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12회차] 두 번째의 저주 ⑮
▶곤혹: 이런 사례는 지금까지 없어서 저도 모르겠네요. 누가 자연재해를 막아냈는지….
교생 아가씨! 마스터 몰랑을 믿으면 더 예뻐져. 몰랑.
“저 위선자만도 못한 사기꾼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떠오르는 방법들은 많…. 아!”
“마약 용사. 왜 그러냐? 표정이 심상치 않다.”
“...깜빡한 게 떠올랐어.”
나는 지체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천사들의 도시 엘몰랑도 상공에서 초대형 아기가 뚝 떨어졌다.
콰아앙--!
***
“나, 쁜, 놈…! 아~주~나~쁜~놈~!”
“......”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또박또박 욕하는 여자에게 나는 반박하거나 변명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일 온다며? 내일 온다고 했잖아! 이게 하루야? 어딜 봐서 하루인데? 나는 네가 아무리 늦어도 2, 3일 안에는 올 거라고 정말 믿고 있었어. 네가 아무리 비겁한 용사라도 세포만큼의 양심과 자비는 있으리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런데…! 우주에서 가장 나쁜 새끼! 악마에게 욕먹어도 싼 새끼!”
캡틴 판타지의 입에서 풀려난 마왕의 딸 쏘시아는 3개월 동안 담아둔 울분을 토해내듯 속사포로 나를 비난했다.
“흠흠.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게 미안하다고 한마디 툭 던지면 해결될 문제야? 내가 평범한 여자였으면 분명히 이상해졌을 거라고!”
“......”
나는 힐끔 주위를 둘러봤다.
대도시란 단어로도 부족한 거대한 규모의 시가지, 그 중앙에 떨어진 캡틴 판타지와 우리를 다수의 천사가 둘러싼 상황이었다.
하지만 포위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 아기 좀 어떻게 해봐!”
“맙소사! 시장님은 이 밑에 깔리신 건가…!”
“비켜! 내 필살기로 치워볼 테니! 얍!”
“아, 안 통해…. 어떻게 이런…?”
엘몰랑도 중앙에 우뚝 솟은 건축물을 엉덩이로 뭉개버리며 깔고 앉은 캡틴 판타지.
천사들은 이 불시착에 휩쓸린 부상자와 사망자를 찾기 바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구출작업에 진전이 없었다.
“응애.”
구조물보다 더 거대한 캡틴 판타지를 치울 수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이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도시의 고도가 내려가고 있어?!”
“저 거대한 아기가 너무 무거운 탓이야!”
“지원! 지원! 이대로면 도시가 지상에 떨어진다!”
“빨리 움직여! 도시를 버릴 순 없잖아!”
우리를 경계하는 천사는 그야말로 보초병 수준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쓸 수 있는 천사는 도시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날개를 부지런히 펄럭이며 도시를 아래에서 떠받쳤다.
그그그….
추락하듯 쭉쭉 내려가던 엘몰랑도의 고도가 간신히 멈췄다. 하지만 기껏해야 유지 수준이었기에 천사들은 우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쏘시아의 폭언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 말 듣고 있어?”
“잘 듣고 있어.”
“그러면 조금 전에 뭐라고 했는데?”
“나쁜 놈.”
“전혀 안 듣고 있었잖아! 이 나쁜 놈! 너…. 계속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여전히 화가 안 풀린 쏘시아의 발언에 나는 피식 웃었다.
무언가를 참듯 허벅지를 꽉 오므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벌거숭이 악마가 떠드는 협박 따위에 겁먹을 용사가 아니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해볼 테면 해보라지.
하지만 그전에 내가 먼저 할 것이다.
내게 폭포수처럼 비난을 쏟아내고 있지만, 쏘시아의 몸은 짙은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휙-
나는 잽싸게 그녀의 잘록한 허리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에 내 팔을 두르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연약해 보이는 목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다른 손으로 움켜쥐며 고정했다.
“잠깐! 너, 설마- 우웁…!”
“후움….”
쏘시아의 시끄러운 입을 막아줬다.
이제 좀 조용하군.
나는 정정당당한 용사이기 때문에 똑같이 입술로 상대해줬다. 하지만 그녀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이 비겁한 악마의 가슴이 몰랑몰랑하게 내 넓고 단단한 가슴을 정면으로 압박하며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도발했다.
탁탁탁!
지쳐서 힘이 다한 줄 알았던 쏘시아가 양손으로 내 등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무언가 급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다.
“우읏-?!”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아있던 걸까?
얼굴이 한계의 한계까지 새빨개진 쏘시아의 허리와 두 다리가 활대처럼 휘었다. 여태까지 쭉 오므리고 있던 허벅지가 벌어지고 발끝을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참아왔던 욕망을 힘껏 분출했다.
*
*
*
“쏘시아. 이번 반격은 내 예상 밖이었다.”
“......”
“하지만 내게 복수하는 건 포기해. 안 그러면 이번에는 3개월이 아니라 3년 동안 캡틴 판타지의 입안에 넣어둘 줄…. 뭐?”
고개를 푹 숙인 쏘시아가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너무 작아서 안 들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크게 들렸다.
“용서 못 해.”
“허! 아직도 포기를 못 했냐?”
끈질기다. 심지어 죽지도 않는다. 목이 돌아가고 허리를 압박해도 상처하나 입질 않는다.
그렇다고 봉인하긴 좀 그랬다.
싸움에서 진 악마에게 내일 다시 찾아온다고 약속한 당시의 나도 참 어리석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 어긴 건 명백히 내 잘못이기에 오늘의 용사는 비겁한 악마에게조차 매우 관대하다!
“너는 나에게 영원히 씻지 못할 모욕을 줬어.”
“영원히? 닦으라고 수건도 빌려줬잖아.”
“...나는 두 번째 악마. 절대로 첫 번째가, 일인자가, 1위가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악마.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두 번째, 이인자, 2위를 놓치지 않는 악마이기도 하지.”
“그래서?”
쏘시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주의 기운을 받은 내 본능도 딱히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너 따위는 관심 없겠지만, 나는 기나긴 세월 동안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않았어. 그건 이 저주 때문이야. 나는 두 번째. 어떤 남자도 나를 가장 사랑할 수 없어.”
“그래서 동정해달라는 거야?”
“얕보지 말아 줄래? 나이를 들먹이고 싶지 않지만,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너 따위나 내게 건방지게 말하는 거야. 이 넓은 우주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악마인 나를….”
“본론만 짧게.”
사족이 길다!
“...그런 내게 모욕을 준 너를 용서할 수 없어.”
“못하면 어쩔 건데?”
쏘시아의 발언이 무척 가소롭게 들렸다.
마왕의 딸이고 두 번째 악마란 감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게 전투력을 대변해주진 않는다.
패배하면 왕이든 황제든 노예가 될 수 있다.
“나, 쏘시아는 앞으로 용사 강한수의 두 번째 여자, 두 번째 아내가 된다. 첫 번째 악마 페도나르와 첫 번째 정령 프로네시스가 공증하는 이 맹약은 절대적으로 지켜질 것이다. 영원히.”
“...뭐?”
한순간 내 사고회로가 멈췄다.
이 비겁한 악마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쉽게 설명해줄게. 앞으로 너는 절대 내게 손찌검하지 못해. 두 번째로 사랑하는 여자니까! 물론, 첫 번째 연애는 네 자유. 하지만 다음은 없어. 이제 좀 심각성을 알겠어?”
“아니.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한 번 나를 때려-”
짝!
본인이 원하기에 시원하게 때려줬다.
“뭐가 바뀐 거지?”
“어라…?”
고개가 좌로 돌아간 쏘시아는 뺨을 문지르며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는 내 머리 위에 앉아있는 최초의 정령을 돌아봤다.
“성급한 조카. 그렇게 의심하듯 바라보지 마라. 동생과 내 공증은 확실히 적용됐어.”
“그렇다면 어째서…?”
“한순간의 충동적인 감정에 치우쳐져서 어리석은 판단을 했구나. 이 녀석이 똑바른 연애를 할 놈으로 보여? 마약 용사라면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뺨도 사정없이 후려칠걸?”
다 듣고 있다, 망할 정령아.
“아….”
“하지만 이제야 상황이 이해되네. 이 녀석은 굉장한 미녀를 봐도 시큰둥한데, 유독 네 이름은 절대 까먹지 않았거든. 이것도 두 번째 저주 탓인 모양이네.”
그랬군!
어째선지 ‘쏘시아’란 이름만큼은 절대 까먹지 않았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첫 번째는 ‘라누벨’일 것이다.
나는 대화에 끼어들기로 했다.
“마약 정령. 그래서 결론이 뭐야?”
“조카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사랑 때문이 아니야. 사랑 타령할 시기는 오래전에 지났지.”
“이모! 잠깐…!”
“두 번째 악마는 영원한 이인자. 그건 부부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돼. 수평이 아닌 수직관계라고 할까? 조카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노처녀로 지내온 진짜 이유지.”
“호오?”
나는 쏘시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흠칫 몸을 한 차례 떨고는 말했다.
“너에게 물든 나쁜 이모의 말대로 그런 제약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네가 두 번째로 사랑하는 여자야. 절대로 내게 심한 주문을 할 수 없어. 이건 절대적인….”
“춤춰.”
“이상해! 이건 뭔가 잘못됐어!”
천사들이 사는 도시에서 알몸의 악마 여성이 정열적으로 춤추는 광경은 실로 엽기적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몰랑거리는 쏘시아의 가슴은 실로 비겁했다.
물론,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확인 끝. 이젠 멈춰도 돼.”
춤추기를 멈춘 쏘시아는 바로 최초의 정령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이모! 사랑하는 이모! 이 결혼을 무효로 해줘요. 제가 잠깐 미쳤던 게 분명해요. 아빠는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볼게요!”
“정말 미안해, 사랑하는 조카. 나는 이미 이 사악한 용사에게 얽매인 몸이라서. 너의 행복보다 내 마약이 더 소중해.”
“그런…!”
나는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판타지 시스템을 개발할 정도로 똑똑한 악마가 어째서 이런 중대한 실수를 했는지를.
내 생각을 귀신처럼 읽은 최초의 정령이 설명했다.
“최초의 용사 탓이야. 녀석은 모든 아내를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었거든. 그래서 아내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무조건 관대하게 용서하고 넘어갔지. 그 결과, 모든 아내에게 환멸을 느끼고 가출하게 됐지만.”
“즉,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던 거지. 정 의심스러우면 물어봐.”
“야. 들었지? 읊어봐.”
내 요구에 쏘시아는 자물쇠처럼 다문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쥐어짜듯 고백했다.
“트, 틀려…. 여러 변수를 가정한 시뮬레이션의 결과, 너는 최종적으로 나만 사랑하는 노예가 돼. 첫 번째로 사랑하는 여자를 제거하고 실종으로 처리한 후, 곁에는 나만 남게 돼.”
“휘유~♪”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타락한 이모의 말대로, 최초 녀석의 가정사를 참고해서 시뮬레이션한 건 맞아. 그 비참한 결말도 어떻게 보면 비슷…. 제발 용서해줘! 이상한 주문만은 하지 마!”
“됐어.”
“...어?! 정말로?”
“못 믿겠으면 좀 더 춤춰볼까?”
“아, 아니.”
쏘시아가 수상쩍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계속 아닌 척하고 있지만, 그녀의 ‘두 번째 저주’는 확실히 내 정신을 속박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이유는 주변 상황 탓이다.
쏘시아의 비겁한 알몸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수컷 닭대가리들. 방금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녀의 저주를 받고부터 저들의 시선이 굉장히 거슬렸다.
하지만 이 사실을 쏘시아에게 들킬 순 없었다.
그녀에게 당장 옷을 입으라고 주문하는 편이 가장 쉽지만,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곤란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남은 방법은 하나.
구경거리 대신 구경꾼들을 싹 치우는 것이다.
동물원에서도 마감 시간이 되면 동물 대신 손님을 내보내잖는가? 딱히 이상할 거 없었다.
“신성몰랑제국의 황제로서 모든 닭대가리에게 경고한다! 이 도시는 오늘부로 신성몰랑제국에 병합된다! 짐의 결정에 불만인 천사는 잘리고 싶은 머리를 들도록. 아니면 대가리 박아.”
“응애!”
쿵덕! 쿵덕! 쿵덕!
캡틴 판타지가 몰랑몰랑한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럴 때마다 엘몰랑도의 추락을 막기 위해 밑에서 떠받치는 천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궁금: 강한수 생도님. 그래서 첫 번째 여성분은 누구예요?
215