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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204화 (204/430)

 204화

[12회차] 야영

성왕국도 일단은 ‘왕국’이기에 왕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권한은 지도자보다는 고위공무원이란 느낌이다.

지구처럼 ‘내 생각이 신이랑 가장 근접했다. 그러므로 신도들은 내 말을 따르라!’라고 우기며 행동하지 못하는 탓이다. 판타지 세계의 신은 간섭과 참견을 대단히 좋아하니까.

그래서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

판타지 신이 보기에 중요인물A가 일을 못 하면 중요인물B에게 넘기고, 중요인물B가 마음에 안 들면 중요인물C에게... 전부 마음에 안 들면 길거리의 주민A를 중요인물D로 만든다.

이렇게나 줏대 없고 제멋대로인 신 때문에 성왕국은 크게 5개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다.

국왕을 중심으로 귀족과 관리가 뭉친 국왕파.

성기사단장 토마토를 따르는 기사파.

성녀A를 신봉하는 영웅으로 구성된 성녀파.

이기적인 사제와 신도가 가입된 신전파.

신탁 외에는 무시하는 고집불통의 중립파.

“용사의 시험이라고요? 아니, 그전에 그건….”

“성검이지.”

“...문언에서 본 적 없는 디자인이지만, 성검이란 건 확실하네요. 그리고 저는 성검을 보유한 용사님의 모험에 협력하기 위해 존재하는 성녀. 제가 모셔야 하는 용사로 당신을 인정합니다.”

성녀A가 엄숙히 선언했다.

그 말을 들은 토마토가 발끈하며 반발했지만, 그녀의 결정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나는 알고 있다.

다만,

“너는 인정했지만, 나는 아니야.”

“그 용사의 시험이란 것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그 성검도 그렇고, 저는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신께서 말씀해주지 않으셨을 리….”

“당연하지. 내가 조금 전에 만들었으니까.”

“......”

성녀A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이어서 했다.

“나에게 쓸모 있는 성녀인지 시험해보겠다.”

“하!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고작 성검으로 기고만장할 줄은 몰랐네요. 좋습니다, 오만한 용사님. 당신에게 과분한 성녀임을 입증해 보이죠.”

MAX급 용사님은 성녀A랑 공명정대한 거래를 시작했다.

***

우리는 던전 탐사를 떠났다.

경험치와 보물이 몰려있는 던전은, 용사의 성장을 돕는 성녀의 가치를 증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대륙에는 수많은 던전이 있다.

산, 강, 호수, 초원, 공동묘지, 마을, 도시….

이름 있는 지형마다 던전이 최소 1개씩 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슬라임들에게 점령당한 곡식 창고’ 같은 던전이 존재하니까.

원주민들은 이걸 자력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이유?

던전은 훌륭한 돈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찮은 던전이라도 신출내기, 얼치기 모험가들에게는 훌륭한 모험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마을 여관에서 먹고 싸며 돈을 쓴다. 어쩌면 대장간과 잡화점을 이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려는 던전은 다르다.

그곳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너무 강하고 지형도 험난해서 아무도 토벌하지 못한 진짜배기였다.

던전, 키메라 천국C

온갖 생명체를 섞어서 만든 인조 몬스터가 바글바글한 곳이다. 내가 아는 키메라 던전 중에서 3번째로 강력하다.

“마약 용사. 찰떡 놔두고 바람피우는 거냐?”

“뭔 헛소리래, 이 정령이.”

판타지아 대륙에는 3명의 성녀가 존재하고, 용사는 무조건 1명의 성녀만 동행할 수 있다.

목줄을 채워서 개처럼 질질 끌고 간다면 셋도 가능하겠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교리도 걸리지만, 역할이 겹쳐서 비효율적이다.

다른 성녀랑 경쟁하면서 힘들게 용사의 모험을 따라다닐 시간에 편안한 신전에서 불우한 신도를 구원하고 칭송받는 편이 이득이다.

내가 성녀H를 소환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성녀A를 얻을 수 없으니까.

성왕국은 5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지만, 성녀A를 획득하면 성녀파와 기사파가 자연스럽게 딸려온다.

신탁만 따르는 중립파는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에게 적대할 수 없고, 신전파는 그간 해먹은 부정부패를 빌미로 싹 숙청하면 된다.

이러고 남은 국왕파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대세에 민감한 귀족들이 알아서 왕을 배신하고 나를 따를 테니까.

“다른 질문. 성녀A를 얻을 생각이라면, 어째서 용사의 시험 같은 무의미한 짓을 하는 거야? 이미 얻었잖아.”

“그건 내 목적 때문이지.”

나는 성녀A랑 모험을 떠날 생각이 없다.

그녀는 성왕국을 지배할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할 것이다. 그러자면 교리에 따르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내게 충성하게 해야 한다.

그걸 위한 용사의 시험이다.

“예전부터 쭉 생각해왔지만, 인간의 정치는 너무 복잡하다. 어떤 왕과 황제보다 고귀한 용사에게 모두가 복종하고 협력하면 모험이 훨씬 원활하게 풀릴 텐데.”

“이 정령이 뭘 좀 아네.”

“에헴! 내가 최초의 정령이다.”

원래는 용사 뒤편에 바짝 붙어서 망토처럼 따라다녀야 하는 성녀지만, 자존심 상한 성녀A는 멀찍이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성기사 토마토가 있었다. 그는 내가 던전 ‘키메라 천국C’로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식겁하며 동행했다.

아까부터 계속 나를 미친놈처럼 보고 있었다.

“Wuuuuu~”

“Wuuu~”

키메라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다양한 생명체를 섞어서 만든 키메라들은 다양한 소리로 울지만, 이 던전의 키메라는 다르다.

제작자의 목적이 뚜렷한 탓이다.

인조 천사.

던전 주위에 사는 키메라들은 그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놈들은 공통으로 인간의 머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능이 없기에 저 소리만 무한정 반복한다.

죽을 때까지.

▷종족: 홀리 키메라

▷레벨: 538

▷직업: 경비병(경비→색적↑)

▷스킬: 융합C 재생D 색적D 신성E 비행E…

▷상태: 광란, 절망, 분노, 복종

능력치는 내가 꼽은 던전답게 준수했다. 몬스터답게 레벨에 비하여 스킬 등급이 낮았지만, 이 키메라는 가장 외곽에서 떠도는 얼치기들이라서 그렇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훨씬 강한 놈들이 우르르 튀어나온다.

키메라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용사님. 제가 축복을 걸어드리겠습니다.”

방금까지 무표정이었던 성녀A가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축복은 필요 없어. 이미 걸려있거든.”

“그 무슨…. 어…?”

심지어 더욱 강력하다.

정령들이 성희롱하면서 자연스럽게 걸어준 자연의 축복. 땅, 불, 바람, 물, 마음 속성에 강력한 저항력과 흡입력이 생긴다.

그리고 나 스스로 건 정의로운 용사의 축복. 정의로운 전투를 벌일 때, 모든 능력치를 뻥튀기해준다.

여기에 신성Z에 있는 천사의 축복까지.

중복이 안 되기 때문에 성녀의 축복이 끼어들 틈이 없다.

“Wuuuuuuu~”

“Wuuuuu~”

“Wuu-”

“Wu-”

시끄럽게 울면서 접근해온 키메라는 성검 뉴클리온의 사정권에 닿기 무섭게 썰려 나갔다.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은 여러 몬스터와 동물을 섞어서 만든 키메라들의 공격방식은 다양했지만, 정의로운 용사의 압도적인 힘 앞에선 재롱에 지나지 않았다.

“500레벨대 키메라들을 저리 간단히…?”

“신에게 선택받은 전설의 용사라더니….”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우리를 따라온 사제와 성기사들의 속닥거림이 들려왔다.

힘을 숭상하는 야만적인 판타지 원주민답게, 방금까지 성녀A와 토마토의 선동에 놀아나서 나를 험담하던 자들이 찬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공명정대한 용사의 시험은 이제 시작이니까.

***

키메라 천국C는 수많은 몬스터가 사는 밀림과 키메라 제작자의 지하연구실로 구성된 거대한 던전이다.

땅의 정령들을 활용하면 지하연구실의 심층부까지 당장이라도 직행할 수 있지만, 나는 밀림 중앙에 자리한 출입구까지 애써 이동했다.

그것도 매우 천천히.

밀림에서 닷새쯤 머물 예정이기 때문이다.

“배수진(背水陣). 야영하기 딱 좋은 장소지.”

앞장서서 키메라와 몬스터를 처리해온 나는 해가 떨어지자마자 밀림을 가로지르는 강 옆을 야영지로 선택했다.

이때까지 사망자는커녕 부상자조차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호구처럼 부지런히 활약한 덕분이다.

성왕국 최강의 영웅으로 불리는 토마토 성기사단장은 내 결정에 불만 없이 따랐다.

식수를 구하려면 옹달샘이라도 필요하니까. 그리고 4면이 엄폐물로 가득한 밀림인 것보다는 한쪽이라도 정면이 확 트인 강이 훨씬 낫다.

강에 사는 수중 몬스터? 위협적이란 건 틀림없지만, 그 위협은 육지 몬스터에게도 해당한다. 그리고 강에 너무 가까이 붙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

서걱, 서걱, 서걱.

온종일 걷기만 했던 성기사들이 남아도는 체력과 신성으로 나무들을 베고 바위들을 빠르게 치워냈다. 토마토가 뽑은 성기사들답게 손발이 척척 맞았다.

순식간에 평평한 야영지가 완성. 그 주위에는 나무와 바위를 쌓아서 방벽을 만들었다.

마무리는 고의로 열어둔 방벽 출입구에 방울 달린 실을 연결하는 것이다. 높은 방벽을 애써 넘지 말고 뻥 뚫린 출입구로만 침입하도록 몬스터를 유인하는 것이다.

나무랄 곳 없는 정석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동이 트는 새벽까지 쉴 거야. 너희들끼리 불침번과 경계를 서도록.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게 용사의 시험이란 그 웃기지도 않는 건가요?”

성녀A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모험에서 야영은 기본소양이지. 그렇다고 얕보지 마. 의식주 확보는 싸움보다 훨씬 중요한 거니까.”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압니다. 용사님은 저희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성왕국의 자존심이지.”

“그렇게 잘 아신다면 어린애 취급은 자제해주세요.”

“명심하지.”

나는 벌레를 쫓듯 손을 휘휘 젓고는 스킬 창고에서 침낭을 꺼내고는 땅에 폈다.

마음 같아서는 핫팩도 꺼내고 싶다.

하지만 그림자A는 과부가 아닌 유부녀고, 성녀H는 정치적인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 보리스도 중환자라 어려웠다.

한탄스러울 노릇이로군!

“야영은 정말 오랜만이네.”

핫팩도 없는 쌀쌀한 야영은 50년 만에 처음이었다.

1회차 때의 안 좋은 추억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싶다고 떼쓰는 년부터 실컷 술 처먹고 불침번 못 선다고 배 째라는 놈까지….

기발한 방식들로 나를 괴롭혔다.

현재, 서대륙에 있는 다섯 용사는 어떻게 야영하고 있을까?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확인했다.

‘여관을 얼른 찾아봐.’

‘망할 파리밖에 안 보여.’

‘길을 잃은 것 같아요. 라누벨도 못 찾겠어요.’

‘용사들. 여기서 야영하는 게 어때? 불침번은 내가….’

‘알렉스. 그것만은 죽어도 싫습니다!’

‘저도 싫어요!’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이 엉뚱한 길로 파티를 안내한 모양이다. 저건 그녀의 실수나 정보 부족이 아닌 명백한 고의다.

길을 잃고 고생해봐야 진정한 모험이라고 생각하니까.

라누벨의 엉덩이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보면 확실하다. 그녀가 거짓말할 때의 버릇이기 때문이다.

아마, 저 파티는 앞으로 닷새쯤 더 헤맬 것이다.

“헉! 서쪽에서 괴상한 트롤 출현!”

“막아! 동쪽 방벽이 무너진다!”

“큭?! 단장님! 키메라들 레벨이 이상합니다!”

“꺄아아앗?!”

내 야영지도 슬슬 엉망진창이 돼가고 있었다.

동료 없이 혼자 똥 누러 가서 안 돌아오는 예쁜 사제부터 잘생긴 얼굴을 씻으러 강가에 가서 머리를 놓고 온 성기사까지….

평균 300레벨대가 어울릴 원정대를 900레벨대 던전 한복판에, 그것도 한밤중에 내던져놨으니 당연했다.

키메라 천국C.

낮은 맛보기고 밤이 진짜다.

▷종족: 홀리 키메라

▷레벨: 738

▷직업: 암살자(야간→잠복↑)

▷스킬: 융합B 재생C 야생C 신성D 암습D…

▷상태: 광란, 절망, 분노, 복종, 잠복

이런 키메라가 밀림에 바글바글하기 때문이다.

영웅 토마토는 성기사와 사제들을 지키기 바쁘고, 성녀A는 부상자와 사망자들을 회복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라누벨은 다리가 너무너무 아파서 못 걷겠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야영할 수밖에.’

‘아아아!’

‘이럴 수가….’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이 용사 파티를 괴롭히는 모습을 조용히 관람했다.

핫팩보다 팝콘이 더 간절한걸.

▶통탄: 강한수 생도님이 용사의 시험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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