내 육체에서 떨어지자마자 분자구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부스러졌기 때문이다.
이걸로 탈모 흔적은 완전히 제거됐다.
나는 충격과 공포의 ‘용린 부작용’으로 중단된 상태 점검을 이어가기로 했다.
“문제없습니다, 주인님.”
“저도요, 아버지.”
별문제 없이 소환된 성녀H와 쑥떡은 이상 없었다. 지난 전투의 타격이 아직 남은 보리스는-
“꺄읏?!”
평소처럼 두 발로 착지하지 못했다. 곤히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아가씨처럼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안색도 굉장히 안 좋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회복될 때까지는 전력으로 활용이 어려울 듯했다.
“최초의 정령도 아웃이고.”
“마약 용사! 고귀하신 정령님을 마음대로 탈락시키지- 아야?! 머리가 가시방석처럼 뾰족하잖아! 잠깐 안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직 머리카락이 짧아서 고슴도치 같은 내 머리 위쪽에 출현한 최초의 정령이 엉덩이를 문지르며 잽싸게 날아오르고는 막 엄살을 떨었다.
등의 날개는 장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네?
뿅! 뿅! 뿅! 뿅! 뿅!
이어서 왕관 쓴 정령들이 등장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낙오자 하나 없이 5가지 속성이 전부 모였다. 정령들은 경쟁하듯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치열한 영토전을 벌였다.
한 치의 양보와 자비도 없이 서로 꼬집고 간지럽혔다. 불리해지면 다른 경쟁자랑 동맹을 맺고 비겁하게 협공했다.
“여긴 어떻게 왔냐?”
요정왕국 하수구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후후! 아주 좋은 질문이야, 마약 용사. 앞으로는 마약에 중독된 정령을 얕보지 말도록!”
임시방편으로 내 어깨 위에 앉은 최초의 정령이 우쭐댔다.
“흠…. 그림자A랑 비슷한 원리인가?”
“비슷하지만 달라. 나는 스킬이 아닌 본연의 힘이니까! 일찍이 나는 이 아이들을 내 대리자인 왕(King)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번에 마약 용사를 수호자(Rook)로 지정했다.”
“체스의 캐슬링이군.”
캐슬링(Castling).
서양 장기로 불리는 체스의 규칙 중 하나다.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는 킹과 룩을 한 칸씩 가까이 이동한 후에 자리를 뒤집는 것이다. 킹을 안전한 구석으로 옮기고, 직진에 특화된 룩은 빠르게 중앙으로 이동시키는 게 목적.
규칙을 잘 몰랐던 어린 시절, 아버지랑 한 칸 움직이니 두 칸 움직이니, 한 번만 되니 계속 가능하니 등으로 싸운 기억이 있어서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예가 적절하네. 캐슬링이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수호자는 한 번밖에 지정할 수 없어서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해도 지금까지 쭉 아껴왔는데, 회귀하기 직전에 변화한 마약 용사의 종족특성을 보자마자 냉큼 임명했다.”
“전설?”
“그렇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어. 치명적인 마약에 오랫동안 노출되어있던 나는, 그 당시에 이미 마약 용사 없이는 하루도 견디기 힘든 몸이 되어있었다. 회귀하며 초기화된 이 아이들은 이제부터 다시 중독될 예정이고.”
사랑한다던 아이들을 자기처럼 중독자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다니….
정령이 순수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남은 건 성검인가?”
혹시라도 마왕 페도나르가 판타지아 차원을 탈출하면 바로 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흉기.
하지만 이 대단한 성검도, 신의 경지에 도달한 망룡왕 뇌비우스 3단계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뻔했다.
...명색이 마왕인데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아니면 친애하는 전우가 지나치게 강한 걸지도 모른다.
뿅!
소환된 성검 뉴클리온의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칼날에 생겼던 균열은 말끔히 사라졌고, 현재는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본연의 날카로움을 뽐냈다.
이걸로 확인 끝.
남은 건, 중등교육과정의 취지와 목표다.
“초등교육과정은 마왕을 쓰러트리는 거였지.”
그렇다면 중등교육과정은 어떨까?
교생 아가씨?
▶설명: 엘몰랑도 천사들이랑 협력해서 마왕과 5대 재앙을 전부 쓰러트리는 거예요. 시간제한은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적의 군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힘들어진다는 특징이 있어요. 강한수 생도님도 이미 경험해보신 적이 있죠? 시스템 버그로 악마의 번식률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루크 학도가 도망쳤던 일이요.
잘 기억하고 있다.
초등교육장에서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마왕과 5대 재앙의 힘이 강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마왕 페도나르가 시스템에 간섭해서 악마의 번식률을 무지막지하게 올려놨다.
그 버그는 고쳤나?
▶난색: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시스템전공 선배님들은 해결됐다고 말씀하시지만, 출생률이 정상적으로 내려간 대신에 처음 보는 악마들이 태어나고 있거든요. 굉장히 꺼림칙한 존재라는 소문이 동기와 후배 교생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나돌고 있어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방어선을 구축한 악마들의 성의를 무시하고 몰살시키거나 무방비한 항공로를 이용해서 마왕의 성까지 곧장 침투해왔으니까.
새로운 악마가 생기든 말든 알 게 뭐람?
나는 그림자A의 시야를 공유했다.
스킬 ‘교사’는 중등교육장에서도 문제없이 활성화됐다. 덕분에 라누벨이랑 함께 모험을 떠났다는 용사들의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용사님들! 다 됐어요! 라누벨의 특제요리!’
‘루시퍼로 이런 맛있는 요리가 나오다니….’
‘라누벨 양은 오늘도 귀여우십니다.’
‘헛?! 알렉스 씨! 그건 제 숟가락이에요!’
위치는 판타지아 서대륙이었다.
거대한 파리들로 하늘이 뒤덮인 땅은 저곳밖에 없으니까.
2남 3녀로 구성된 용사와 중앙대륙에서 시작부터 합류한 라누벨과 알렉스, 서대륙에서 영입한 암흑기사가 보였다.
동료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성녀A, 아쿠아, 실비아, 나서스, 황녀….
그들은 다 어쩌고?
▶추측: 괜히 F학급이 아니란 거겠죠. 파티 내에 천사가 1명도 없는 거로 봐서는 엘몰랑도 천사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도 실패한 모양이네요. 저 멤버로 5대 재앙에게 도전하면 100% 실패할 거예요.
교생 아가씨가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유가 궁금했다.
▶설명: 최초의 용사 몸에는 5대 재앙에게 받은 5가지 흉터가 있어요. 필살기라고 할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죠. 지나치게 위험한 탓에 초등교육과정에선 봉인되어 있었지만, 중등교육과정부터는 아니에요. 그리고 이 필살기는 엘몰랑도 천사들의 고위급 신성이 아니면 못 막아요.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다.
덤으로, 교생 아가씨의 중등교육생 시절도 궁금한걸?
▶수줍: 성녀를 제외한 여성 동료들을 전혀 모으지 못해서 입학시험을 망쳤었답니다. C학급으로 진학해서 고생 많이 했어요. 리더 격의 동기 고백을 거절한 뒤부터 집단따돌림을 당했거든요. 정말 너무했죠, 저도 남자 보는 눈이 있는데…. 엘몰랑도 천사들이 안 도와줬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힘내! 교생 아가씨!
그래서 나는 어떨 것 같아?
▶난감: 중등교육과정의 취지는 천사란 종족에 대해 배우고, 그들의 신뢰와 협조를 얻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5대 재앙을 토벌한다는 본연의 목적만을 따진다면, 강한수 생도님은 불필요해요. 필살기를 막고 반사하고도 남을 신성을 이미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종류: 스킬
▷명칭: 신성
▷등급: Z
▶ZZ: 신성한 응징을 행사한다. (34%)
▶Z: 아무튼 신성하다.
▷SSS: 경배받는다.
▷SS: 신성한 반사를 행사한다.
▷S: 일반속성 공격을 무시한다.
▷A: 찬양한다.
▷B: 마기를 정화한다.
▷C: 신성한 방어를 행사한다.
▷D: 축복한다.
▷E: 마기를 견뎌낸다.
▷F: 신성한 공격을 행사한다.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는 내 신성Z를 깔끔히 무시했지만, 5대 재앙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교생 아가씨가 조금 전에 확인해주기도 했고.
“중등교육과정으로 넘어오면서 뭔가 잡다한 게 많이 추가됐네.”
하지만 용사의 역할은 같았다.
생판 남인 원주민을 위해 대신 싸우는 것.
“마약 용사. 아들을 만나러 곧바로 북대륙에 갈 거냐?”
“흠….”
원래는 입학시험장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멋대로 난입한 중등교육생들 때문에 그 소망을 망치고 아들마저 죽어버렸다.
그러나 감정의 동요는 적었다.
검희가 낳은 내 아들은 판타지아 대륙의 일부. 내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죽어버린 입학시험장의 아들은 수천, 수만 명의 분신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전부를 걱정했다가는 숨을 쉬며 살 수 없다.
한 번쯤은 만나고 싶긴 하지만.
“마약 정령.”
“너에게 이름까진 기대하지 않지만, 하다못해 최초의 정령이라고 불러줘.”
“마약 정령.”
“왜? 마! 약! 용! 사!”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삐지긴.
“네가 보기엔 지금의 나는 어떠냐?”
“순진한 정령들을 마약에 중독시켜서 노예처럼 부려먹는 악랄한 용사지.”
“네 주관을 뺀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인간이 마땅히 숭배해야 할 위대한 존재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엄하면서 다정한 영웅이세요.”
잠자코 있던 성녀H와 쑥떡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둘도 주관이 강해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림자A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회귀 이전의 용사님을 아시지만, 이곳 원주민들은 몰라요. 이제 막 소환된 6번째 용사일 뿐이죠. 신에게 선택받은 6명의 용사 중 하나인 이방인.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과연….”
가장 최근에 합류한 잡것답게 객관적인 분석이었다.
덕분에 내가 할 일도 정할 수 있었다.
“마약 용사. 뭘 하려고?”
“당연히 아들부터 만나러 가야지. 하지만 무턱대고 빈손으로 가진 않을 거야. 지금의 나는, 그림자A의 말대로 이계에서 온 양아치일 뿐이니까.”
그러니 황제가 되겠다. 아들에게 멋진 첫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당혹: 아들을 별로 신경 안 쓰신다고 한 것치고는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신 것 같은데요…?
기분 탓이야, 교생 아가씨.
현재 내 마음은 지극히 몰랑몰랑하다.
“욕심 버리고 중앙대륙과 북대륙 땅문서 정도면 내 체면이 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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