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11화 (211/430)

 211화

[12회차] 투자자와 개발자

“...황제 폐하. 제가 상인공화국에 숨어든 암흑상회의 간부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마왕의 딸로 몰지 말아 주세요.”

“...그런가?”

그런 설정이란 말이지?

“암흑상회?! 우리를 전부 속였구나!”

“큭! 어째서 당신이…! 정말 좋아했었는데!”

“이럴 줄 알았지! 몸매부터 기분 나빴어!”

“우리 안에 적이 있었을 줄이야….”

상인공화국 사신들이 부들부들 떨며 한마디씩 했다.

그들에게 암흑상회란?

중소기업에 갑질하는 대기업이다.

상인공화국에 소속된 상단들도 하나같이 ‘대(大)’로 불리지만, 그 영향력은 중앙대륙으로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역사가 매우 긴 암흑상회는 5개 대륙 전역에 유통망과 인맥을 가지고 있기에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 대놓고 국법을 어기면서 영업할 정도니 말 다 했다.

하지만 암흑상회를 배척하는 척하면서도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1회차 때 자주 겪었던 일이다.

동료들이 마을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암흑상회를 무너트렸다. 압도적인 폭력으로 빚쟁이들을 구해준 것이다. 그리고 뿌듯한 마음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모험을 떠났다!

1년 뒤.

그 마을의 상황은 참으로 비참해졌다.

빚이 사라지고 희망으로 부푼 주민들은 부지런히 일했지만, 물품을 사줄 고객을 구할 수 없었던 탓이다.

상인들은 돈이 안 되는 외진 마을까지 오지 않았다. 하물며 빚을 갚지 못해서 폭동을 일으킨 신용불량자들이랑 거래하길 꺼렸다.

하더라도 불공정한 거래로 폭리를 취했다.

“조용. 고향에 시체로 돌아가기 싫다면.”

“......”

“......”

“......”

황제가 이 자리에 있음을 깨달은 상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말장난으로 짐의 시간만 빼앗은 잡상인들이여. 살아서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당장 꺼져라. 그리고 돌아가서 그 하찮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도록. 모든 걸 잃기 전에.”

사색이 된 상인공화국 상인들이 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너는 남아야지. 아니면 스스로 잡상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암흑상회의 간부 아줌마.”

“아가씨입니다.”

“후작 부인이면 아줌마지.”

이 비겁한 악마가 북대륙에서 쓰는 위장 신분이 요절한 후작의 부인이었다.

그러면 아줌마가 맞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바람둥이 폐하.”

“총각이다.”

아들은 있지만, 유부남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전의 한마디로 더욱 확실해졌다. 능력치까지 감쪽같이 감춘 채 인간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그 비겁한 악마가 틀림없다.

▷종족: 휴먼

▷레벨: 395

▷직업: 상인(재산=거래↑)

▷스킬: 거래MAX 매력S 계산A 호신B 체력B…

▷상태: 경계, 당혹

저 비겁한 몸매와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면 나도 못 알아봤을 것이다.

“모두 물러나라.”

내 안위 어쩌고 지껄이면서 안 떠나고 얼쩡대는 신하와 기사는 없었다. 힘없는 상인, 하물며 팔다리 가느다란 여성이 용사를 해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황제의 홀에는 나와 비겁한 상인만 남았다.

“비겁한 용사. 나를 어떻게 알아봤지?”

모두 물러나자마자 그녀는 본색을 드러냈다.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성실하게 답해줬다.

“감으로.”

“소름 돋는 말이네.”

마왕의 딸, 쏘시아는 호색한 스토커에게 노려지는 미녀처럼 양팔로 자기 팔뚝을 문질렀다.

“너는 역시 기억을 잃지 않았군?”

“그러는 너도 여전히 정복을 좋아하네.”

쏘시아는 빈 의자 중 하나에 다리를 꼬며 앉았다.

상인 나부랭이가 황제 앞에서 보일 자세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용사 vs 마왕의 딸’이었다.

사회적인 감투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카야. 나를 무시하면 섭섭한데.”

내 머리 위에 거드름 피우듯 다리 벌리고 앉은 최초의 정령이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모님은 여전히 존재감이 없으시군요.”

“이 조카가 말을 막 하네! 마약 용사, 혼쭐을 내줘라.”

아까부터 발뒤꿈치로 내 이마를 툭툭 건드리는 건방진 정령부터 손가락으로 혼쭐을 내주고 싶지만, 그건 언제든 할 수 있기에 나중으로 미뤘다.

“용사인지 의심스러운 비겁한 용사. 이모님이 함께한다는 건, 진실을 거의 안다고 봐도 무방하려나?”

“네가 이 세계의 제작자 중 하나라는 것.”

“맞아. 우주를 지배한다는 유치한 야망에 사로잡힌 아빠를 쓰러트리기 위해 고모랑 손을 잡고 이 육성시스템을 개발했어. 결과만 보면 대성공. 졸업생이 아빠를 쓰러트렸고, 그 사건을 계기로 이 시스템은 우주 전역으로 퍼졌거든. 능력치를 보유한 자들은 모두 같은 학교를 나온 선후배 관계라고 할 수 있어.”

“과연….”

대성공이라고 칭할 만하다.

한 특정 학교 출신 학생들이 정치경제를 독점적으로 지배한다면, 그 학교가 사회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지 않는 현대적인 전쟁법이다.

“하지만 승자 없는 승리야. 게임에 비유하자면, 투자자와 개발자가 다퉜어. 그래서 세계적으로 흥행하던 게임은 오랫동안 정체되고 운영자의 변명 공지 외에는 업데이트가 없는 실정이야.”

“네가 개발자로군?”

“맞아. 고모는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힘을 제공해준 투자자. 혼자 다 먹으려다가 배탈 난 상황이지. 내가 걸어둔 보안암호 탓도 있지만, 시스템 이해도가 꽝이거든.”

유치하게 들리지만, 현대사회에서 제법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투자자와 경영자의 의견대립으로 어제까지 멀쩡했던 회사가 한순간에 공중 분해되는 사태가.

여기도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

즉,

“지금의 너는 비겁한 가슴을 가진 악마일 뿐이란 거군.”

“시스템도 슬슬 맛이 간 모양이네. 입만 열면 성희롱하는 이런 남자를 용사로 뽑다니.”

“그 남자가 네 약혼자이다만?”

“아빠가 멋대로 정한 거야!”

“너는 마왕에게 감사하다고 해. 자기를 감옥에 처넣은 딸이 그 성깔머리 때문에 시집 못 가는 걸 걱정하는 아버지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

“네가 악마의 사회를 알아? 모르면 가만히 있어.”

“......”

그 아비에 그 딸이로군.

반박 못 하게 말하는 꼴마저 비슷했다.

“후우…. 입이 더러운 용사, 네 말이 맞아. 시스템에 간섭할 수 없게 된 지금의 나는 용사를 키워내는 학습 도구에 지나지 않아. 피도 눈물도 없는 암상인들의 보스가 내 역할이지. 나를 궁지로 몰고 끝끝내 자빠트린 용사는 지금까지 너 하나뿐이었지만.”

“또 자빠지러 찾아온 건가? 엉큼하긴.”

“아니야! 어떤 정신 나간 용사가 인어를 돈벌이로 쓰는지 궁금해서 얼굴만 보려고 했어! 오해하지 말아 줄래? 진짜 기분 나쁘니까.”

새침한 표정을 지은 쏘시아가 톡 쏘듯 말했다.

나로선 기가 막혔다.

“너만 기분 나쁘냐? 나도 기분 나빠. 판타지아 세계의 창조자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그냥 경험치 덩어리잖아.”

“너…. 내가 원래 힘을 되찾으면 가장 먼저 고자로 만들어서 평생 후회하게 해줄 거야.”

“지금부터 걱정하는 게 어때?”

“하! 할 수 있을까?”

도발하듯 코웃음 친 쏘시아의 육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머리의 양쪽 귀 위쪽으로 악마 특유의 뿔이 돋아나고, 피부도 연한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연약한 인간에서 악마로 변신하는 것이다.

물론,

“할 수 있지.”

“꺅-?!”

느긋하게 구경할 생각은 없다.

봐줄 마음도 없다.

여기서 싸우면 황궁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황궁은 제국의 심장. 무너지면 황권도 덩달아 떨어지면서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렇게 둘 순 없지.

막 자라난 그녀의 뿔을 잡고 높은 콧대를 무릎으로 찍었다. 하지만 찢어지는 비명 외에는 피해다운 피해는 없었다.

집중적으로 노린 콧대도 멀쩡했다.

그렇다면,

뿅!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한 후, 역수로 쥔 나는 그녀의 가슴골 사이를 힘껏 찔렀다. 여기라면 튕겨낼 수 없겠지.

디잉-

“...뭣?”

성검의 칼끝이 그녀의 피부를 파고들지 못했다.

“포, 포기해. 변신 중에 기습하는 비겁한 용사. 고모가 배신해서 쫓겨나긴 했어도 개발자였던 나는 판타지 시스템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고 있어. 그렇기에 판타지아 대륙에선 어떤 수단으로도 내게 피해를 줄 수 없어.”

“버그잖아!”

“특혜라고 해줘.”

그 사이에 쏘시아는 변신을 마쳤다.

▷종족: 세컨드 데몬

▷레벨: 999+

▷직업: 여왕(매력→지배↑)

▷스킬: 마기ZZ 혈기ZZ 불사ZZ 매력ZZ 불굴Z···

▷상태: 마검

ZZ급 스킬로 떡칠한 능력치. 하지만 알렉스 따위가 ZZZ급 검술을 보유했던 사기적인 입학시험장이랑 비교하면 가소로웠다.

펄럭!

보라색의 에테르 날개를 펼친 쏘시아가 뒤로 빠르게 물러나려 했지만, 용납할 내가 아니다.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로 허공을 차며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쏘시아의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우읏?! 무슨 힘이…!”

“비겁한 악마. 중등교육과정으로 넘어오면 네가 이길 줄 알았냐?”

“아! 능력치를 감췄구나! 비겁한 용사다운 수법- 꺅?!”

우득.

피해를 안 받더라도 전투력의 내 우위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조각상이 아니기에 인체공학적 탈골은 가능했다.

우선,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부터.

앞으로 목과 어깨를 돌릴 때 뻐근하고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콰직-!

벌써 통증을 호소하는 쏘시아가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살짝 바닥을 치자마자 아래가 무너지며 큰 구멍이 뚫렸다.

본격적으로 싸우면 정말 1초 만에 황궁이 무너질 터.

“여기는 안 되겠네.”

단숨에 죽이거나 제압할 수 없는 시점에 이 기습은 실패한 셈. 이젠 장소를 옮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창문으로 쏘시아를 힘껏 던졌다.

쨍그랑!

일직선으로 날아간 악마는 창문을 깨고도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했다. 하지만 그 직전에 날개를 움직이며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그렇게 되도록 놔둘 내가 아니지만.

퍽-

정의로운 날개로 추진력을 얻어서 단숨에 따라잡은 나는, 그녀의 허리를 발등으로 후려쳐서 허공으로 띄웠다.

여기라면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으리라.

▶당혹: 중등교육과정까지만 본다면, 용사가 악마를 때려잡는 건 지극히 정당한 행위인데요…. 어째선지 저까지 죄짓는 기분이에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얼굴도 예쁜 교생 아가씨! 상대는 비겁한 악마라구!

방심할 수 없다.

“아읏! 여자의 생명인 얼굴을 때려? 그러고도 떳떳하게 용사라고 말할 수 있어? 심지어 나는 약혼녀야!”

“방금까지 부정한 주제에.”

“흥! 좋아. 나도 더는 안 봐줘!”

파앗!

쏘시아를 중심으로 보라색 기운이 퍼져나갔다. 나는 저 광경을 예전에도 본 적 있었다.

늙은 왕자가 태평양에서 썼던 힘.

직업 용자의 특수효과다.

▶종족: 유니버설 휴먼 듀얼코어

▷레벨: 1

▶직업: 용자(전원=1레벨)

▶스킬: 영재ZZZ 신성Z 날조Z 편애MAX 불사MAX···

▶상태: 성검, 성녀, 용린

1레벨로 떨어졌다.

그건 용자의 힘을 발동한 쏘시아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의 변화는 레벨 하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온몸이 짙은 회색으로 물들고 시커먼 아지랑이가 온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악마의 각성인가.”

그리고 오른손에는 마검을 쥐고 있었다.

“남의 노력을 비웃는 것 같아서 이렇게까지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언젠가 너 같은 망나니랑 결혼할 여자의 행복을 위해 참교육을 시켜줄게. 능력치의 노예인 너랑 나의 차이를 깨달아봐.”

“참교육이라….”

불쾌감에 눈썹을 꿈틀한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비겁하게 변신? 그렇다면 나는 정정당당하게 소환을 하겠다.

“쏘시아, 네 미래의 남편이 스트레스성 탈모로 고통받지 않도록 정신교육을 해주마. 나와라, 캡틴 판타지.”

“응애-!”

내게 참교육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우주에 마스터 몰랑과 어머니의 테니스라켓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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