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12화 (212/430)

 212화

[12회차] 깜빡 ⑯

캡틴 판타지(Captain Fantasy)!

마스터 몰랑을 흉내 낸 몰랑몰랑한 아기 피부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고사리 같은 손에는 마왕 페도나르의 신기술인 암흑물질의 정수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등에는 최초의 정령이랑 같은 2쌍의 ‘캡틴의 날개’를 소환해서 자유롭게 날 수 있고, 3등신의 커다란 머리는 망룡왕 뇌비우스마저 식겁할 만큼 강력하다.

마지막으로,

“뭐, 뭐야! 이 아기는···? 꺅?!”

“응애!”

능력치가 존재하긴 하지만, 의존하진 않는다. 능력치가 있든 없든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종족특성을 고스란히 계승했다.

무한한 가능성.

지난번에 쓰디쓴 패배를 겪은 캡틴 판타지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체를 재구성해서 더욱 튼튼해졌다!

이것이 인간의 저력이다.

팡!

멀리서 보면 고사리 같은 손이지만, 지척에 있는 쏘시아에게는 ‘부처님 손바닥’처럼 거대한 벽으로 보일 터.

캡틴 판타지의 유일한 공격수단인 머리박치기는 필요 없었다.

흉흉한 보랏빛을 뿜는 광선검을 무시한 아기의 통통한 손바닥이 작디작은 악마를 후려쳤다.

“꺄아아앗~?!”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 쏘시아. 평범한 악마였다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졌을 텐데, 그녀는 여전히 무사했다.

나를 빼닮아서 똘똘한 캡틴 판타지의 두 눈동자가 총명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넙죽!

앞니조차 나지 않은 입을 활짝 벌린 캡틴 판타지가 쏘시아를 삼켰다. 그리고 알사탕 다루듯 혀를 굴렸다.

그대로 삼켜버릴 의도였지만, 쏘시아도 고유한 종족을 타고난 ‘두 번째 악마’답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캡틴 판타지의 입술 사이로 가녀린 팔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다른 팔 한쪽도 뒤따라 나왔다.

다음은 머리. 질퍽한 타액을 뒤집어쓰며 헤어스타일이 요염하게 변한 쏘시아가 입술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참교육해준다며?”

“...기다려. 곧 해줄 테니까. 우읏!”

쏘시아가 몸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팔과 머리 외에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나는 그 원인을 바로 눈치챘다.

“비겁한 가슴이 낀 모양이네.”

“......”

쏘시아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물리법칙을 어길 순 없었다.

쿵.

캡틴 판타지가 지상에 착지했다.

높은 산맥이 일렬로 쭉 나열되어있는 거로 봐서는 서대륙과 중앙대륙의 경계 같았다.

쿠르르르···.

아기의 엉덩이를 지탱하지 못한 산맥이 주르륵 무너지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Owuuuu~?!”

“KuKu~?!”

“Troooo~?!”

귀여운 아기에 놀란 산맥의 몬스터들이 덤빌 생각은 단념하고 줄행랑을 쳤다.

덕분에 시장바닥처럼 주위가 시끄러웠는데, 그 사이에서 비겁한 악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하악···. 하아악···.”

원인은 지극히 생물학적인 문제였다.

캡틴 판타지의 몰랑몰랑한 혀가 쏘시아의 온몸을 핥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저지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입술 밖으로 양팔은 빠져나온 상태고 몸은 껴서 야릇한 자세로 고정됐다.

쏘시아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야. 그냥 삼켜지는 게 어때?”

“...다시 못 들어가. 저 괴물의 혀가 계속 밀어- 하읏?!”

“말이 심하네. 괴물이 아니라 캡틴 판타지야. 내 어릴 적을 빼닮은 귀여운 수호신이지.”

“아, 알겠으니 좀 멈춰- 꺄앙!”

정말로 힘든 모양이다.

쏘시아의 허우적거리던 양팔도 언제부턴가 축 늘어지고, 두 눈도 초점 없이 넋을 놔버렸다. 살짝 벌어진 보라색 입술 사이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 움찔움찔 떠는 몸이 알려줬다.

“귀여운 아기랑 놀면서 반성 좀 하고 있어.”

“푸, 풀어줘···. 풀- 웃?!”

“내일 다시 올게. 깜빡하면 더 늦을지도?”

“악마···!”

야만적인 판타지 원주민들을 정의롭고 슬기롭게 다스려주는 호구 용사님을 동족 취급하다니?

하지만 내 오지랖은 우주처럼 넓고 관대하다.

쏘시아가 대화할 준비가 되면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나로선 급할 게 전혀 없었으니까.

상인공화국이 한계에 접어들었다는 건, 우르르 몰려온 상인들의 후계자를 보고 확실해졌다.

나를 상대로 말장난하긴 했지만, 그건 손해 보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상인의 버릇 같은 거기에 무시해도 좋다.

전쟁, 경제봉쇄, 무력시위, 이간질···.

지금은 무슨 수단을 써도 간단히 먹혀들 것이다.

때가 됐다.

“슬슬 중앙대륙을 접수해볼까.”

*

*

*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신성몰랑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던전을 차례차례 순례한 용사 일행은 서대륙으로 떠났다.

그들의 목적은 5대 재앙 섹스피어를 처치하는 거지만, 진짜 목적은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를 암흑공주와 암흑기사, 라누벨을 구출하는 것이다. 덤으로 적이 된 알렉스까지.

하지만 이대로 가면 또 당할 터.

그래서 키메라 천국C에서 되살린 천사를 동행시켰다. 뻔뻔한 용사들은 아쿠아도 지원해주길 원했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 전장에 여자를 데려오면 군단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하물며 저 여자는···. 지나치게 비무장입니다.”

성왕국 시절부터 상인공화국이랑 맞닿는 국경선을 지켜온 노장이 자글자글한 주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왕이 되든 정치에 관심 없고, 상인공화국의 군대와 몬스터가 이 땅을 밟지 못하게 하는데 평생을 바친 우직한 남자였다.

그렇기에 내게도 거침없이 말하는 거겠지.

“지극히 올바른 지적이다, 백작.”

전쟁은 남자. 가정은 여자.

지구 현대인의 정서에는 안 맞을 수도 있고, 또 일부는 불편하게 느끼겠지만, 여기는 지구가 아닌 판타지 세계다.

방아쇠를 당기고 버튼을 누를 줄 알면 남자든 여자든 병사A 몫을 해내는 총화기와 첨단기기가 없다.

판타지 세계의 주무기는 칼과 창이다.

무게는 평균 5kg이며, 검은 2m고 창은 6m쯤 하기에 실질적인 체감 무게는 훨씬 더 나간다.

지구의 무기들보다 훨씬 무겁고 길다.

호랑이와 늑대 같은 들짐승의 전투력이랑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몬스터의 존재 탓이다.

그렇기에 근력은 옵션이 아닌 필수.

근육 만들기가 여자보다 쉬운 남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단, 예외가 있다.

능력치가 현대의 총화기 이상으로 여자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게 도와준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없이 예쁜 몸매를 유지한 채 전투력만 올릴 수 있다.

그 증거가 용사의 동료들.

병사와 기사, 용병은 남성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지만, 용사의 동료는 남녀의 비율이 거의 똑같다. 하지만 이런 여성은 경국지색의 미녀보다 희귀한 특수케이스다.

인어공주 아쿠아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백작. 이 헐벗은 인어가 이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어줄 것이오. 생긴 건 수컷만 밝히는 음란한 물고기지만, 전투력은 그대가 아끼는 정예병과 기사들을 다 합친 것보다 우수하지.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것이 현실이오.”

“폐하의 말씀처럼 이 늙은이는 인정할 수가 없군요. 허허!”

나는 군대를 상인공화국 경계에 집결시켰다.

승리는 이미 확실했다.

돈도 중요하지만,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는 용병들은 상인공화국이 아무리 돈으로 구슬려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상인공화국은 전쟁물자가 풍부했다.

식량 빼고.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가만히 대치한 채 식량만 소비해도 신성몰랑제국의 승리다.

단,

“기다려보시오, 백작. 식량이 떨어지면 먼저 공격해올 터. 그러면 이 물고기가 쓸모 있다는 걸 그대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때까지는 이주민과 탈영병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대기하시오. 아! 정보유출은 괜찮소. 저들에게 절망만을 안겨줄 터.”

“예, 폐하.”

전쟁 선포는 하지 않았다.

내 명목은 어디까지나 국경 시찰. 그걸 증명하기 위해 갑옷 같은 무장은 일절 하지 않았다.

동행한 애완동물의 비무장은 내가 봐도 좀 심각한 수준이었지만, 윤활유를 바른 것처럼 미끌미끌한 인어의 피부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갑옷이다.

인어가 옷 입는 걸 꺼리는 경향도 있고.

단 이틀 만에 상인공화국에서 사자를 보내왔다. 승산이 없는 전쟁이란 걸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번에는 상인이 아니었다.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자라온 인상과 복장의 젊은 기사였다. 편의상 기사A라고 하자.

“신성몰랑제국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용건은?”

“군대를 물려주십시오.”

“무슨 군대?”

“이렇게 노골적인 상황에서도 아니라고 발뺌하실 참입니까? 국경에 배치된 군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건방진 기사A가 또박또박 말대꾸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네놈의 눈에는 짐이 전쟁하러 온 것으로 보이나?”

“그건···.”

기사A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 막사에는 기사와 장군 대신 아름다운 하녀들로 가득했다. 군사적인 요소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백작이 유일했다.

테이블에는 산해진미가 한가득. 군사지도나 전략보고서 같은 건 구석에조차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의자 대신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아쿠아의 미끌미끌한 몸을 거침없이 주무르고 있었다.

“짐은 신성몰랑제국의 유일한 황제다. 친척은커녕 후사도 없다. 짐이 곧 제국일지니, 신하와 백성들이 짐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 전쟁을 하든 안 하든. 안 그런가? 젊은 기사여.”

“국경에 배치된 저 많은 병력과 물자가 단순한 호위용이라고 주장하실 참이십니까?”

“저것도 많이 줄인 거지. 안 그런가, 백작?”

“그렇습니다, 폐하.”

내게 불만이 많은 신하지만,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니다. 미리 짜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장단을 맞출 줄 알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용사이십니다. 싸움을 못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걸 고려하면 지나치게 많은 병력입니다.”

“그 발언은 마치, 내 호위병력이 많아서 암살시도를 못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헉! 아닙니다! 저희 공화국은 절대로 그런-!”

“닥쳐라, 애송이. 어디서 목소리를 올려. 짐이 아무리 호구처럼 착해도 이 나라의 지배자다. 기어오르지 마라.”

“......”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판타지아 대륙에서 명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호위병력을 이끌고 유희 중’이란 확실한 명분을 갖고 있었다.

“폐하. 신께서 모든 걸 지켜보고 계십니다. 절대로 이런 폭거를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명분이 없으면 신의 기적이라도 빌어야지.

아주 뻔한 레퍼토리다.

“누구의 신이 더 강한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할 말 끝났으면 짐의 귀한 시간을 빼앗지 말고 꺼져라.”

기사A가 돌아간 직후, 상인공화국이 아닌 신성제국에서 노골적인 군사훈련으로 도발을 해왔다.

하지만 나는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 상인공화국에서 선제공격을 해왔다. 선전포고조차 없는 야만적인 기습.

“밖이 시끄럽군. 처리해.”

“네, 폐하!”

나는 비린내 나는 핫팩을 보냈고, 행복한 시간을 방해받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인어공주는 창 한 자루로 상인공화국 병력을 순식간에 몰살시켰다.

자비는 없었다.

그리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선전포고 없이 선제공격하고도 대패(大敗)한 상인공화국은 모든 나라의 맹비난 속에서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내 기분은 어제부터 계속 찜찜했다.

“중요한 약속을 깜빡한 것 같은데···. 도통 모르겠군.”

아무튼, 판타지아 중앙대륙에는 이제 신성제국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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