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12회차] 용사의 시험⑰
라누벨은 언제 다리 아팠었냐는 듯이 부지런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마법으로 땅을 다지고 주위에 흙벽을 세웠다. 그 중앙에는 말린 루시퍼의 배설물로 만든 천연장작을 태워서 모닥불을 만들었다.
그 뒤,
뿅! 뿅! 뿅! 뿅….
4차원 가방에서 침낭 7개 꺼내서 모닥불 주위에 폈다. 일행은 총 8명이지만, 암흑기사는 시체라서 불필요했다.
마법의 보조를 받긴 했지만, 라누벨은 오케스트라의 연주자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효율의 극치를 보여줬다.
‘용사님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고맙습니다, 라누벨 양.’
‘라누벨은 역시 뭐든 잘하네.’
‘라누벨 양도 수고했어요.’
라누벨 때문에 야영하게 됐지만, 모두가 라누벨에게 감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걸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던가?
귀여운 척으로 모든 걸 용서받고 역으로 칭찬받은 라누벨과 용사들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서 앞으로의 계획, 오늘 일었던 해프닝 등을 이야기하다가 하나둘 잠에 빠져들었다.
...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추, 추, 추워…!’
‘모기 때문에 잠을 못 자겠어!’
‘꺅?! 바퀴벌레닷?!’
‘화장실! 화장실이 필요해!’
여기에 눈까지 내리면 금상첨화일 텐데….
“용사님! 용사님! 이 상황에 잠이 오시나요!”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성녀A가 나를 흔들어서 깨웠다.
풀풀 날리는 흙먼지와 소음, 벌레로부터 피하고자 침낭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나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리고 말했다.
“망할 성녀야, 미쳤니? 지금 컨디션을 회복해두지 않으면 내일 행군하지 못한다고.”
“내일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밤을 못 넘기게 생겼다고요!”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는 게 너희의 역할 아니었나?”
“그, 그건….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원정대가 전멸하기 직전이에요!”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 다양한 해결책이 주르륵 떠올랐다.
힘겹게 막는 극적인 연출이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그건 지크처럼 얍삽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진정한 용사라면?
“Wu-?!”
“Wuuu~?!”
밀림 전역에서 단말마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 사타구니 중앙에 앉아서 기분 좋게 킁킁거리던 마음의 정령왕이 밑에 애들에게 시킨 결과였다.
정령의 정신간섭에 당한 키메라와 몬스터들이 서로 치고받으며 싸우다가 하나둘 목숨을 잃었다.
지배는 아니다. 놈들의 폭력성을 자극해서 사냥 우선순위를 가장 약한 인간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생명체로 돌렸을 뿐.
아주 간단한 선동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세 사위가 조용해졌다.
심한 부상을 입은 놈들이 후퇴하면서 주위의 키메라와 몬스터를 유인해간 덕분이다.
일시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동이 틀 때까지는 버텨줄 것이다.
“사, 산 건가?”
“흑흑! 흑흑!”
“죽을 줄 알았는데….”
“기사님! 엉엉!”
지친 성기사와 사제들이 사람과 몬스터의 피로 축축하게 젖은 땅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그들은 체면을 집어던지고 원초적인 본능에 맡겼다. 그걸 따지기엔 육체와 정신, 둘 다 너무나 지쳤기 때문이다.
그건 영웅 토마토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오만했던가…. 영웅은 무슨….”
여력이 되는대로 주위를 도왔던 그는 남들 이상으로 지쳤다.
성왕국에서 특별 제작한 토마토의 갑주 또한 수많은 공격을 받고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는 후퇴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그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전력이 부족함을 실감했으니까.
“용사님. 뭘 어떻게 하신 거죠?”
누구보다도 그 변화를 빨리 눈치챈 성녀A가 내게 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나는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자연에서 태어난 몬스터는 죽으면 금방 자연으로 회귀한다. 하지만 여인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아니다.
죽으면 썩거나 먹혀서 사라질 때까지 육신이 남는다.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으면 망령, 망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엔 성녀가 있다.
장례식 대신 부활이란 사기적인 뒷수습이 가능한 직업.
하지만 이것도 시간제한과 조건이 있다. 시체로 방치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활이 힘들어진다.
“...그렇지요. 실례했습니다.”
성녀A가 돌아서서 전사자들에게로 힘겹게 뛰어갔다. 부상자도 돌볼 수 있지만, 그건 사제들에게 맡겼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야영했더니 허리가 찌뿌둥하네. 부드러운 핫팩이라도 있다면 조금은 나을…. 호옹.”
흙바닥에 얼굴 처박고 죽은 사제가 보였다.
하지만 하반신이 없었다. 눈썰미 좋은 몬스터가 그녀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깨물어서 절단한 것 같았다.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단정하기 이르지만, 노출된 척추가 예쁜 여성은 대체로 미인이었다.
▶의문: 척추가 예쁜지는 어떻게 구별하는데요?
다양한 척추를 만져본 오랜 경험으로.
그리고 판타지아 대륙의 사제는 나이 불문하고 미녀다. 그래서 신앙심보다 미모로 뽑는다는 불경한 소문마저 생겼는데….
그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종족: 휴먼
▷레벨: 346
▷직업: 사제(미모=치유↑)
▷스킬: 치유A 매력A 불로B 체력B 애교C…
▷상태: 사망, 질병, 저주, 공포
사제의 직업특성 때문이다.
젊었을 때는 미모로 치유력을 올리고, 늙어서는 그간 올려둔 치유력으로 미모를 유지한다.
남자도 사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판타지아 대륙의 여성들은 신랑감으로 미남보다 강자를 훨씬 더 선호하는 탓에 사제를 희망하는 남성이 매우 적다.
“아가씨. 차가운 흙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
나는 사제의 가느다란 팔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얼굴 좀 보려고 했는데, 눈꺼풀이 사라진 눈구멍 안에는 구더기로 가득했다.
부드러운 가슴이 물어뜯긴 자리는 갈비뼈가 훤히 보였고, 그 안쪽에는 장기 대신 벌레가 한가득했다.
이래선 성녀의 힘으로도 되살리기 힘들다. 레벨이 무지막지하게 높다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부활할 수 있겠지만, 이 사제는 그 정도로 레벨이 높진 않았다.
그렇다면,
▷종족: 휴먼
▷레벨: 346
▷직업: 사제(미모=치유↑)
▷스킬: 치유A 매력A 불사B 기력B 애욕C…
▷상태: 질병, 저주, 공포
스킬을 약간 손봐주기로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 걸 바라지만,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그것도 소용없잖은가?
후두두둑!
사제의 눈, 코, 입에서 구더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뜯겨나간 눈알과 혀, 입술 등이 새롭게 생겨났다.
아래쪽도 변화가 찾아왔다.
찢어지고 절단된 장기에서 벌레들이 쫓겨나고, 잃어버린 신체 부위가 죽순처럼 쭉쭉 자라났다.
풍요로운 가슴, 복숭아 같은 엉덩이, 학처럼 뻗은 두 다리, 아기자기한 발가락….
딱 척추만큼 괜찮은 미인이었다.
“콜록콜록!”
사제가 기침하며 생존 신고를 했다.
“괜찮습니까?”
나는 60년 전통의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 대신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질문했다. 흑심으로 구해줬다는 오해를 받긴 싫었으니까.
사제가 자기 몸을 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저는 분명히 죽었을 텐데…?”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나는 침낭으로 향했고, 사제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동료들을 도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우물쭈물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용사님.”
“요추- 허리가 예쁜 사제님. 무슨 일이신지요.”
사제가 ‘애욕’에 찬 시선으로 나를 본다. 핫팩처럼 후끈 달아오른 그녀의 손은 쌀쌀한 날씨를 무색하게 했다.
“...아아! 갑자기 현기증이….”
털썩.
사제가 어설픈 연기를 펼치면서 내 품으로 정확히 쓰러졌다.
방금까지 흙바닥에 처박혀있어서 비위생적인 지저분한 몸과 옷이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내가 착한 용사라서 참았다.
물론, 계속 참아줄 마음은 없었다.
촤아악!
물의 정령을 이용해서 단숨에 씻었다.
“꺄앗- 꼬르륵….”
허공에 생성한 물회오리에 사제를 넣고 초강력 세탁기처럼 빙글빙글 회전시켰다.
세제가 없는 만큼 자비는 베풀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옷은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히 제거했다.
단 3초 만에 사제는 깨끗해졌다.
칠칠치 못하게 눈알이 핑글핑글 돌고 있었지만, 청결의 대가로는 사소한 부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위이이잉-
불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이 협력해서 건조기 역할을 해줬다. 덕분에 피부와 모발에 남은 물기도 한순간에 말랐다.
“저런! 현기증이 심하신 모양이군요.”
“네. 세상이 빙글빙글….”
이번에는 연기 없는 진심 같았다.
나는 핫팩- 부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불우한 사제를 안고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몸과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푹 쉬십시오.”
“요, 용사님? 거긴…. 아읏!”
“꼼꼼히 점검 중입니다. 만져서 아픈 곳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잘 모르겠어요. 한 번 더….”
“얼마든지요.”
“하읏! 주님. 이기적인 저를 용서해주세요!”
호구 같은 용사님은 오늘도 한 생명을 구했다!
*
첫날을 무사히 보낸 원정대는 다시 출발했다.
영웅 토마토의 하찮은 반대가 있었지만, 용사의 시험이란 굴레에 사로잡힌 성녀A가 원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무산됐다.
그녀로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성녀의 존재의의가 무엇인가?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를 서포트하는 것이다.
이미 다른 성녀의 서포트를 받고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조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성녀니까.
이 직업의 숙명이다.
“성녀A. 아름다운 밤이지?”
“용사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아름다운 밤이라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내 시험은 어땠어?”
“......”
내 침낭 속으로 들어온 성녀A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로 야영 닷새째.
가장 많은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한 첫날 이후에도 야금야금 피해가 누적되어 절반쯤 남았을 때쯤, 용사와 잡것들은 키메라 제작자의 연구실 입구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영웅 토마토는 셋째 날에 이름도 없는 키메라 3마리를 쓰러트리고 허무하게 사망. 시신이 운 나쁘게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부활도 못 했다.
리더를 잃은 기사파는 성녀파에 흡수.
그 성녀파의 리더는?
찰싹! 찰싹!
어제부터 내게 함락당하는 중이었다.
쾅!
성녀A가 침낭 속에서 기절할 때쯤에 부수고 진입할 예정이었던 연구실 입구가 예고도 없이 덜컥 열렸다.
그 안에서 삐쩍 마른 중년 마법사가 나왔다.
표정이 심상치 않은걸?
“세상에 이런 개념 없는 후레자식을 보았나! 숭고한 뜻을 품고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대마법사의 집 앞에서 무슨 염장질이냐!”
그는 성스러운 핫팩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
“추운 날에 핫팩 좀 쓸 수 있지. 왜 신경질이야. 음? 표정이 왜 그래? 호주머니에 핫팩 하나 없는 남자처럼.”
먼 옛날, 우연히 천사의 시체를 주운 마법사가 모국인 성왕국에 알리지 않고 이 밀림으로 숨어들었다.
그의 목적은 절대복종하는 천사를 양산하는 것!
하지만 어정쩡한 키메라만 대량생산됐다.
“잠깐! 설마…. 야외에서 대범하게 헐벗고 있는 저 여자가 성왕국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성녀는 아니겠지…?”
“어째서 아니라고 단정하지? 듣는 성녀 기분 나쁘게. 이봐, 자칭 대마법사. 편견은 나쁜 거야. 그래서 네 연구가 앞으로 10년이 흘러도 제자리걸음인 거고.”
내 도발에 걸린 마법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중앙대륙에서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성녀를 당당히 더럽히는 악마 같은 네놈의 정체는 뭐냐!”
판타지아 중앙대륙에서 가장 견고한 성문을 이틀째 함락한 공성추를 회수한 나는, 바지를 입으며 마법사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성스러운 용사님이다.”
판타지 야만인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60년 경력의 용사님은, 보스를 던전 밖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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