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13화 (213/430)

 213화

[12회차] 위대한 스승

신성제국은 2년째 계속되는 가뭄으로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악재는 황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을 자칭하는 황제가 가뭄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백성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한 신으로.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든 신의 한계지.”

그동안 신성제국의 역대 황제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랑 달리 ‘마법’이 존재했다.

나라가 가뭄과 홍수로 고통받을 때, 마법으로 비구름을 부르거나 몰아내서 날씨를 조절해왔다.

지구도 비행기 등을 이용해서 비슷하게 가능하지만, 차라리 그해 농사를 깔끔히 포기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비싸다.

그렇다면 마법은 어떨까?

판타지 세계의 마법사도 고급인력에 속한다.

단, 북대륙만은 마법사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서 인건비(?)가 저렴한 편인데, 그 치열한 경쟁에서 밀린 북대륙의 마법사들이 북대륙이랑 인접한 중앙대륙으로 많이 넘어온다.

그리고 이들은 중앙대륙의 북부를 지배하는 신성제국의 항구에서 내려, 대부분 그 인근에 정착한다. 지리상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 현상이 반복되면서 신성제국은 중앙대륙에서 유일하게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날씨 조작은 북대륙에서 ‘유용한 마법’으로 통하지만, 중앙대륙에서는 ‘신의 기적’으로 둔갑했다.

신성제국이 신성제국일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우주의 기운을 받은 이 가뭄은 얄팍한 마법을 용납하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대규모 마법으로도 보슬비가 끝.

새로운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 그런가, 신성제국의 황녀여.”

신성제국의 사자로 황녀가 왔다.

지금은 용사력 –3년. 그 탓에 황녀는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

하지만 남자가 아니고 첫째도 아닌 불리한 조건임에도 조국을 집어삼킬 야망을 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이 여자는, 떡잎 때부터 정치질을 시작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거겠지.

“소문처럼 폐하께서는 모르는 게 없는 분이시군요.”

예물처럼 예쁘게 포장해서 뒤편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는 게 일반적인 공주의 포지션이지만, 정작 사자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녀가 정면으로 나섰다.

하지만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번 만남은 온전히 황녀 본인의 인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냐?

“정략혼이라….”

“폐하. 외람되오나, 이것도 미래에 벌어지는 일이지요?”

“아니. 절대로 아니다.”

용사의 성스러운 창으로 황녀에게 참교육해준 적은 있어도 결혼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그렇군요….”

전쟁으로는 신성몰랑제국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신성제국이 선택한 돌파구는 정략결혼이었다.

딸을 주고 식량을 얻는다.

그러면 신성제국은 다양한 이득이 생긴다.

첫째, 식량부족으로 바닥을 치는 황권을 복구하고 사회경제를 정상화할 수 있다. 둘째, 평범한 장남의 황위 계승에 가장 방해되는 똘똘한 딸을 일찌감치 치워버릴 수 있다. 셋째, 원조받은 식량의 배급에 우선순위를 둬서 귀족들의 충성을 얻어낼 수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그러면 신성몰랑제국에는 무슨 득이 있지? 보다시피 짐의 주위에는 미녀가 많고, 신성제국에 바라는 것도 없다.”

“미녀는 곁에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지요?”

“네가 미녀라고?”

“앞으로 3년 이내에 될 예정입니다.”

“참…. 자신만만하군.”

“폐하가 보신 제 미래의 모습은 어떤지요?”

“...그럭저럭.”

눈앞의 황녀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지만, 외모로는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그나마 지금은 어린 게 유일한 흠이랄까?

하지만 이것도 판타지아 대륙의 귀족 사회에서는 이상하지 않다. 남자는 첫 몽정(夢精)이나 하녀를 건드린 이후부터, 여자는 초경(初經) 이후부터 어엿한 성인으로 취급한다.

그러니 황녀도 혼기(婚期)가 찬 셈.

“비록 정치적인 혼례이긴 하나, 소녀는 폐하를 사모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첫사랑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얼씨구? 꼬맹이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입바른 소리는 됐다.”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폐하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 뜁니다. 그런 남자는 지금까지 폐하가 처음입니다.”

내 눈에 비치는 황녀는, 오라비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려는 독한 여자의 어린 모습일 뿐이다. 그마저도 어리다는 탈을 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가소롭다.

판타지 경력 61년 용사를 말장난으로 이기기에는.

“말 돌리지 말고 본론만 말하는 게 어떤가, 황녀여. 이 정략혼이 신성몰랑제국에 무슨 득이 되는지 이야기하라. 할 수 없다면 추문(醜聞)만 달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소녀의 모든 것이옵니다, 폐하.”

주위에 보는 사람이 많아서 말을 돌리긴 했지만, 황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나는 확실하게 이해했다.

소녀의 모든 것.

이 발언을 평범한 여성이 하면 문제없다. 하지만 황녀가 말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황녀의 모든 것이란?

지위, 혈통, 육체, 사랑, 충성, 능력, 세력….

일반적인 판타지아 여성의 모든 것인 몸(출산)과 마음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 정략혼이 성사되면 신성제국을 주겠다.

...이런 이야기였다. 당연히 황제가 아닌 황녀 본인의 사사로운 뜻일 터. 하지만 혼수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뭐, 이렇게 나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신성제국의 황녀여. 짐이 본 그대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하지만 기회를 주도록 하지. 예쁘게 꾸민 후에 3개월 뒤에 다시 오라. 이 혼사는 그때 결정하도록 하겠다. 아! 추문이 돌지 않도록 약간의 선물을 준비해줄 테니, 섭섭하게 생각하진 말았으면 좋겠군.”

“역시 간단하지 않으신 분이군요. 하지만 소녀는 그런 폐하이기에 더욱 사모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을 결과로 보여라.”

“예, 폐하. 3개월은 좀 촉박한 듯하오나, 좋은 선물을 보내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꾸며보겠습니다.”

우리의 ‘거래’는 그것으로 종료됐다.

남들 눈에는 내가 황녀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내둘러 거절한 것으로 보일 테고, 조금이나마 정치적인 안목이 있는 자라면 신성몰랑제국에 이득이 없어서 황제가 변명한 것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틀렸다.

“무슨 선물이 좋을까….”

황녀의 힘은 미약하다.

예쁘게 꾸며서 정략혼의 도구로 소모한다는 개념이 강한 황녀와 공주의 신분으로 세력을 꾸미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닌 탓이다.

그러니 이 부족함을 채워줄 힘이 필요했다.

“영명하신 폐하께선 이미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건방진 발언은 자제하라, 신성제국의 황녀여. 네가 믿든 안 믿든 짐의 결정과 판단은 바뀌지 않는다.”

“어머! 우매한 소녀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역시나 마음에 안 드는 여자다.

나는 1초쯤 고민한 후에 결정했다.

“선물로 약간의 식량을 보내주지. 단, 이 식량을 얻어낸 공은 전부 황녀에게 있으므로 그 관리도 황녀에게 전부 위임한다. 또한, 식량을 강탈하는 도적 무리를 신성몰랑제국의 이름으로 처리할 감시자를 붙여주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오해가 없도록 황녀에게는 미리 알려주지. 동행할 감시자의 이름은 쑥떡. 짐의 양자(養子)이자 용(龍)이다. 쑥떡. 대충 이야기는 들었겠지?”

파충류를 내 아들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보낼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 내 잘못을 어쩌겠는가?

그리고 ‘신성몰랑제국 황자’라면 지위도 꿀리지 않는다. 신성제국 황제도 함부로 못 할 만큼.

상인공화국마저 병합한 신성몰랑제국은 명실공히 중앙대륙의 패자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경쟁국인 신성제국이 빌빌거리면서 견제할 수 있는 나라조차 없다.

“네, 아버- 폐하! 위대한 신성몰랑제국의 이름과 훌륭하신 황제 폐하의 평판에 먹칠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식량을 수호하겠습니다!”

홀 구석에서 듣고 있던 소년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옷도 녹색. 이런데도 어떤 계열의 용인지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다.

녹색 산성에 녹아내리고 싶다면 까불어도 좋다. 아니, 그전에 깔려 죽지 않을까? 여전히 어린 헤츨링이지만, 덩치는 성룡(成龍)을 내려다볼 만큼 크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도 아니다.

시기적절하게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고 할까?

나는 한 번도 아들이라고 말한 적 없지만, 어째선지 황궁과 수도의 시민들은 쑥떡을 내 아들로 알고 있었다.

녀석의 평판은 ‘황제랑 전혀 닮지 않은 아들’이다.

그야 당연하지. 내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는데.

“아….”

예상 밖의 선물에 놀란 황녀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쑥떡. 덤으로 식량의 분배를 맡긴 황녀도 3개월 동안 떨어지지 말고 지켜주도록. 단, 절대로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황녀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야망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열정과 능력만큼은 외모 다음으로 인정한다.

쑥떡이 그녀 옆에서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지금의 녀석은 너무 물러서 훌륭한 악룡이나 마룡이 되긴 글렀으니까.

“기대하지.”

그런데도 뭔가 마음에 안 든다. 이 계획은 완벽하다. 1초 동안 37번의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뭘 깜빡한 걸까?

*

*

*

3개월 뒤, 신성제국은 크게 3등분이 됐다.

황제를 중심으로 1황자를 지지하는 전통파, 식량을 가진 황녀를 지지하는 귀족파, 신성몰랑제국의 속국이 되자는 매국파.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2/3가 한 편인 셈이다.

성녀H가 말하길, 쑥떡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신성제국의 귀족 영애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여기에 덤으로, 식량을 얻고자 황녀를 찾아오는 귀족과 상인들까지 겹치면서 연일 파티를 연다고 한다.

나라는 지독한 가뭄과 흉년으로 날마다 백성들이 죽어가는데 파티를 연다고 원성이 자자하지만, 황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원성이 황권을 약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파티를 여는 신성제국 황녀와 귀족들은 ‘명분’이 있었다. 식량이 풍부한 신성몰랑제국의 황자인 쑥떡에게 잘 보여서 식량을 얻어내겠다는 것이었다.

파티는 그걸 위해 꼭 필요하고.

실상은, 나날이 궁핍해지는 식사와 파티에 굶주린 귀족들이 황녀의 집으로 몰려든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뭐가 됐든 명분만 있으면 됐다.

“무능한 황제는 물러나라!”

“내 처자식이 굶어 죽게 생겼다!”

“신의 기적을 보여줘!”

“내 엄마를 살려내! 이 가짜 신아!”

“신성몰랑제국 만세! 만세!”

신성제국 황궁 앞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한 차례 무력진압 해봤지만, 줄어들긴커녕 더욱 거세지면서 황궁의 입구를 틀어막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스킬 ‘교사’로 생생하게 관람 중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편리하네.”

내 밑에서 3년 동안 일하기로 한 자칭 라이벌 레몬을 용병으로 위장해서 신성제국에 염탐을 보냈다.

즉, 이 광경은 용사 레몬의 주변 상황이란 뜻이다.

“마약 용사. 어차피 올 거면서 뭐하러 그랬냐?”

내 머리 위에서 최초의 정령이 딴죽을 걸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서 신성제국에 잠입한 상태였다.

마스터 몰랑을 찾아가기 위해.

그분의 위대함을 몸소 겪을 때마다 감당하기 힘든 경외심 탓에 찾아가기 무서웠지만, 더는 미뤄둘 수 없었다.

신성제국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하지만 마스터 몰랑을 모시고 사는 촌장 일가는?

“내가 어리석었어. 마스터 몰랑은 괜찮지만, 그분을 안고 있는 소녀와 촌장 부부는 평범한 인간이란 걸. 그들이 잘못되면 마스터 몰랑이 분노할 게 분명해.”

이건 막연한 추측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대륙에서 망령왕 섹스피어가 만들어낸 가짜 황녀가 위기에 빠졌을 때, 가짜 마스터 몰랑께서 내게 몰랑거리셨다.

그때는 정말 소멸하는 줄 알았다.

“마약 용사는 걱정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너는 절대로 소멸하지 않아서 좋겠다.”

“그러는 너도 이제 종족특성 때문에 소멸할 일이 없잖아?”

“쯧쯧. 뭘 모르는군. 마스터 몰랑은 판타지 능력치 따위는 몰랑 한 번으로 무시할 수 있는 위대한 분이야.”

“고작 슬라임이 무슨….”

“질투가 추하다, 마약 정령.”

“흥!”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친 나는 온종일 최초의 정령이랑 투덕거리면서 마스터 몰랑이 은거하는 위대한 마을까지 날아갔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지나가는 상인A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잠깐만 저랑 이야기합시다.”

“케엑?! 내 목부터, 켁! 놓고 물으쇼!”

상인A가 말하길, 여기는 신성제국에서 유일하게 가뭄에 시달리지 않은 지역이라고 한다.

풍년은 아니지만, 가뭄의 단비처럼 소중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있던 단 하나의 마을은 이런 특수성 때문에 주민들이 돈벼락을 맞아서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는 중이라고….

“맙소사….”

“나도 처음에는 듣고 당신이랑 비슷한 심정이었소. 그 촌마을이 도시로 불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마법사들이 이 땅만 가뭄을 피해간 원인을 찾아본 결과, 천사들의 도시 엘몰랑도랑 가장 가깝기 때문이라고 하오. 천사들의 축복으로 이 땅만 재앙을 피해갔다는 거지.”

“...그렇군요.”

천사들의 축복이라고?

이런 사기꾼 닭대가리들을 보았나…!

“이, 이제 가도 되겠소?”

“하하! 상세한 설명 고마웠습니다. 좋은 상행 되십시오, 상인A.”

“당신도 좋은 모험 되시구려. 인연이 닿으면 또…. 커흠! 하여간 나는 가보겠소!”

내가 목을 붙잡는 바람에 약속이 늦어졌는지 상인A는 줄행랑치듯 떠났다.

마스터 몰랑이 기거하는 마을은 도시로 변했고, 그 도시로 들어가서 식량을 구하려는 상인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부 마스터 몰랑의 위업이다.

우주의 기운도 이분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은 너로 정했다.”

정의로운 MAX급 용사는 하늘을 노려봤다.

위대한 스승님의 명성을 채간 사악한 닭대가리들을 응징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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