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12회차]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잠깐은 무슨!
용사로서 대접해줄 의향은 있다. 일시적으로 국고가 말랐어도 용사의 활동자금 정도는 댈 수 있다. 그 지원으로 5대 재앙을 1마리라도 대신 처치해준다면 나로서도 편하니까.
하지만 내 자리를 노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제안: 강한수 생도님. 혹시, 성호를 긋는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찌른다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저 생도가 잘못한 건 맞지만, 용사를 고문하고 처형하면 강한수 생도님의 평판과 인성 학점에 큰 타격이 올 거예요. 먼지 때문에 손해를 보는 건 추천하지 않아요.
...교생 아가씨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나는 기사들이랑 실랑이를 벌이는 레몬을 보며 말했다.
“정지. 반역자 레몬에게 결백함을 증명할 기회를 주겠다. 앞으로 2년 동안 제국을 위해 일하라. 그 뒤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떠나더라도 붙잡지 않겠다. 물론, 그전에 탈주한다면 척추 생물로 태어난 걸 후회하게 해주지.”
“자, 잔인한…. 알겠다!”
내게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용사의 위치는 교사의 권한으로 언제든 확인할 수 있으니까. 주변 풍경으로 위치를 파악하기 힘든 캄캄한 동굴 같은 곳에 영원히 숨어지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레몬의 생각도 읽어봤다.
‘입학시험장에서 90년 동안 구른 후에 기껏 입학한 중등교육과정에 오자마자 이런 꼴이라니…. 젠장! 누굴 탓하리오. 검희를 얻으러 북대륙에 갔다가 이상한 꼬마에게 지고 F학급을 받았으니….’
도망칠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나왔다.
검희, 이상한 꼬마.
그에 관해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내가 교사들처럼 용사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았기에 꾹 참았다.
이것으로 용사들의 문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것만을 위한 회의였다면 이렇게 많은 신하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황제다운 허세도 중요하긴 하지만, 앉아있다가 ‘영광을!’이란 구호만 외치면서 시간을 낭비하기엔 제국에 인재가 너무 부족했다. 단순히 머릿수를 채울 생각이었다면 고위 귀족들을 소집하지 않았다.
나는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도로사업을 시작한다. 제국의 모든 도시는 수도 몰랑폴리스로 이어질 것이다. 공사비? 필요 없다. 그대들이 신경 써야 할 일은 곧 완성될 도로를 활용하고 유지보수하는 것이다.”
“폐하. 외람되오나 곧 완성된다고 하셨습니까? 늙어서 소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 온 지….”
전직 왕비의 친부인 늙은 공작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내가 해줄 말은 하나다.
“너희들의 황제가 어떤 자인지 지켜보도록.”
*
우주의 총애를 받는 내 영향력은 신성몰랑제국의 환경과 날씨에 지대한 변화를 줬다.
저주나 역병이 창궐해서 마을과 도시를 폐쇄하거나 신관을 파견하는 상황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홍수와 가뭄 없이 1년 내내 모든 지역이 풍작이었다.
하지만 주변국은 달랐다.
신성제국은 중앙대륙 30%가 넘는 모든 영토가 지독한 가뭄으로 흉작이었고, 상인공화국은 해일과 홍수로 모든 항구가 마비됐다.
그 주위의 자잘한 공국들은 존속이 힘들 수준.
아주 간단한 자연의 원리다.
어딘가 비가 많이 내리면 다른 지역은 비가 적게 내린다. 그래야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니까.
올해도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식량은 훌륭한 무기지.”
그러나 무기로 쓸 생각은 없다. 작년에 풍작이긴 했지만, 수출할 정도로 넉넉한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정들의 출산율 폭등을 고려하면 비축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건 일반적인 경영론.
MAX급 용사님쯤 되면 조금 다르다.
쿠구구구….
구구구….
우주의 총애가 너무 막강해서 종종 잊지만, 나는 성녀H의 관리자 스킬인 ‘무한’을 공유하고 있다.
판타지 자원을 무한정 쓸 수 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천사보다 막강한 ‘신성MAX 성기사단’을 창설할 수 있고, 마왕 뺨치는 ‘마기MAX 광신도 대군’도 만들 수 있다.
전자든 후자든 정복 전쟁은 내게 손쉬웠다.
어디 그뿐이랴?
5대 재앙이 필살기로 얼마나 강해졌는지 모르지만, 신성MAX 성기사 10만쯤 동원하면 먼지처럼 갈려 나갈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
“내가 끝까지 다스릴 제국이 아니니.”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치명적인 독이다.
우주의 총애를 받는 나는, 혹시라도 MAX급 성기사와 광신도들이 배신해도 간단히 쓸어버릴 자신이 있다. 10만이든 100만이든.
하지만 내 아들은 어떨까?
내가 물러나면 바로 무너질 콩가루 제국을 만들 생각이 없다. 시험이 끝나면 허상처럼 사라질 나라일지라도.
“으어어어….”
“우워어어….”
나는 서대륙에서 습득한 요술과 사령술로 망령들을 깨웠다.
몬스터의 배설물이 된 자, 산적에게 살해된 자, 강간당하고 자결한 자, 전장에서 죽은 자, 법의 심판을 받은 자, 절벽에서 떨어진 자, 마차에 짓밟힌 자….
억울해서 승천하지 못한 영혼들이 몬스터처럼 흙으로 빚어진 새로운 몸뚱이를 이끌고 수도로 모여들었다.
1천, 1만, 10만, 100만, 500만….
백성과 용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나는 공식적인 답변을 일절 해주지 않았다.
토벌하지 말고 지켜보라는 지시만 내렸다.
“맙소사! 망령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망령왕 섹스피어도 저러진 못할 거야….”
알렉스와 라누벨을 잃고 받은 위로금으로 휴식을 만끽 중인 용사들은 나를 의심했지만, 영재ZZZ 효과로 ‘평범한 척’ 중인 내 능력치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역으로, 능력치를 볼 수 없는 신하들이 ‘황제 폐하는 어마어마한 스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라고 확신해서 더 피곤했다.
죽은 자를 조종하는 힘은 환영받지 못한다.
서대륙에선 조상과 가족의 시체랑 함께 생활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중앙대륙은 아닌 탓이다.
용사가 죽은 자를 모욕한다는 식으로 소문이 나면 평판과 명성에 지대한 흠집이 생길 터.
그래서 나는 한마디만 해줬다.
“마스터 몰랑께 영광을!”
“영광을!”
“영광을!”
“영광을!”
위대한 스승에게 모든 공적을 돌렸다.
지난 1년 동안 마스터 몰랑을 찬양한 효과가 드디어 진가를 발휘했다. 신하와 백성들은 나에게 향했던 의심을 접고 마스터 몰랑의 강대한 힘에 전율했다.
약 2,000만 망령들이 도로사업을 시작했다.
막 태어난 몬스터처럼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인 그들은 맨손으로 땅을 파고 바위를 날랐다.
인건비가 안 들고, 휴가와 복지시설도 없다.
비무장인 만큼 전투력이 형편없어서 몬스터에게 당하기 일쑤였지만, 지치지 않는 체력과 압도적인 숫자로 해결했다. 그래도 힘든 보스 몬스터는 수호자 골렘D랑 용사 레몬을 파견해서 처리했다.
숲을 개간하고, 산을 깎고, 계곡을 메꿨다.
강과 호수도 예외는 아니다.
안전을 전혀 고려하진 않은 탓에 수많은 망령이 강물에 쓸려가고 호수에 빠져 실종됐지만, 그 손실은 무한한 힘으로 금방 복구됐다.
호수에 사는 민물인어들도 방해가 안 됐다.
“신성몰랑제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 저는 슬픈 노래의 호수를 대표하는 인어공주 아쿠아라고 합니다.”
슬픈 노래의 호수.
만두 왕국과 성왕국 경계에 있는 거대한 호수다. 작은 바다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히 크며, 판타지아 대륙의 민물인어 중 과반수가 여기서 산다.
이 호수를 민물인어들의 왕국이라고 표현해도 절대 틀리지 않는다.
지리상으로는 신성몰랑제국의 영토에 들어가지만, 강한 수컷이랑 짝짓기하는 것밖에 관심 없는 멍청한 물고기들이라서 내게 충성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그 호수의 인어공주인 아쿠아는 용사의 동료.
망령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호수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필연적으로 인어들이랑 충돌이 생겼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왕의 딸인 아쿠아가 파견된 것이다.
▷종족: 머메이드
▷레벨: 999+
▷직업: 영웅(경험치 200%)
▷스킬: 창술SS 내열S 질주S 노래A 만능A…
▷상태: 긴장, 전율, 발정, 인내
그녀의 능력치는 초등교육과정보다 확실히 높아졌지만,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안 좋았다.
“비린내- 아름다운 인어여. 무슨 일로 짐을 보자고 했는가?”
“그게….”
“짐의 얼굴을 보고 말하라.”
“죄, 죄송합니다.”
호수 옆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아쿠아는 인간사회경험 또한 풍부한 편이다. 그래서 인어 중 드물게 인간 귀족의 예법에도 충실한 편이고 지금도 예의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쿠아의 시선은 나의 성창(聖槍)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곳에 사는 정령들이 아까부터 짙은 불편함을 표시했지만, 이 인어공주는 눈치가 없었다.
“인어공주 아쿠아여.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우선은 네가 신성몰랑제국의 지배자인 짐을 만날 자격이 있는지가 궁금하구나. 슬픈 노래의 호수에 사는 멍청- 아름다운 인어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공주인 너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이 있지?”
“전권대리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미 예상한 대답이다.
여왕은 멍청한 물고기라서 정치를 모른다. 다행히 백성들도 머릿속에 권력욕 대신 성욕이 가득해서 쿠데타 한번 없이 어찌어찌 나라가 굴러가긴 한다.
하지만 인어공주 아쿠아는 다르다.
물론, 태생적인 인어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격은 충분하군. 인어공주 아쿠아여. 이 계약서에 서명하면 짐의 집무실 어항에서 친히 키워주겠다. 어떠냐?”
“폐하! 저는 관상용 물고기가….”
“어떠냐?”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나는 슬픈 노래의 호수를 관광지로 개발했다.
촌스러웠던 호수의 이름도 ‘몰랑몰랑한 호수’로 바꾸고, 아름다운 인어들만으로 구성된 패키지 관광상품을 만들었다.
도박장, 수족관, 레스토랑, 호텔, 공연, 레저….
인어들이 끄는 보트 택시는, 첫날부터 이곳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계약서에 따라, 몰랑몰랑한 호수에 사는 민물인어들은 열대어나 다름없는 노예 미만의 애완동물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신성몰랑제국 황제의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밀렵하거나 상해를 입히면 누구든 반역죄로 처형! 노예복지에도 꽤 신경 쓴 편이다.
물론, 인어들이 번 수익은 전부 주인인 내 호주머니로.
여기까지 9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감탄: 망령들의 무한한 노동력이 정말 대단하네요. 마치, 산업혁명을 보는 기분이에요.
심지어 무공해(無公害)라구, 교생 아가씨.
온난화로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높아진 지구에서 반쯤 포기하고 하는 시늉만 하는 친환경 에너지다.
지구를 욕하려는 게 아니다. 거긴 마법이 없으니까.
나는 판타지 야만인들을 비웃어주고 싶다. 이렇게 훌륭한 에너지원을 하찮은 이유로 활용하지 않고 힘들게 살기 때문이다.
대규모 국가사업이었던 도로도 완성됐다.
수도 몰랑폴리스를 중심으로 모든 도시와 마을이 평평하게 다져진 자갈길로 이어지고, 침수되지 않도록 곳곳에 도랑을 파고 인공저수지를 만들었다.
겸사겸사 농장지를 확장하고 마을을 세웠다.
일할 농부가 없어서 밭이 놀 지경!
당장은 망령을 활용해서 어찌어찌 농사를 해결하지만, 빠르게 인구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
아들이 다스릴 제국은 망령이 없을 테니까. 동원하더라도 나처럼 단시간에 대륙의 지형을 바꿀 만큼 대규모는 무리다.
스킬 ‘무한’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폐하. 상인공화국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항구가 엉망진창이 되면서 동대륙이랑 이어진 항로가 막힌 상인공화국은 식량난을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마스터 몰랑의 이름으로 수출을 엄격히 금지한 신성몰랑제국의 식량을 밀수입해서 간신히 연명하는 중이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입은 건 당연지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인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도 꽤 오래 버텼네. 아니면 식량의 주수입처였던 신성제국이 올해도 흉년일 줄 몰랐든가.
“기다리라고 해. 물고기 밥 주는 중이다.”
“예, 폐하.”
내 손가락까지 흡입하려는 인어공주 아쿠아의 머리를 밀어서 침대 크기의 어항에 도로 처넣었다.
첨벙첨벙!
동족의 배신자란 맹비난을 받는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행복한 얼굴로 꼬리지느러미를 흔들었다.
심심할 때는 황궁 정원의 연못에 가서 인어A랑 수다도 떨며 잘 노는 것 같았다.
“마약 용사는 직업을 잘못 받은 것 같다.”
내 머리 위에서 신성몰랑제국의 성장 과정을 쭉 지켜본 최초의 정령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용사란 족쇄만 없었으면 더욱 효율적으로 나라를 운영했을 텐데!”
지금도 그렇다.
내가 용사만 아니었다면 이런 구차한 방법을 쓰지 않고 전쟁으로 손쉽게 대륙을 통일했을 것이다.
물론, 마스터 몰랑은 조심해야 하지만!
“...판타지아 원주민들은 너를 용사로 뽑은 최초의 천사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사해야 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마약에 찌든 내 삶을 지키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상인공화국의 사신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곳에 소속된 여러 대형상회의 대리자와 후계자들이 직접 협상을 위해 신성몰랑제국을 방문했다.
그들의 요구는 예상대로 식량. 대가로 이것저것 다양한 이권을 양보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실속 없는 것들뿐이군.”
폐광 직전의 광산이나, 해적들 때문에 버려진 항구, 내게 딸을 시집보내서 팔자 펴려는 상단 등등.
겉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제국에 이득이 되는 건 거의 없었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온 게 아니었나? 예지몽을 꾼 용사에게 같잖은 말장난은 통하지 않는다, 오만한 장사치들이여. 상인공화국의 사정은 짐의 손바닥 손금처럼 알고 있다. 이 자리에 모인 너희들이 누군지도 말이지. 좌측부터 상인D의 후계자, 상인U의 양녀, 상인P의 아들, 상인G의 동생. 그 뒷줄은 상인K의 딸, 상인T의 양아들, 마왕의 딸, 상인J의 딸, 상인S의 아내…. 음?”
조금 전에 내가 뭐라고 했지?
나는 상인들의 면면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그리고 정말로 이물질이 섞여 있는 걸 확인했다.
변장했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성검마저 튕겨내던 저 비겁한 가슴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허술하다. 변장할 거면 몸매도 평범하게 바꿨어야지.
“네가 왜 여기 있냐?”
MAX급 용사님은 야생 ‘마왕의 딸’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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