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12회차] Hero: Homecoming
“국호만 정하고 끝낼 순 없지.”
제국법의 제정은 ‘황제와 마스터 몰랑을 제외한 모든 신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것 하나만 내가 짜고, 나머지는 나서스 왕자와 성녀A, 전직 왕비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나라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수호자, 그 수호자를 베이스로 한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도 넣을 생각이다.
“수호자라면 내가 딱이지!”
최초의 정령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
“너는 제국을 수호하진 않을 거잖아.”
“당연하지. 나는 정령이니까, 정령을 위해서만 싸운다. 그리고 마약 용사의 머리에서 내려올 마음도 없다.”
“참 자랑스럽게도 말하는구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줄 예상했었지만. 그런 너를 수호자로 삼았다가 나라 말아먹을 일 있냐.”
대다수 나라의 수호자는 ‘용’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며, 판타지 세계관 최강의 종족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용이 정말로 나라를 지켜주기도 했다지만, 현재는 그런 호구 같은 용이 없다.
다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그건 나도 안다. 늙은 용이 싹 죽였다.”
최초의 정령이 아는 척했다.
“맞아. 망룡왕 뇌비우스가 활발하게 돌아다니던 전성기에 싹 죽어버렸지. 용들은 질 줄 알면서도 건국왕(建國王)이랑 한 약속 때문에 억지로 싸워야만 했고, 남김없이 몰살. 그 뒤로 용들은 인간을 지킨다는 맹약은 죽어도 안 하게 됐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백성들은 용사인 내가 황제 겸 수호자가 될 거라고 믿지만, 나는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욕먹는 수호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내 평판은 소중하니까.
스킬 창고에서 골렘D의 설계도면을 꺼냈다.
판타지아 서대륙에서 생산계열 스킬 등급을 올리며 겸사겸사 마도공학도 공부했지만, 나는 이쪽으로 영 소질이 없었다.
이 학문은 툭하면 물리법칙과 자연법칙을 무시한 탓이다.
못생긴 남자에게 판타지 재료A를 먹이고 판타지 장소B에서 판타지 공정C를 거치면 아름다운 미녀가 된다!
...수준의 엉터리다.
“지금부터 수호자 골렘 제작에 착수한다.”
“폐하! 국고가 비었습니다.”
재무대신A가 혈압을 올리며 내게 따졌다.
매일 막대한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 국호가 바뀌면서 모든 문서를 새롭게 작성해야 했고, 여기에 들어가는 종이와 인력은 전부 돈으로 막아야만 했으니까.
우매한 백성은 이 고충을 모른다.
그냥 나라님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세 나라의 보물창고를 탈탈 털어서 제작할 거니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잃어버린 보물은 전쟁으로 되찾으면 돼. 쉽지?”
“전, 전쟁이라니….”
전쟁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지만, 그건 일반병사를 대규모로 고용했을 때의 이야기다.
병사A는 빵 한 조각 먹은 힘으로 한 사람 몫을 한다면, 영웅B는 같은 양의 식량으로 병사 5000명 몫을 할 수 있다.
먹고, 싸고, 입고, 자고, 이동하고….
전리품을 옮기고 영웅의 수발을 들어줄 하녀와 하인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설명해줄 의무는 없었다.
나는 절대권력의 황제고, 결과로 답하리라.
“마음 같아서는 캡틴 판타지를 제작하고 싶지만….”
이건 단시간에 제작이 힘들어서 포기했다.
보편적인 골렘이 아기로 보일 만큼 큰 덩치 탓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고, 변신 합체 기술은 평범한 기술자의 실력으로는 무리였다. 북대륙의 현자나 그 잡것쯤 돼야 한다.
하지만 골렘D라면 해볼 만하다.
자연스러운 흔들림과 탄력을 연출하기 위해 바스트 스켈레톤(Breast skeleton) 같은, 쓸데없이 디테일한 부분이 은근히 많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훨씬 쉬웠다.
거기에 더해,
“아버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골렘D의 설계도를 쓱 훑어본 쑥떡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가?”
대답은 쑥떡의 머리를 쓰다듬는 성녀H에게서 나왔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주인님. 쑥떡에게 틈틈이 마법도 공부시켰거든요. 용은 원래 숨 쉬듯 마법에 능숙한 종족. 그래서 보통의 용들은 스스로 마법을 깨우칠 때까지 학습하지 않지만, 쑥떡은 선행학습을 했습니다.”
“호오…?”
나는 쑥떡의 참여를 허락했다. 중앙대륙에서 나름 어깨 펴고 다니는 마법사들이 함께하니 적어도 실패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를 정비하고 골렘D를 제작했더니, 얼추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내 판타지 경력도 61년이 됐다.
▷종족: 아크 골렘
▷레벨: 950
▷직업: 무녀(미녀→근력↑)
▷스킬: 근력SS 마술S 금강S 암살S 매력S···
▷상태: 소켓, 대기
그럭저럭 괜찮은 성능의 골렘D가 완성됐다. 3개 왕국의 보물창고를 긁어서 만들었으니 당연했다.
이제 빈 소켓에 영혼만 넣으면 끝.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영혼을 넣느냐에 따라 스킬이 추가되거나 변경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북대륙의 성검3. 에고소드 안에 깃든 용사의 영혼이라면 최적의 효율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준비성이 철저한 용사다.
찰칵.
친히 북대륙까지 가서 구해온 성검3를 골렘D의 두 다리 사이에 숨겨진 소켓 깊숙이 밀어 넣었다.
성검3를 얻는 과정은 손쉬웠다.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친 나는 라누벨이 여동생이란 설정이었던 끔찍한 6회차 기억을 토대로, 성검3가 숨겨진 옹달샘을 찾아갔다.
다행히 장소가 바뀌지 않아서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덤으로, 성검3에 어울리는 용사인지 나를 시험해보겠다고 지껄인 건방진 민물인어는 잡아다가 황궁 정원의 연못에 던져놨다.
그 후에,
퐁당!
연못에 돌을 던지면 노래를 부르도록 교육했다.
물고기의 꼬리를 인간의 다리로 변신해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허리디스크로 정원을 못 벗어나고 매번 붙잡혔다.
최근에는 완전히 포기하고 노래만 부른다.
“아름다운 인어를 학대하는 당신이 정말로 제 후배인가요…?”
골렘D에 빙의한 성검3의 첫마디는 내 직업을 의심하는 거였다.
“후배가 아니라 네 주인이다, 깡통. 오크도 울고 갈 시커먼 수컷으로 개조되기 싫으면 닥쳐.”
“히익?!”
골렘에 용사의 영혼이 깃들면서 능력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위대한 신성몰랑제국의 수호자로는 손색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신성을 퍼붓고, 스킬 용자로 가볍게 손봤다.
▷종족: 그레이트 골렘
▷레벨: 999+
▷직업: 검신(검술=신성↑)
▷스킬: 신성MAX 마력SSS 마법SS 몰살SS 활력SS···
▷상태: 개조
전쟁과 전쟁억제력을 위한 대량살상병기로.
마법, 마력, 몰살!
전쟁의 판도를 뒤집는 3대 스킬을 전부 넣었다.
원래부터 모든 종류의 검을 다룰 줄 아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성검3의 영혼은 직업으로 생전 능력을 계승했다.
골렘이라서 몸뚱이가 튼튼하고, 검술도 뛰어나기에 근접전에 취약하지 않다.
여기에 스킬 ‘활력’까지.
골렘에 생명체의 특성을 부여하여 기계장치의 고질적인 약점을 보완했다.
“자! 바로 실전이다.”
만들었으면 써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제국을 반기지 않는 신성제국에서 작년부터 끊임없이 국지 도발을 해오고 있었다.
대규모 전투와 사상자는 여태 없었지만, 돈 들어갈 곳이 많은 신흥제국의 국고를 말리고 기존의 중앙대륙 패자였던 자신들의 불쾌감을 표시하는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그래도 나는 나서지 않았다.
내가 자잘한 전투까지 나서면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까지 발 벗고 나서야 할 정도로 나라의 재정과 군사력이 안 좋다고 소문내는 꼴이니까.
그러나 이젠 됐다.
황제 대신 싸워줄 ‘제국의 수호자’가 생겼다.
“후배- 아니, 주인님. 이건 아무리 봐도 악마가 아닌 인간을 죽이는 일인데요?”
“싫으면 말해. 다른 영혼으로 소켓을 갈아 끼우면 돼. 물론, 쓸모없게 된 너는 폐기될 거지만, 인간을 위해서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지. 전직 용사잖아?”
“...호호! 저는 안 한다고 한 적 없어요. 그냥 물어본 것뿐이에요, 주인님.”
그리하여, 신성제국이랑 맞닿는 국경선에서 치러진 전투는 피해 없는 승리, 일방적인 학살로 끝났다.
골렘D의 마법이 적진 한복판에 떨어지면서 깔끔히 전멸. 야만인이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안 세어봐서 모르겠다.
신성제국에서 바로 항의해왔다.
“마약 용사. 이해가 안 된다. 자기들이 먼저 도발해놓고 어째서 화를 내는 거냐?”
“그게 인간의 정치란 거야.”
나쁜 짓을 하고도 관례라면서 당당하다.
마음 같아서는 골렘D가 완성된 시점에 신성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수도까지 진격하고 싶다.
하지만 마스터 몰랑이 역시 문제.
그분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평화적으로 병합해야 한다.
“마약 용사가 평화를 논하니 무척 어색하다.”
“보면 알아, 마약 정령.”
나는 61년 경력의 용사다. 판타지아 대륙의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하진 않지만, 큰 그림은 그릴 줄 안다.
무려 12회차니까.
못 하는 게 더 이상할 횟수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신사적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다.
용사력 –3년.
시기도 딱 적당했다.
신성제국은 오랫동안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황제 때문에 후계문제가 쭉 논의되고 있었다.
용사가 소환되기 3년 전이라면, 모든 면에서 평범한 1황자가 다음 황제로 유력시될 시기다. 황녀가 아직 너무 어려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탓이다.
“마약 용사. 황제를 암살할 거냐?”
“어허! 이 정령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 정의로운 용사님은 그런 얍삽한 방법을 쓰지 않아.”
“그러면?”
“정정당당하게 몰랑으로 승부한다.”
판타지 야만인들에게 마스터 몰랑의 위대함을 가르쳐주겠다!
똑똑.
그때, 누군가 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복도를 청소하는 하녀들 때문에 언제부턴가 인기척을 무시하게 됐지만, 일단 집중하면 누군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법사A였다.
“폐하! 꼭 아셔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들어오지 말고 읊어봐.”
집무실 책상 옆의 침대에는 전라의 보리스가 곤히 잠들어 있고, 신성몰랑제국의 지배자 무릎 위에 앉은 성녀H가 내 말을 서류로 옮겨적는 중이다.
잡것들에게 보여줄 광경이 아니었다.
“예, 폐하. 서대륙으로 떠났던 5명의 용사와 7번째 용사가 막 소환됐습니다.”
눈치 빠르게 내 무릎 위에서 일어선 성녀H가 흐트러진 내 옷가지를 바르게 정돈해줬다.
나는 문밖을 향해 말했다.
“알현실로 모이라고 해.”
*
귀여운 척하는 길잡이 라누벨과 미래의 검왕 알렉스랑 함께 판타지아 서대륙으로 떠났던 2남 3녀의 용사들.
5대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에게 패하고 죽은 줄 알았던 그들이 시작지점인 중앙대륙으로 돌아왔다.
죽고 부활한 게 아니다.
입학시험장에서는 가상현실게임처럼 무한정 부활했지만, 중등교육과정에는 그렇게 형편 좋은 시스템이 없다.
죽으면 그걸로 끝!
유급되어 후배들이랑 같이 재수강 받아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만두 왕국, 성왕국, 요정왕국.
특색이 뚜렷한 세 왕국에서 모은 관리들답게 요정, 성직자, 귀족들로 구성된 신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음악단까지 있는 요란한 입장식.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이 퍼포먼스를 받아들였다.
태어나자마자 기사단을 몰살시키고 2살도 안 돼서 북대륙의 귀여운 황제가 됐던 내게는 익숙한 광경이었으니까.
넓은 홀의 최상단을 독차지한 옥좌에 앉은 나는 신하와 용사들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마스터 몰랑께 영광을.”
이것도 정치다.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마스터 몰랑에게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라고 어필하기 위한 초석.
아무것도 모르는 신하들은 그저 따를 뿐이지만.
“영광을!”
“영광을!”
“영광을!”
“...에?”
신성몰랑제국의 귀족인사법을 모르는 용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영광을!’을 외친 후에 지정석에 도로 앉았다.
단합된 분위기에 놀란 용사들이 꽁꽁 얼어붙었다. 낯선 세계와 마주친 어린 양처럼.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로 그들의 경직을 풀어줬다.
그랬더니 진짜 얼음처럼 피부가 창백해졌다.
“거기, 용사 아가씨. 안 잡아먹을 테니 울먹거리지 말라고. 황제는 그렇게 무서운 직업이 아니야. 거참…. 그러면 용사 제군들에게 먼저 질문할 기회를 주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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